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예수님 이야기13: 세례자 요한의 설교(루카 3,7-1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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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7-05-13 | 조회수7,423 | 추천수0 | |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 루카복음 중심으로] (13) 세례자 요한의 설교 ② (3,7-18) 하느님 심판을 피하는 길… 회개와 자선 실천
- 유다 광야와 정교회의 수도원이다. 이 광야 오른쪽으로 요르단강 하류와 사해가 있다. 가톨릭평화방송여행사 제공.
가) 요한이 요르단강 주변에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자 군중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옵니다. 그러자 요한은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주더냐?”라고 질타하면서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촉구합니다. 여기서 “다가오는 진노”란 하느님의 심판을 뜻합니다. 요한은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며 회개의 시급성을 강조하지요. 또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면서 행실로써 회개의 열매를 맺을 것을 거듭 촉구합니다. 나아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신분이 하느님의 심판을 면할 구실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3,7-9)
요한은 이어 회개의 구체적 방법을 제시합니다. 군중에게는 나누라고 합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이는 못 가진 이들과 나누고 먹을 것을 가진 이들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세리들에게는 정한 것 이상을 요구하지 말라고 합니다. 군인들에게는 봉급으로 만족하라고 합니다.(3,10-14)
이 대목은 좀 더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진 것을 나눠야 하는 사람들, 곧 자선을 베풀어야 하는 사람은 특정 계층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인 ‘군중’입니다. 누구나 자선을 실천해야 합니다.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세리들은 탐욕과 부정직함으로 소문난 이들인 데다가 당시 권력층의 앞잡이 노릇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대표적인 ‘죄인’ 축에 들었습니다. 이런 죄인들도 행실을 바꾸면 다가올 하느님의 진노를 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군인들은 힘으로, 무력으로 백성을 짓눌러 사욕을 채우려는 이들을 나타냅니다. 이 군인들은 유다인들이 아니라 헤로데 안티파스의 용병으로 이방인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무력을 일삼는 이런 이방인들에게도 아브라함의 자녀가 될 길, 구원의 길은 열려 있습니다.
- 요한 세례자가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고 세례를 베풀던 요르단강 베타니아에 만들어 놓은 세례터.
루카는 요한의 이 설교를 통해서 하느님의 심판을 피하는 길, 다시 말해 구원을 얻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음을 말합니다. 앞에서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면서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고 한 것을 다시 한 번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셈입니다. 그러나 전제가 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곧 행실을 고쳐야 합니다. 권력이나 직분을 남용하지 않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 그리고 자선(나눔)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나) 요한의 가르침에 사람들은 그가 혹시 기다리던 메시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지만 요한은 이를 단호히 부인합니다. 자신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또 자기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3,16) 여기서 불은 심판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메시아로 오실 그분은 심판자로 오실 것입니다. 그분은 “손에 키를 들고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워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3,17)이라는 요한의 마지막 말은 이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요한의 말로 미루어볼 때 메시아로 오실 그분,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그분은 심판자로 오실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루카는 요한의 설교를 전하는 기사를 “요한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3,18)는 말로 마무리합니다.
어투로 보면 요한의 선포는 가슴을 찌르는 소리이기는 하지만 기쁜 소식은 아닌 듯합니다. 그런데 루카는 요한이 전하는 이 소식을 “기쁜 소식”이라고 표현합니다. 왜 기쁜 소식일까요?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촉구하는 것은 단지 다가올 심판을 면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미 세상에 와 계신 구원자 주 그리스도(루카 2,11)를 기쁘게 맞이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의 선포는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그 기쁜 소식의 내용 혹은 실체는 그리스도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실 것입니다.
생각해봅시다
‘광야의 외침’ 요한 세례자는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합당한 처방을 내려줍니다. 회개를 위해, 삶을 바꾸기 위해 오늘 나에게는, 우리에게는 어떤 처방이 필요할까요? 우리도 광야의 외침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 외침은 여러 형태로 우리에게 옵니다. 책을 통해서, 대화를 통해서, 성찰을 통해서 때로는 잠깐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나 풍경을 통해서도 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만나고 하는 순간순간이 어쩌면 광야의 외침일 수 있습니다. 그 외침을 놓치지 맙시다.
알아둡시다 - 메시아와 그리스도
“백성들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3,15) 루카복음에서는 ‘메시아’라는 표현이 여기에서 처음 나옵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말 「성경」의 루카복음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그리스말 성경 루카복음에서는 이미 2장 11절에 같은 표현이 나옵니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에 나오는 ‘그리스도(χριστοs)’가 그 단어입니다. 그리스말 성경에서는 같은 ‘그리스도’인데, 우리말 성경에서는 ‘그리스도’(2,11)와 ‘메시아’(3,15)로 구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메시아는 ‘기름부음받은이’를 뜻하는 히브리말 ‘마쉬아’의 아람어식 표기입니다. 이를 그리스말로는 ‘그리스도’라고 하지요. 구약 시대에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왕이나 예언자 혹은 사제를 하느님께서 뽑으신 사람으로 성별(?)할 때에 그 사람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마쉬아(히브리어, 아람어로는 메시아)라고 불렀습니다. 이를 그리스말로 번역하면서 ‘그리스도’라고 표기했지요.
그런데 기원전 6세기에 이스라엘은 이민족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많은 이스라엘인이 유배를 당한 비극을 겪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 신앙을 반성하면서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해방시켜줄 기름부음받은이(메시아)를 보내 주실 것을 기다리는 메시아 대망(待望) 사상으로 발전합니다. 이 메시아 대망이 종말 사상과 합쳐지면서 종교적 신앙 외에 민족의식과 정치적 사상도 결부되기에 이릅니다.
요한 세례자가 활동하던 시기에, 따라서 예수님께서 활동하던 시기에도 이런 메시아 대망 사상이 유다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요한의 활동을 보고 혹시 구약에서 예고된 기름부음받은이(메시아)가 아닌가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당시 유다인들이 생각하던 그런 유형의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계속해서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말 성경에서는 똑같은 ‘기름부음받은이(그리스도)’로 표기돼 있지만, 유다인들이 생각하는 기름부음받은이와 구별하기 위해서 우리말 번역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의미가 담긴 본문에서는 ‘그리스도’로 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5월 14일, 이창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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