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 말씀 단상: 선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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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7-06-21 | 조회수4,277 | 추천수0 | |
[말씀 단상] 선택
“므씨유(monsieur, 아저씨)!” “므씨유!” 조용한 사무실이 한 직원의 다급한 목소리로 가득찼다. 조용히 사무실을 빠져나오려던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므씨유! 잠깐만요, 뭔가 잘못된 것 같아요. 다시 자리에 앉아보세요.”
내가 머뭇거리며 돌아선 그 사무실은 리옹 가톨릭대학교 교학과였다. 장학금 문제로 짬을 내어 들렀는데 뭔가 착오가 있었다며 다시 나를 부르는 그 목소리 “므씨유”, 우리말로 ‘아저씨’, 혹은 ‘누구누구 씨’였다. ‘여긴 가톨릭대학이야, 근데 신부인 나더러 왜 누구누구 씨라고 부르지?’ 속으로 의아해하면서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았고 그 직원은 줄곧 ‘므씨유’로 나를 지칭했다.
“므씨유, 한국은 OECD에 가입돼 있군요. 장학금은 가난한 나라에 지급되기 때문에 OECD에 가입한 나라 학생에겐 줄 수 없어요. 지난 학기엔 실수로 지급이 되었지만 이번부터는 안되겠습니다.”
장학금을 받지 못하게 된 것도 약간 서운하긴 했지만 집에 돌아오는 내내 “므씨유”라는 호칭 때문에 생각이 많았다. 신부를 아저씨라고 불러서 기분이 나쁜 것만이 아니었다. 신부인 나는 어찌 살았기에 세상 사람들이 다 편하게 부르는 ‘아저씨’라는 호칭에 이리 민감한가, 하는 자괴감에 머리가 무거웠다.
예수는 자신의 공생활 시작부터 제자들과 함께했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 6,13) 예수는 불렀고, 뽑았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돌아서서 그에게로 가는 건 쉽지 않다. 마르코 복음의 제자들 역시 재산과 혈연을 내버려둔 채 갓 서른을 넘긴 남정네를 스승으로 믿고 따라나섰다. 얼마간의 재산과 사회적 지위가 제 삶의 전부가 아니라고 강변하면서도, 실은 그 재산과 지위에 목매달듯 사는 게 우리 삶의 민낯이고, 그런 이유로 제자들처럼 예수의 부름에 응답하기는 애당초 불가능에 가까운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제자됨의 자세가 적극적이고 주체적이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목표로 복음서들은 예수를 따르는 데 있어 주저하지 않는 제자들의 모습을 좀 더 강조한 것이라 여길 수 있다. 다만 그 강조는 단순히 버리고 희생하며 극기한 채 예수를 따른다면 후에 천상낙원의 안온함이 보장된다는 논리와는 거리가 있다. ‘선택하다.’라는 그리스말은 ‘엑크레고마이, 곧 ‘~로부터 구별하다.’라는 뜻을 지녔다.
사도행전 13장 17절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느님께서는 우리 조상들을 선택하시고,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살이 할 때에 그들을 큰 백성으로 키워 주셨으며, 권능의 팔로 그들을 거기에서 데리고 나오셨습니다.”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고 불러 세워 가나안 복지로 이끈 것은 그들이 잘 살거나 올바르거나 사랑스러워서가 아니었다. 그들이 이집트에서 신음하고 있었고, 그들이 제 삶의 고유함을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 이름으로, 제 주장으로 살아가려면 얼마간의 자유가 필요했다. 뉘집의 셋방살이는 사람을 눈치보게 만들 수밖에 없고, 셋방에서 제 집을 얻어 나갈 때는 집이 생겼다는 기쁨보다 이젠 마음 편히 살겠구나, 하며 제 자존을 찾아 더 기쁠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희생과 극기, 그리고 포기의 삶을 위해 하느님이, 예수가 백성과 제자들을 선택한 게 아니라 그들이 제 모습으로, 제 고유한 꼴을 갖추고 자유롭게 살게하려고 선택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선택받아 떠난 곳은 광야였고, 거기서 하느님을 향한 신앙을 갈고 닦았다. 순도 100%의 신앙이란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하느님에게 불평을 쏟아냈고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길 바랐다. 배가 고팠기 때문이고 현실이 고통스럽기 때문이었다. 