제목 | [구약] 구약성경의 물신: 권력과 재물의 소유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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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7-03-17 | 조회수5,172 | 추천수1 | |
[구약성경의 물신] 권력과 재물의 소유주
바알은 성(性)과 풍요와 재물을 약속하는 신으로서 대중적 인기가 높았다. 이번 호에서는 바알의 풍산신(豊産神)적 성격과 고대 이스라엘의 신학자들의 대응적 성찰을 살펴보자.
바알이라는 이름
바알의 풍산신의 성격은 크게 두 가지 사실에서 드러난다. 첫째는 바알이라는 이름이다. 히브리어 동사로 ‘바알’은 기본형(칼형)에서 첫째 ‘소유하다’ 또는 ‘다스리다’를 뜻하고, 둘째, ‘(여성을) 신부로 취하다’, 곧 ‘결혼하다’를 뜻한다. 여성을 남성의 소유로 취급하던 고대의 현실이 드러난다.
후대에 이 낱말은 주로 성적 의미로 진화했다. 중세 히브리어와 유다 아람어에서는 ‘성관계를 갖다’ 또는 ‘(여성을) 안다’의 뜻으로 쓰였다. 명사로 쓰일 때는 ‘소유주’ 또는 ‘남편’을 뜻했다.
바알은 고대 셈어에서 널리 쓰이는 말이었다. 곧 고대 근동 전역에서 일반적으로 ‘주인’ 또는 ‘주님’을 뜻하는 말로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던 일반명사였다. 현대의 시리아, 레바논, 터키 남부, 이스라엘,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일부 지역에서는 부동산이나 동산의 주인도 ‘바알’(=주인)이라고 했고, 결혼한 여성의 남편도 바알이라고 했다.
고대 근동의 수많은 신화에서 최고신도 바알(=주님)이라고 칭했다. 고대 이스라엘도 이 말을 그대로 썼다. 다시 말해, 바알은 본디 고유명사가 아니었고, 신과 인간의 ‘호칭’으로 쓰였다.
그런데 기원전 15세기 무렵부터 이스라엘과 가까운 지중해 동편 해안가의 도시국가에서 바알은 고유한 신의 이름으로 등장하여 급격히 퍼졌다. 이 시기부터 시리아 · 필리스티아 부근의 고대 도시국가에서는 특히 ‘바알 관련 지명’(Baal toponym)이 고고학적으로 꽤 많이 확인된다. 그리하여 구약성경에만 다음과 같은 바알 관련 지명이 등장한다. 자료가 부족하므로 아래 지역에서 저마다 바알을 어떻게 숭배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은데, 아마도 바알 신전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바알 가드(여호 11,17; 12,7; 13,5), 바알 하몬(아가 8,11), 바알 하초르(2사무 13,23), 바알 헤르몬(1역대 5,23; 판관 3,3; 시편 89,13), 바알레 여후다(2사무 6,2), 바알 므온(민수 32,38; 에제 25,9; 1역대 5,8), 바알 프오르(호세 9,10), 바알 프라침(2사무 5,20; 1역대 14,11), 바알 츠폰(탈출 14,2.9; 민수 33,7), 바알 샬리샤(2열왕 4,42), 바알 타마르(판관 20,33) 등.
사실 구약성경에 등장하지 않지만 바알을 숭배한 도시국가는 많다. 그 가운데 이스라엘에서 그리 멀지 않은 우가리트는 바알 신화가 가장 잘 보존되어 전해지는 곳이다. 필자는 우가리트어로 된 바알 신화 원문 전체를 직역하고자 2012년에 국내 최초로 우가리트 문법서와 사전을 낸 적이 있다. 이 연재도 바알 신화 원문 직역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의 일부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어느 한순간 바알이라는 신이 퍼졌을까? 아마 그 이름이 중요한 열쇠일 것이다. 바알이라는 이름은 널리 쓰이는 일반명사로서 쉽고, 그만큼 인간의 보편적 욕망을 자극하기 좋은 말이다. 성과 소유를 지배한다는 신은 얼마나 매혹적인가! 게다가 이스라엘의 주변민족들도 이 신을 널리 믿고 있으니, 우리도 그들처럼 바알을 믿어 큰 집을 짓고 살림도 넉넉하게 키워보자는 욕구를 자극할 만했을 것이다.
