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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세상의 강함과 하느님의 허약함: 허약함의 신비에 비추어 본 1코린 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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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7-04-04 조회수4,937 추천수0

[약함을 묵상하다] 세상의 강함과 하느님의 허약함 - 허약함의 신비에 비추어 본 1코린 1,18-25

 

 

허약함의 사도

 

성경 전체를 통틀어 바오로 서간, 특히 두 권의 코린토서야말로 ‘허약함의 신학(혹은 영성)’의 가장 풍요로운 젖줄입니다. 신약성경 전편을 통틀어 ‘허약함’(astheneia)이란 말은, 형용사와 동사까지 포함하여 총 83회 나오는데, 이 중 53%에 해당하는 44회가 바오로 서간에 등장합니다. 특히 코린토 1, 2서와 로마서에만 37회나 나옵니다.

 

고대 사회에서 이 단어는 통상 신체와 정신의 허약함(병도 포함)을 뜻했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허약함’이라는 말의 통상적 의미를 넘어서, 각별한 신학적 의미를 그 말에 부여하고 자기 가르침의 주제로 사용합니다.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난 곳이 1코린 1-2장과 2코린 10-13장입니다. 오직 바오로만이 긍정적인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하였고, ‘약함’의 역설(逆說)을 통해 하느님의 ‘강함’을 매우 적절하게 풀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오로를 ‘허약함의 사도’라 부를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말씀

 

바오로의 확신대로, 하느님의 신비는 ‘십자가의 말씀’(ho logos toustaurou)(1코린 1,18)에서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환히 드러난(혹은 어둡게 숨겨진!) 하느님의 지혜와 힘은 머리로만 알아들을 수도 없고, 말로 모두 설명될 수도 없습니다. 무릇 무한하고 궁극적인 신비에 근접하는 모든 사람들이 체험하듯, 이 자리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자리입니다. 노자가 “아는 자는 말하지 않으며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知者不言, 言者不知)”(《도덕경》 56장)라고 한 것이 그런 이유일 터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인 이상 말을 마지막까지 여의지는 못합니다. 무언가는 말해야 합니다. 특히 말씀을 전하는 이는, 상처 입고 뒤집어져 피 흘리는 말일지라도 사용할 엄두를 내야만 합니다.

 

“산은 물이요 물이 산이다(山是水, 水是山)”라는, 말장난처럼 들리는 말을 들어 보셨지요? “가장 환한 것은 가장 어두운 것이고, 가장 높은 것은 가장 낮은 것이며, 가장 빈 것이 가장 찬 것”이라는 신비가들의 한결같은 말씀도요? 모두가 언어도단의 지경에 이른 사람들의 말입니다.

 

1코린 1,18-25에서 바오로도 같은 지점에 서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그래서 어리석을 뿐 아니라 정신 나간 소리처럼 들리는 말들을 사용하여, 머리로만은 이해할 수 없고 말로 만은 전달이 안 되는 하느님의 본색, 저 ‘십자가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신비 체험의 절정’이라고까지 불리는 이 대목이 전하는 ‘십자가에 드러난 하느님의 어리석음(혹은 광기!)과 허약함은 이런 맥락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아는 것이 힘?

 