선택받아 나아간 곳, 광야에서 백성들은 순수하지도 올바르지도 정의롭지도 않았다. 예수가 뽑아 세운 제자들 역시 순수하지도 올바르지도 정의롭지도 않았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 열둘을 뽑지 않았느냐? 그러나 너희 가운데 하나는 악마다.”(요한 6,70) 제자들 사이엔 스승을 팔아 넘긴 유다가 있었다. 유다를 대놓고 욕하며 다른 제자들을 숭상하는 것도 얼마간의 낯뜨거움이 있다. 마르코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가 죽어간다고 해도 누가 더 높은지, 누가 영광의 순간에 높은 자리에 오를지 다투어 계산한다. 심지어 베드로는 수난을 겪고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예수를 가로막으며 하느님의 일을 망치려 덤벼든다.(마르 8,23)
예수에게 선택받고 나름의 삶으로 그를 따르고, 따른 만큼 제 인격이 성장하고 보다 훌륭해지리라 여기는 논리는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낸 하느님을, 열두 제자를 뽑아 세운 예수를 거부하는 논리가 아닐까? 예수에게 선택받는 제자됨의 삶은 역설적이게도 노력하지 않으면 되고 훌륭해지려고 덤벼들지 않으면 되고 제 가식의 틀에서 버티는 고생을 포기하면 완성된다. 다른 이와 달리 특별하게 선택받았다는 이른바 ‘엘리트주의’는 예수를 따르는 데 있어 걸림돌이 된다. 베드로 전서 2장 4절에서 5절을 읽어보자.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분은 살아 있는 돌이십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느님께는 선택된 값진 돌이십니다.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이 되십시오.” 예수의 제자로 선택받아 하느님의 집을 짓는 데 필요한 돌이 된다는 건, 예수처럼 버림받는 길을 걸을 때 가능하다. 집을 짓기 위해 쓰일 돌이 제멋대로 굴러다녀선 안된다. 집짓는 이에게 내어 맡겨져야 할 돌이 제가 있겠다는 곳에, 제가 있어야만 된다는 곳에 제멋대로 쳐박혀선 안된다. 그런 돌은 집짓는 이가 정말 내다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선택받는 것은 실은 제 삶의 자리를 멀리서 바라볼 수 있는 여유와 직결된다. 저마다 삶의 지향과 그 지향에 따른 구체적 실천들은 다를 수밖에 없다. 이전투구에 가깝고 약육강식에 가까운 경쟁과 대립은 대개 하나의 삶과 그 삶의 방식에 우리를 천착시킨다. ‘돈이 있어야 행복하게 살 수 있어. 돈 벌어야 돼!’ 라는 논리가 언제부터 이리 광범위하게 우리 삶을 규정했는지 되돌아보면 알 수 있다. 저마다의 구별된 삶이 특정 계급이 누리는 삶의 형식으로 저울질 당하게 된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내가 클 때만 해도 지금과 달랐다. ‘돈이 중요한 게 아니야.’, ‘돈보다 사람이 중요해.’ 라는 우리 어머니들의 정연한 가르침은 우리 삶 곳곳에 살아 꿈틀거렸고 저마다 사람다운 게 뭔지 고민하며 컸었다. 하느님은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셨다.(야고 2,5) 모든 걸 버리고 예수를 따르는 건, 실은 모든 걸 얻는 부유한 삶이라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신앙인이 된다. 돈 없고 기댈 곳이 없다고 돈 있고 기댈 곳 찾는 하이에나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아직 모자라고 부족하다고 제 식으로 찾아 나서고 쫓아다녀서는 예수를 만나지 못한다. 가난함을 유지해야 한다. 누군가 손 내밀 사람을 조용히 기다리는 여유가 필요하다.
“므씨유”라고 듣는데 나는 아직 익숙하지 않다. 더욱이 내가 공부한 성경을 두고 다른 목소리, 다른 비판적 목소리를 듣는 것에는 더더욱 익숙하지 않다. 제 아무리 똑똑한 공부를 했다고 한들, 듣는 귀를 잃어버린 이에게 제자됨은 애당초 가능한 게 아님에도 난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 많고, 그 대부분은 나의 고집과 우쭐거림을 방패로 형성된 것들이다. 선택받고 싶으면 내려놓고 비워내어야 할 것이야 라고 매일, 매순간 되뇌면서도 “므씨유” 한 마디에 부르르 떨기도 한다. 선택받고자 하면서 매번 스스로 선택하는 나는 뭣하나 싶다. 어느 영화에서처럼 ‘뭣이 중헌디~’라고 또 다시 묻는다.
[월간빛, 2017년 6월호,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 담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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