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감곡성당의 유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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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년재 | 작성일2008-11-19 | 조회수1,305 | 추천수4 | 반대(0) |
감곡성당의 유래를 알아보면
임가밀로신부님께서 사목하시는 곳을 옮기려고 하던 차 산밑에 대궐 같은 집(지금의 매괴고등학교가 있는 자리)이 있는 것을 보셨다.
그 109칸의 대갓집에 누가 살았느냐? 바로 민비의 6촌 오빠였다. 지주 여섯 명이 돈을 모아 지어준 집이었다.
그래서 사제가 할 수 있는 일로 무염시태 기적패를 집 곳곳에 묻어 두고 성모님께 기도하셨다.
그해 10월 12일에 을미사변(민비시해사건)이 일어나서 의병과 일본군이 맞서 싸우면서 민흥식은 서울로 압송되었으며, 남은 식솔들에게 그것을 처분하라고 하였는데
임가밀로신부님께서
1903년에 두 번째 성당을 지금 성당의 절반 크기로 지으셨는데
1920년에 신자 900여명이 곡괭이로 돌을 깨서 이 성당이 들어 갈 터를 만들었다.
'아니, 이왕이면 앞 마당을 크게 만들지!!!'
그러나 곡괭이로 파고 가마니로 흙을 실어 날랐기에 터를 닦는데만도 삼년이 걸렸다.
크기와 모양도 명동성당과 같이 했으나, 그 크기가 줄어든 것은 자재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일본 순사에게 1/3이나 빼앗겼기에 성당의 크기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
1930년에 성당을 짓고 2년 후
임가밀로신부님께서는 1896~1947년까지 이 곳에서 사목을 하다가 돌아가셨다.
임신부님은 백마를 타고 흰수염을 길게 기르셔서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분처럼 보이셨고 그 행차는 임금님행차에 버금 갔다고 한다.
마을의 누군가 포도청에 잡혀 가면 반지의 제왕 같은 분이 와서 뭔가를 보여 주면 포도청장 이하 모두 머리를 조아리고 잡혀갔던 그 사람은 그 자리에서 풀려났으며 신부님은 말에다 풀려난 그 사람을 태우고 유유히 사라졌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것이 무엇이냐? '어패' 라는 것인데 고종황제께서 '이 어패 보기를 짐 보듯 하여라!' 라고 써서 가밀로신부님께 하사하신 것이라고 한다.
임가밀로신부님의 무덤은 산중턱에 있었는데 1981년에 이장해서
그 분께서 돌아가신 지 60년이 되는 내년에 성모순례지로 선포될 것이다.
우리나라에 '남양성모성지' 가 있지만 어떻게 보면 성모성지가 아니다. 치명자라고 묘소가 있는 곳을 아름답게 가꾸어 순례지를 거치지 않고 바로 성모성지라고 선포한 것이다.
여기는 110년동안 성모님의 수많은 역사가 일어난 곳이다.
프랑스신부님과 일본인 사이는 좋지 않았다.
호랑이나 곰이 나타나서 으르렁 대기도 했다.
이 산은 성모님이 지켜 주시는 특별한 산이다.
임가밀로신부님이 돌아가시고 보좌신부님이 주임신부님으로 되셨는데
바람 소리가 '휘~이익~~' 나면서
어느 날 인민군들이 잠을 자고 있는데 "꽝!" 소리가 나서 '국군이 대포를 쏘았나보다!' 하고 놀라서 깨어 보니 입구에 있던 돌로 된 성수대가 저절로 넘어지면서 성당 마루바닥을 깨기도 했다.
그 곳에 총알이 박힌 구멍이 있으며
인민군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버렸다. 총알이 빗발처럼 퍼붓는데도 단 한 방도 성모님께 맞지 않고 모두 피해가며 벽 쪽으로 흩어졌다.
총알은 돌면서 앞으로 나가기에 바깥으로 나갈 때는 큰 구멍을 만들지만 이것을 사람들은 '성모 칠고' 라고도 말한다.
왜 성모님은 부서지지 않으셨을까!!!
그 고통의 흔적을 지금까지 고스란히 간직하신 채~~
화가 난 인민군은 사닥다리를 놓고 올라가서 망치로 내리치려고 했다. 그 순간 성모님의 두 눈에 눈물이 흘러내리며 너무나 빛이 나서~~ 그는 손에 들려 있던 망치를 버리고 혼비백산하여 도망가고 말았다.
그 당시 전쟁터로 잡혀 가려던 동네청년들은 모두 성당 안으로 피신을 했으며
지금 신자들은 1억단 묵주기도 봉헌을 하고 있다.
-다락방 미사 중 신부님의 가르침중에서-
☆성모님상 앞에서 많은 사람에게 치유의 기적이 일어 났으며 액자로 된 판넬사진에서도 치유가 일어납니다.
순례지- 국내의 신자들에게 존경받을 만한 장소 성지- 전세계 신자들에게 존경받을 만한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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