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인물]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요한 세례자, 옛 시대와 새 시대의 가운데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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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7-03-17 | 조회수5,371 | 추천수1 | |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요한 세례자, 옛 시대와 새 시대의 가운데서
즈카르야의 기도와 믿음 사이에 무슨 일이
늦둥이인 요한 세례자의 탄생설화는 루카 복음 1장에만 나온다. 사제 가문에 속했던 요한 세례자의 부모인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고령이었고, 평생 불임이었던 엘리사벳은 마음고생이 심했다(25절). 그들은 아기를 낳게 해달라고 평생 하느님께 기도했다.
마침내 그들의 정성 어린 기도가 하늘에 닿아 성전에서 사제직을 수행하던 즈카르야에게 천사가 나타나 그들의 기도가 이루어졌다는 기쁜 소식을 알려준다. 그러나 즈카르야는 ‘우리 부부는 생물학적으로 절대로 아기를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기도를 그토록 열심히 했건만 정작 그 기도가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니 놀랍지 않은가!
어이없는 상황이지만 즈카르야의 이런 태도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가브리엘 천사의 과한 반응이다. 즈카르야의 불신에 대해 뭐가 그리 불편했는지 그를 ‘벙어리’로 만든다. 어찌 보면 하느님에 대한 월권이 아닌가?
즈카르야가 성소에서 나오지 않은 것에 대해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한 것은 당연하였다. 즈카르야가 빨리 나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가 벙어리가 된 채로 나왔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제비뽑기를 통해 성소에 들어가 분향할 사제는 동료들의 호위를 받으며 성전 계단을 올라간다. 그리고 혼자 성소에 들어가 정면에 놓인 분향 단에 향을 사르고 엎드려 하느님을 찬양한 뒤 나오면 된다. 향단에 이미 불이 피워져 있기에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어찌 되었건 즈카르야는 믿지 않았기에 벙어리가 되는 고통을 겪었다. 말을 하지 못하며 지내는 동안 아마도 신앙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깊이 숙고해 보았을 것이다. 우여곡절을 겪고 마침내 엘리사벳은 건강한 아기를 낳았고, 기적적으로 얻은 이 늦둥이의 아버지는 입을 열어 하느님을 찬미했다.
광야에서 외친 ‘회개의 합당한 열매’
루카는 요한이 세상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고 한다(1,80). 이 구절 때문에 몇몇 학자는 요한이 에세네파로 알려진 쿰란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가설을 내놓기도 한다. 그 근거로 에세네파는 삶의 방식이 매우 엄격하고 결혼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한 세례자는 공동생활을 하는 에세네파와 달리 광야에서 고독하게 홀로 외치는 사람이었다.
요한 세례자가 광야에 나타났을 때 아마 당시 사람들은 그분의 모습과 삶의 방식에 대해 신선한 충격을 받았을 것 같다. 요한 세례자는 일반적으로 남자는 결혼을 해야 하는 관습을 가진 유다인으로서는 용인하기 어려운 독신에, 낙타 털옷을 입고 들꿀과 메뚜기만 먹으며 사는 금욕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술꾼이요 먹보로 불린 예수님과 달리 요한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다며 “마귀가 들렸다.”(마태 11,18)는 소문이 자자했다. 꿀과 메뚜기가 그의 주식이었다면 마른 외모를 가졌을 수도 있다.
요한 세례자는 아주 뛰어난 설교가였다. 그의 거침없고 명쾌한 설교는 평민들뿐만 아니라 성전 지도자들의 마음까지도 움직였던 것 같다. 사람들은 그가 ‘메시아가 아닐까?’(루카 3,15) 하고 기대하고 있었기에 ‘독사의 자식들’(루카 3,7)이라고 일컫는데도 기꺼이 들었다.
그는 메시아가 오시기 전 사람들이 준비할 그 무엇을 알려준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회개의 삶이다. 그중 하나가 개인적으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인데 그가 말하는 그 열매는 적절한 삶의 방식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군중에게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한다. 세리에게는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하고, 군인들에게는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하고 일렀다(루카 3,11-14). 너무나 구체적이어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이다.
그는 개인의 회개를 이웃에 대한 사회적 정의 실천과 연결 짓는다. 사회적 정의에 대한 개인의 개념과 실천은 차이가 있다. 현실에도 있을 법한 인물들을 영화 ‘레 미제라블’에서 찾아본다면 자베르와 미리엘 주교일 것이다.
두 사람의 정의 실천 방법은 서로 확연히 다르다. 자베르 경감이 성당 지붕에서 부른 ‘별’(star)이란 노래의 내용을 보자. 자베르는 자신도 저 별들처럼 자신의 자리, 방향과 목표를 잘 알고 언제나 질서와 빛으로 세상을 지켜내는 정의의 파수꾼으로 살겠다고 한다. 그에게 정의는 타협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한 번 도둑은 영원한 도둑인 장발장과 달리 ‘하느님의 길을 가는’(Mine is the way of the Lord) 자신은 질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은총이 가져온 장발장의 변화와 용서받는 것조차 받아들일 수 없었던 자베르의 정의는 그를 자살로 이끈다.