본문은 두 축 사이의 팽팽하고 첨예한 긴장 구조로 짜여 있습니다. 한 축은 ‘세상의 지혜와 힘’이고, 다른 축은 세상이 들어 보지 못한 ‘하느님의 지혜와 힘’입니다. 후자를 알아듣기 위해 전자를 우선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자는 교회 안팎을 막론하고, 어제나 오늘이나 모든 사람의 ‘상식’(common sense)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지혜’는 일차적으로 ‘힘’과 관련된다는 사실을 가장 잘 설명하는 예가 바로 ‘아는 것이 힘이다’(Knowledge is power)는 말일 것입니다. 유럽의 식민주의가 아직 맹위를 떨치던 때, 영국 런던의 ‘동방 아프리카 연구소’(Oriental and Asian Studies) 입구 현판에 바로 이 표어가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이 연구소는 독일이나 프랑스 등 앞서 나가던 식민지 경영국가에 비해 자신들이 ‘동양학’(orientalism) 연구에 뒤처졌다는 위기의식에서 영국이 1916년에 부랴부랴 설립했다지요. 오늘도 동양학 분야 연구자는 동양을 떠나 서양의 옛 식민지 경영국가들에 가서 자료를 찾고 배워야 한다니, 아이러니지요? 그러나 ‘동양학’이라는 게 동양의 여러 나라를 식민지로 거느리던 유럽인들이 동양인들을 더욱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생긴 학문이란 사실을 감안하면 그리 놀랄 일만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지식은 타자를 지배하는 약함을 묵상하다 데 있어 필수 불가결할 뿐만 아니라 가장 효과적인 방편이라는 사실입니다. 타자를 지배하기 위해선 우선 그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많이 지녀야 합니다. 그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며 정리하는 부서를 흔히 ‘정보국’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정보국’이란 말로 쓰인 영어 intelligence는 일차적으로 지성이나 이해력(그러니까 지혜)을 뜻하지요. 결국, 세상에서 ‘지혜’란 지식(혹은 정보)과 힘(지배, 통제, 장악)을 연결해 주는 어떤 것일 따름입니다.

 

결론적으로, 세상의 ‘지혜’와 ‘힘’은 근원적으로 자기중심적이며, 자기를 향해 그리고 자기를 위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지혜와 힘은 세상에서 ‘있어 보이게’ 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그 사회적 효력 면에서 보자면, 실제로 ‘있게’까지 합니다.

 

 

십자가의 어리석음과 허약함

 

그러나 이와는 전혀 다른 지혜와 힘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어리석음과 무력함’입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타자중심이라, 타자를 향해 그리고 타자를 위해 있습니다. 이것은 힘을 자기에게 집중시키기는커녕 모든 힘을 방출해 버리고 상실해버립니다. 그래서 힘을 얻는 데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가장 큰 장애가 됩니다. 참으로 사랑하면, 사람들이 함부로 발로 차도 된다고 여기는 골목 한구석의 ‘연탄재’(<너에게 묻는다>, 안도현)처럼 됩니다. 강하기보다 약하게 되고, 하염없이 상처 입기 쉬운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이런 방향으로 이끄는 지혜, 세상에서 ‘없어 보이게’ 하고 그리하여 ‘없게’ 만드는 지성이나 지식은 세상의 눈에는 어리석거나 ‘미친 짓’일 따름입니다.

 

그러나 바오로가 터득한 것은, 이런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1코린 1,25)다는 사실입니다. 나아가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약한 것을, 한마디로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없는 것’을 선택하셨단 사실입니다(1코린 1,27-28). 바로 이것이 구세사에서 하느님이 당신의 사람들을 선택하시는 한결같은 원칙이었습니다. 세상이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는(더정확히 말해 알아듣기 싫고 두려운!) 이런 종류의 지혜와 힘이 드러난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 ‘십자가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들이고요.

 

 

누가 약자인가?

 

‘허약함의 신비’에 대한 우리 묵상의 출발점과 종착점은 사실 하느님 자신의 허약함입니다. 다음 달부터 하느님의 이 허약함이 교회 공동체와 개인에게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고 또 드러나야 하는지 보기로 하고, 이번 달엔 질문 하나로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에, 둘 중 한쪽이 다른 쪽보다 조금이라도 더 사랑하기 마련이라는 전제 아래, 누가 더 약자일까요? 그리고 우리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면(1요한 4,8), 하느님과 우리 중 도대체 누가 더 약자일까요?

 

* 이연학 신부는 최근 설립된 파주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 수도원에 살면서 형제들과 함께 중장기 계획으로 동남아 올리베따노 공동체 창설을 준비하고 있다.

 

[성서와함께, 2016년 8월호, 이연학 요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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