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 히브리어 산책: 하론 · 헤마 · 아프(분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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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7-04-10 | 조회수6,918 | 추천수0 | |
[주원준의 히브리어 산책] 하론 · 헤마 · 아프 노여움 거두고 용서하는 자비의 주님
히브리어에서 ‘분노’를 뜻하는 다양한 낱말이 헤트로 시작한다.
- 하론. 하라의 명사형으로, 어원은 ‘뜨거움’ 또는 ‘불’이란 뜻이지만, 대개 ‘노여움’이란 의미로 쓰인다.
코가 뜨거워지다
하라는 ‘화가 나다’는 뜻의 동사인데, 본디 ‘뜨거워지다’를 의미하는 말이었다. 우리말도 노여워하거나 성을 내는 것을 ‘화(火)가 나다’고 표현하니, 히브리어와 우리말이 통한다고 할 수 있다.
특이하게도 히브리어에는 ‘코(아프)가 뜨거워지다(하라하다)’는 관용구가 자주 쓰인다. 성을 내면 씩씩거리며 코에서 거친 숨을 내뱉게 되니, 이런 표현이 자리 잡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코가 하라하다(뜨거워지다)’는 표현은 워낙 독특한 히브리적 표현이라서 의역할 수밖에 없다. 몇 가지 예를 보자.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였지만 하느님은 불쌍한 레아의 처지를 살펴주셨기에 레아는 야곱에게 아들을 줄줄이 낳아 줄 수 있었다.(창세 29,15-35) 그러자 라헬은 시샘하여 야곱에게 불평하였다. 결국 야곱은 ‘코가 하라하며(뜨거워지며)’(화를 내며 30,2) 라헬을 대했고, 라헬의 몸종 빌하에게서 아들을 얻었다.
주님께서 이집트 탈출이라는 위대한 사업에 쓰시려고 모세를 선택하셨을 때, 모세는 두려워하면서 “주님, 죄송합니다. 제발 주님께서 보내실 만한 이를 보내십시오”라며 사양하였다. 그러자 ‘주님의 코가 하라했고(뜨거워졌고)’(주님께서 화를 내며, 탈출 4,13-14), 결국 그는 말을 잘하는 형 아론과 함께 파라오 앞에 나아갔다.
하라의 명사형은 하론이다. 하론의 어원은 ‘뜨거움’ 또는 ‘불’이지만, 대개 ‘노여움’이란 뜻으로 쓰인다. 성경에는 ‘코의 하론’이란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광야에서 백성이 모압의 여자들과 불륜을 저지르자 “주님 코의 하론”(주님의 타오르는 분노, 민수 25,4)이 백성 위에 내렸다. 하지만 백성의 악한 짓이 끊이지 않자, 다시 “주님 코의 하론”(주님의 분노, 민수 32,14)이 이스라엘을 향해 불붙었다.
- 헤마. 본디 ‘열기’ 또는 ‘독’을 뜻했는데, ‘분노’의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그러므로 더욱 ‘독한 분노’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독한 열기
헤마도 분노를 뜻한다. 구약성경에 120회나 등장하는 익숙한 낱말로서, ‘열기’나 ‘불꽃’을 의미했지만, ‘독’(毒)이란 뜻도 있었다. “뱀의 헤마”는 “뱀의 독”(신명 32,33; 시편 58,5)이란 뜻이다. 독에 물리면 화끈거리고 고통스럽지 않은가. 헤마는 그런 느낌의 분노를 표현하는 말이다. 그래서 어쩌면 헤마는 하론보다 더 독한 느낌의 분노라고 볼 수 있다. 야곱이 에사우의 복을 가로채자 에사우는 앙심을 품고 야곱을 죽이려 하였다. 이를 눈치챈 레베카는 야곱에게 권하길, 어서 달아나서 “네 형의 헤마가(분이) 풀릴 때까지”(창세 27,41-44) 라반에게 가 있으라고 말했다.
코와 눈
앞에서 본 것처럼 ‘코(아프)’는 분노의 자리였기에 ‘아프(코)’만으로 분노를 표현할 수 있었다. 모세는 백성의 죄 때문에 주님께서 품으신 “코와 헤마를”(분노와 열화를, 신명 9,19. 참조 29,23.28) 두려워하여, 사십일 낮밤을 엎드려 주님께 간청하였다. 사랑하여 선택하신 백성이 죄를 짓자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독한 분노로 타올랐는지 이런 표현에서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자비의 주님은 이번에도 모세의 청을 들으시어 백성을 용서해 주셨다.
- 아프. ‘아프’는 ‘코’를 의미한다. 코는 분노의 자리였기에, ‘아프’만 홀로 쓰일 때도 ‘분노’를 뜻하는 경우가 제법 있다.
퍽 드물게, 코가 아니라 눈이 하라한다(뜨거워진다)고 표현하는 곳도 있다. 라헬은 남편 야곱을 쫓아 온 아버지 라반에게 “아버지의 눈이 하라하지(뜨거워지지) 마십시오”(아버지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창세 31,35)라고 말했다. 왜 코가 아니라 하필 눈이 뜨겁게 되었다고 표현했을까? 아마도 도망친 야곱을 쫓아와 두 눈을 크게 부라리며 화를 내는 라반을 생생하게 묘사한 것은 아닐까 새겨 본다.
군중의 분노에 희생되신 예수
화는 불과 같다. 시작은 작게 점화되지만, 점차 활활 타올라 널리 번진다. 그래서 대중의 분노가 들불처럼 타오르면 걷잡을 수 없고, 때로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는다. 오늘 수난 복음에서 예수님을 죽인 군중은 이런 집단적 분노에 휩싸여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그들이 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 모르고 그런 일을 저질렀다.
* 주원준(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 독일에서 구약학과 고대 근동 언어를 공부한 평신도 신학자다.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주교회의 복음화위원회 위원, 의정부교구 사목평의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7년 4월 9일, 주원준(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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