이와 달리 미리엘 주교의 정의의 개념은 다른 차원을 보여준다. 미리엘 주교의 호의에도 배은망덕하게 은수저를 훔친 장발장이 경찰에 잡혀왔을 때 주교는 경찰들 앞에서 오히려 장발장에게 은수저를 선물로 주었다고 할 뿐 아니라 은촛대까지 더 주어 보낸다. 타인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미리엘 주교의 마음은 한 영혼의 삶의 지평을 바꾸어놓는다. 그런 의미에서 타인에 대한 진심과 배려는 어쩌면 가장 상위 개념의 정의를 실천하는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요한 세례자의 역린
요한 세례자의 정의의 외침은 그 당시 임금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공관복음서 저자들은 모두 요한 세례자의 죽음 이야기를 비중 있게 다루는데 그가 헤로데 안티파스와 헤로디아와의 비윤리적인 결혼을 비판했기 때문에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반해 요세푸스는 요한 세례자에 대한 백성의 존경이 헤로데 안티파스의 편집증과 맞물려 정치적인 폭동이 일어날까 두려워 그를 죽였다고도 본다(「유다 고대사」 참조).
요한 세례자는 헤로데에게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여러 차례 말했다(마태 14,4). 양쪽 모두 사실혼 관계에서 자신의 이복형제의 부인을 도중에 아내로 취한다는 것은 참으로 옳지 않은 일이다.
헤로데에게 올린 요한 세례자의 직설적 간언은 한마디로 ‘역린’이다. 잘 알다시피 ‘역린지화’에서 유래된 ‘역린’은 용의 몸에 붙은 81개의 비늘 중 딱 하나 거꾸로 붙은 비늘이다. 역린은 왕의 약점을 건드리는 것으로서 왕의 비위를 건드려 분노를 사면 비명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요한 세례자의 간언이 마음에 심히 고통을 주지만 헤로데는 그를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의 말을 참고 있었다. 아마 헤로디아의 간계가 아니었다면 그는 죽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요한 세례자가 닦은 그분의 사랑의 길
네 복음서 모두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요한 세례자에게 세례를 받으셨다고 기술한다. 요한의 이름에 붙은 ‘세례자’라는 신분이 그의 역할을 보여준다. 그의 세례는 당대 유다인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뒤에 예수님께서 자신이 성전에서 가르치는 것에 대한 권한을 묻는 성전 지도자들에게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마태 21,25)라고 되물을 정도로 권위 있는 행위였다.
마침내 요르단 강에서 요한은 예수님을 만났다. 감히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에게 세례를 주지 못하겠다는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마태 3,15)라고 하셨다. 옛 시대에서 새 시대로 오는 다리는 두 분의 ‘겸손’으로 이렇게 자연스럽게 놓였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요한 세례자는 이미 자신의 제자 무리가 있었고, 당대 백성뿐만 아니라 임금까지 기꺼이 그의 말에 귀 기울일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다. 아마 마음만 먹으면 모두가 기대하듯이 그가 메시아라고 해도 믿었을 것이다. 요한 세례자 사후 카이사리아 필리피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 첫 번째 대답이 요한 세례자라고 했을 정도이다(마르 8,28).
그러나 요한 세례자는 자신은 메시아가 아니며(요한 3,28), 뒤에 오실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루카 3,16)고 고백한다. 한마디로 자기인식이 명확한 사람이다. 자기인식이란 제 생각, 감정과 욕구, 가치 등을 인식하는 능력이다. 이 자기인식이 명확할 때 자신감과 자존감, 수용성과 개방성이 크며 개인과 세상의 상호작용을 원활하게 해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겸손할 수 있다.
목숨을 내건 역린의 결과로 쓸쓸하고 외로운 지하 감옥에 갇혀있을 때도 그는 ‘오실 그분’을 재확인하려고 제자들을 예수님께로 보낸다. 그의 질문에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루카 7,22)고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셨다. 이 말씀을 전해 들었을 때 그는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었을 것이다. 새로운 시대를 여실 그분은 바로 요한 세례자가 닦아 놓은 길에 ‘사랑’을 펼쳐 보이시며 걷고 계셨기 때문이다.
게리 윌스는 이렇게 말했다. “예수의 복음서는 사랑이 전부이다. 하지만 그 사랑은 꿈같거나, 감상적이거나, 복받쳐오르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급박하고, 타는 듯하며, 무서운 급진적인 사랑이다”(「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 사랑의 길은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까지(루카 6장 참조) 해야 하는 것으로서 요한 세례자가 군중에게 요구한 것보다 더 급진적일 뿐만 아니라 가히 혁명적이기까지 한 요구이다.
요즈음 겪고 있는 국민의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를 준 ‘최순실 · 박근혜 게이트’는 긴 세월 동안 쌓인 비윤리적인 병폐가 만들어낸 부정적인 열매이다. 한 개인에게 주어진 거대 권력이 다수를 위해 봉사하지 않고, 정권을 지키려는 부적절한 거래를 통해 정치자금 모금, 정경유착, 불공정한 거래를 축적한 부 등이 오랜 세월 용인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국민이 올바른 정의를 세우려고 엄동설한에 촛불을 들고 추위를 견디며 불을 밝히는 이 시점에서도 올바른 부의 분배와 국민을 존중하는 문화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미래를 창조하려면 꿈만 한 것이 없다. 오늘의 유토피아가 내일의 현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 프랑스의 시인 위고의 말처럼 희망을 품자.
우리 각자가 요한 세례자가 말한 것처럼 자기가 취할 만큼만 취하며 타인을 생각하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멋진 신앙인이 되었으면 한다.
* 허귀희 클라라 - 아시시의프란치스코전교수녀회 수녀. 미국 엘름스대학교에서 종교학과 신학을 전공하고, 가톨릭대학교에서 성서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예수회 영성 센터에서 ‘성경과 영성’을 가르치며, 성경의 학문적이고 영성적 의미를 통합하고자 연구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7년 3월호, 허귀희 클라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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