이중의 아버지
바알의 풍산신적 성격을 잘 드러내는 두 번째 근거는 바알의 아버지 다곤이다. 다신교의 특성상 바알은 여러 신과 복잡한 관계를 맺는데, 특이하게도 바알의 아버지 노릇을 하는 신은 둘이다. 하나는 엘이고 다른 하나는 다곤이다.
엘은 고대 셈어에서 ‘하느님’을 지칭하는 말이다. 우가리트에서 밝혀진 바알 신화의 큰 줄거리는 결국 바알이 경쟁자를 물리치고 엘의 왕위를 차지하는 것이다. 바알이 최고신 엘의 자리를 차지하여 지상과 천상의 모든 권력을 차지하는 이 신화의 내용은 차차 이 연재를 통해 소개할 것이다. 다만 오늘은 다른 아버지인 다곤을 보자.
풍요의 아버지
먼저 다곤에 대한 오래된 오해를 하나 짚고 넘어가자. 일찍이 예로니모 성인은 다곤을 ‘재앙의 물고기 신’ 또는 ‘헛된 물고기 신’이라는 뜻으로 풀이했다. 하지만 현대의 고대 근동 학자들은 이를 전면 부인한다.
다곤은 곡식의 신이다. 그런데 예로니모 성인의 견해는 후대 유다교 랍비들에게 수용되어, 「탈무드」도 다곤을 ‘물고기 신’ 또는 ‘인어’로 이해했고, 이어 중세 유다 전통에 발자취를 남긴 중요한 랍비들이 이런 해석을 따랐다. 가장 최근에는 근대 성서학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독일의 벨하우젠(J. Wellhausen)도 이 견해를 받아들여 오류가 확산되는 데 일조했다.
이따금 다곤을 물고기의 신으로 이해하는 낡고 그릇된 견해가 아직 통용되는 현실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느낄 때가 있다. 특이하게도 고대의 역사가 필론은 다곤을 ‘곡식과 쟁기의 신’, 곧 농경신으로 보았는데, 이는 현대의 고대 근동 학자들의 견해와 일치한다.
곡식의 신 다곤은 풍요의 신이었고, 셈족의 대표적 신으로서 오랫동안 대중적으로 꾸준하게 섬김을 받았다. 툿툴(Tuttul)이 고대부터 다곤을 숭배한 도시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도시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메소포타미아 남부에 있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다곤은 엔릴과 동일시될 정도로 큰 신이었다. 기원전 23세기 무렵 아카드의 사르곤 대왕의 기록에도 다곤이 나오고, 기원전 20세기 무렵 바빌론에서도 기록이 있다.
그런데 다곤은 점차 서쪽으로 퍼져나가서 구약성경 시대에는 시리아 · 필리스티아 지역에서 풍산을 상징하는 대중적인 신이 되었다. 그래서 구약성경은 다곤을 필리스티아 사람들의 대표적인 신으로 인식한다.
우가리트 신화에서 바알은 ‘다가누(=다곤)의 아들’로 자주 등장한다. 이런 호칭은 바알의 세속적 매력을 높여주었을 것이다. 바알은 한편으로 최고신 엘의 자리를 차지하는 신이요, 다른 한편으로 풍요의 신 다곤의 아들이다.
최고 권력자의 아들이요 최고의 풍산신의 아들이니, 권력과 재력을 한 몸에 받은 셈이다. 이런 면에서 바알은 매우 현실적인 욕구를 들어줄 것 같은 신으로서 한없이 매혹적인 모습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성경의 다곤
다곤은 사실 구약성경에 크고 작은 흔적을 많이 남겼다. 지면의 한계 때문에 여기서는 몇 가지만 추려보겠다. 먼저 사무엘기 상권 4장을 보면, 이스라엘이 계약 궤를 빼앗기는 장면이 나온다. 이어지는 5장에서 다곤이 등장한다. 필리스티아인들은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궤를 아스돗에 있는 ‘다곤 신전’에 옮겼다(1-2절).
