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 히브리어 산책: 헤세드, 자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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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7-03-18 | 조회수14,459 | 추천수1 | |
[주원준의 히브리어 산책] 헤세드, 자비 하느님 자비에 대한 보답은 '사랑 실천'
헤세드는 자비의 희년을 계기로 재조명된 중요한 낱말이다. 자비의 희년은 지났지만 여전히 하느님의 크신 자비가 우리에게 내리고 있다. 오히려 자비의 희년이 지난 지금이야 말로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묵상하기 좋은 시간일지 모른다. 오늘은 헤세드에 대해서 알아보자.
- 헤세드. 본디 ‘구체적인 상호 의무의 실천’을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훗날 신의, 자애, 자비 등의 추상적인 말로 발전했다.
상호 의무
헤세드는 흔히 ‘자비’라는 추상적 의미로 잘 알려져 있지만, 본디 ‘구체적인 상호의무’를 뜻하는 말이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 계약을 맺을 때, 아비멜렉과 그의 장수인 피콜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그대에게 헤세드(호의)를 베푼 것처럼… 그렇게 대해 줄 것을 여기에서 하느님을 두고 나에게 맹세해 주시오”(창세 21,23)라고 말했다. 이렇게 계약이란 ‘서로 헤세드를 약속하는 것’이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이야기를 읽어보면, 헤세드가 구체적인 상호 의무를 의미함을 잘 알 수 있다. 여호수아가 예리코 성읍을 점령할 때, 라합의 도움은 절대적이었다. 라합은 하느님의 크신 업적을 이미 알고 있었고, 여호수아가 보낸 정탐꾼들에게 적극 협조했다. 그녀는 정탐꾼들에게 “내가 당신들에게 헤세드(호의)를 베풀었으니, 당신들도 내 아버지의 집안에 헤세드(호의)를 베풀겠다고 주님을 두고 맹세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여호 2,12) 그녀는 증거로 신표를 받았고, 그들은 서로 약속을 실천했다.
- 그의 자비.시편 136편의 후렴구에서 ‘주님의 헤세드(자애)’로 옮긴 말이다. 맨 뒤의 장음 오(o)는 명사 등의 뒤에 붙어 사용되는 3인칭 인칭대명사로서 ‘그의’란 뜻이다. 달레트(d) 안에 하늘색으로 찍은 점은 일부 자음(bgdkpt)으로 음절이 시작할 때만 사용되므로(약한 다게쉬), 이런 경우에 d를 겹쳐쓰지 않는다. 갈색 윗첨자 e는 발음되지 않지만 초보자를 위해서 표기한 것이다(무성셰와).
요셉 집안이 베텔로 올라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요셉 집안은 정찰꾼을 보냈고, 그 성읍에서 어떤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고 헤세드를 약속한다. 정찰꾼들은 “성읍으로 들어가는 길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오. 그러면 우리가 그대에게 헤세드(은혜)를 베풀겠소”(판관 1,24)라고 말했다.
모세는 주님과 맺은 계약을 설명하면서 헤세드가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하느님께서 백성을 선택하셔서 계약을 맺어 주신 것은 우리에게 크신 자비(헤세드)를 약속해 주신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도 당연히 하느님께 사랑의 실천(헤세드)을 드려야 한다는 말이다. 모세의 말씀을 들어보자. “너희가 이 법규들을 들어서 지키고 실천하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도 너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계약과 헤세드(자애)를 너희에게 지켜 주실 것이다.”(신명 7,12)
- 이쉬 헤세드. ‘헤세드의 사람’이란 뜻으로,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 충실하게 실천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헤세드의 사람
우리는 ‘히브리어 산책’ 3회에서 ‘이쉬’가 ‘사람’을 뜻함을 알았다. 그렇다면 ‘이쉬 헤세드’, 곧 ‘헤세드의 사람’은 어떤 뜻일까? 바로 ‘상호 의무를 충실히 실천하는 사람’을 의미할 것이다. 모세가 말한 “당신께 충실한 이”(신명 33,8)나 이사야 예언자가 복수형으로 표현한 “성실한 사람들”(이사 57,1)은 모두 이쉬 헤세드를 옮긴 말이다. 잠언을 보면 “이쉬 헤세드는(자애로운 사람은) 자신을 이롭게 하고 / 무자비한 자는 제 몸을 해친다”(잠언 11,17)는 말씀이 있다. ‘무자비한 자’의 반대말이 이쉬 헤세드이니 이는 곧 자비로운 사람이다.
자비행(慈悲行)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는 구원사에서 잘 볼 수 있다.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헤세드를(자애로운 업적을)’ 회상하며, “우리에게 베푸신 그 모든 것을, 이스라엘 집안에 베푸신 그 헤세드(선업)을 회상하리라”고 외쳤다. 주님의 자비는 곧 그분의 크신 자비행이다.
헤세드는 구약성경에 250번이나 나오는데, 대략 절반이 시편에 집중된다. 그래서 헤세드는 시편이 사랑하는 말이라고도 할 수 있다. 특히 시편 136편은 대표적이다. 모두 26절로 된 시편 136편은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 행위를 나열하며 모든 절의 끝마다 “주님의 헤세드(자애)는 영원하시다”는 후렴구를 붙인다. 시편 136편은 주님이 해주신 모든 것이 그분의 자비에서 우러난 행위임을 느끼고 깨달으라고 권유한다. 시편 33편의 “그분은 정의와 공정을 사랑하시는 분. / 주님의 헤세드(자애)가 땅에 가득하네”(시편 33,5)라는 노래도 마찬가지다. 하느님의 헤세드는 정의와 공정과 한 몸을 이룬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헤세드를 잘 보여주신다. 야곱의 우물가에서 비천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친절과 자비를 실천하심으로서 주님은 복음을 전하셨다. 오늘날 우리의 자비행은 무엇일까를 묵상한다.
* 주원준(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 독일에서 구약학과 고대 근동 언어를 공부한 평신도 신학자다.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주교회의 복음화위원회 위원, 의정부교구 사목평의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7년 3월 19일, 주원준(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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