고대 근동의 전쟁에서 패한 편의 신을 승리한 편의 신전에 두는 것은 복종을 의미하는 행위였다. 그런데 ‘고대 근동의 상식’을 깨는 일이 발생했다. 다곤 신전은 다곤의 영험한 기운이 지배하는 곳임에도, 오히려 다음날 “다곤이 땅에 얼굴을 박은 채 주님의 궤 앞에 쓰러져 있었다”(3절). 그리고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4절). 하느님은 다곤 신전에서 다곤을 이기셨고, 결국 궤는 이스라엘로 돌아왔다(6장).
이렇게 다곤을 ‘필리스티아인들의 신’으로 묘사하는 이야기는 삼손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다. 삼손이 들릴라의 계략에 빠져 두 눈마저 잃고 비참한 처지로 몰락하자(판관 16,21), 필리스티아의 제후들은 신이 났다. 눈엣가시였던 삼손을 사로잡은 그들은 “자기들의 신 다곤에게 큰 제물을 바치면서 기쁘게 지내려고 한데 모였다”(16,23). 그들은 “우리의 원수 삼손을 우리의 신께서 우리 손에 넘겨주셨네.”(16,23)라고 거듭 노래하며 기뻐하였다.
사울 이야기의 끝자락에도 다곤이 등장한다. 사울이 전쟁터에서 죽자, 필리스티아인들은 “땅 곳곳으로 사람들을 보내어 저희 우상들의 신전과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알렸다”(1사무 31,9). 역대기 상권에 따르면 필리스티아인들은 사울의 머리를 “다곤 신전에 매달아놓았다”(10,10). 짐작건대 필리스티아인들은 사울의 죽음도 다곤의 영광으로 돌렸을 것이다.
이 단편적인 이야기들에서 등장하는 다곤을 보면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먼저 구약성경의 기록은 고고학적으로 밝혀낸 고대 근동의 상황과 전반적으로 일치한다. 다곤 숭배가 급속히 퍼졌고, 다곤과 바알이 부자 관계로 끈끈히 맺어진 상황에서 이스라엘인들은 필리스티아인들과 갈등했다. 필리스티아 편에서 보자면 다곤은 적잖은 승리를 가져온 신인 셈이다. 다곤의 이런 면도 바알의 아버지로서 손색이 없다고 하겠다.
바알이 아니라 아도나이다
사실 고대 이스라엘의 언어는 고대 셈어의 일종으로 주변 민족의 언어와 매우 닮았다. 그래서 이스라엘인들과 필리스티아인들은 통역 없이 서로 의사소통할 수 있었으리라 추측한다. 성경에서 다윗 등이 필리스티아로 망명하는 장면이나 필리스티아인과 이스라엘인이 대화하고 교류하는 장면을 보자. 그들이 서로 통역을 필요로 했다거나, 서로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거나 하는 경우는 없다.
바알은 고대 셈어에 널리 퍼진 일반명사였다. 그래서 일부 이스라엘인들도 초기에는 하느님을 ‘주님’으로 부를 때 ‘바알’이라고 불렀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그들은 곧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우리의 하느님은 물건의 주인이거나 성의 주인에 머무르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런 신들과는 전혀 근본적으로 다른 분이시다. 그래서 이스라엘인들은 유일하고 독특한 칭호로 ‘주님’을 부르기 시작했다. 고대 근동 세계의 매우 특이한 신의 호칭인 ‘아도나이’(나의 주님)는 그렇게 생겨난 것 같다.
고대나 현대의 모든 번역본이 이 점을 예민하게 구별한다. 물건의 소유주로서 주인(owner)과 참된 ‘나의 주님’(my Lord)를 섞지 않는다. 재력과 권력과 성의 지배자가 아무리 매혹적일지라도, 이웃들도 너나없이 믿으니까 나도 믿자는 마음이 자연스레 들더라도, 그런 소유주는 나의 주님이 될 수 없다는 성찰이 이런 호칭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우리의 참된 주님께서는 오히려 소유의 노예가 되지 말고 자신을 비우라고 가르치신다. 나의 주님께서는 스스로 낮게 임하신 분이 아닌가.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신 사순시기가 이 3월에 시작된다.
*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 -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으로 고대 근동과 구약성경을 연구하는 평신도 신학자이다. 주교회의 복음화위원회 위원이자 의정부교구 사목평의회 위원이다. 저서로 「구약성경과 신들」과 「신명기 주해」 등이 있다.
[경향잡지, 2017년 3월호,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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