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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물]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사마리아 여인과 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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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7-07-20 조회수15,378 추천수0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사마리아 여인과 생수

 

 

성경에는 우물가에서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 이야기가 있다. 구약 성경에서 잘 알려진 미혼 남녀 이야기의 주인공은 당연히 창세기의 야곱과 탈출기의 모세이다.

 

먼저 장자권 때문에 형을 속이고 도망간 야곱이 하란의 어느 우물가에서 처음 만난 아리따운 라헬에게 입을 맞추며 눈물을 펑펑 흘리던 그 유명한 우물가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출생의 비밀을 안 뒤 이집트인을 죽이고 파라오로부터 도망간 이집트 왕자 모세가 낯선 미디안의 땅에서 사제의 딸 치포라를 만났던 이야기도 있다.

 

두 남자 모두 우물가에서 우연히 만난 양치기 여성들의 고충을 슈퍼맨처럼 해결해 주고, 결국에는 그녀들과 결혼하는 내용이다. 우물가에서 남녀가 만나는 성경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를 보듯 재미있고 흥미롭다.

 

신약 성경의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이야기(요한 4장)는 구약 성경의 우물가 이야기처럼 남녀가 우물가에서 만났다는 것이 유사하다. 하지만 결혼으로 내용을 마무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

 

 

나는 사마리아 여자, 당신은 유다인 남자!

 

제자들이 먹거리를 사러 간 사이 예수님께서는 혼자 우물가에 계셨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만난 때는 정오였다. 원문상으로는 제6시인데, 이는 제6시를 유다 시간으로 계산했기 때문에 여섯 시간을 더하여 정오로 본 것이다.

 

그러나 조석민은 유다 시간을 기준으로 하는 공관 복음과 달리 요한 복음은 로마 시간을 적용하기 때문에 그냥 6시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본문상으로 제자들이 음식을 구하러 갔고 예수님께서 지쳐 계신 것으로 보아 저녁 6시로 본다. 그렇다면 그녀가 온 시간은 정상적인 저녁 시간이라는 것이다( 「요한 복음의 새 관점」 참조).

 

여행과 정오의 햇빛은 목마른 나그네를 더 갈증 나게 하였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처음 보는 여인에게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청하셨다. 그러자 물 대신 즉각 까칠한 대답이 되돌아왔다.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 말 속에 ‘알 만한 사람이 왜 이래요!’라는 신경이 곤두선 느낌이 배어 있다.

 

 

여인의 까칠한 대답엔 역사가 숨어 있다

 

여인의 반응은 같은 유다인이면서 서로를 원수처럼 여기는 그들의 배경을 알면 쉽게 이해된다. 그 여인의 까칠한 대답은 역사적 근거를 두고 있다. 솔로몬 임금이 죽은 뒤 다윗이 이루어 놓은 통일 왕국은 남북 이스라엘로 나뉘었다.

 

그런데 아시리아가 북이스라엘을 침공하여 편입한 뒤 혼합 정책을 시행했는데, 아시리아는 자국민들을 이주시켜 종교, 문화, 혈통이 섞이게 하였다. 그리하여 사마리아인들은 혼혈이 되었다(2열왕 17,24-41 참조).

 

그 뒤 예루살렘 성전에 갈 수 없게 된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짐산에 그들의 성전을 지었고, 사마리아인들과 유다인들의 극적인 대립은 기원전 2세기 무렵 유다 독립 전쟁인 마카베오 혁명 때 사마리아인들이 시리아 왕조에 도움을 줌으로써 악화되었다.

 

집회서는 “나 자신이 혐오하는 민족이 둘 있고 셋째 것은 민족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들은 세이르산에 사는 자들과 필리스티아인들, 그리고 스켐에 거주하는 어리석은 백성들(사마리아인)이다.”라고까지 한다(50,25-26). 유다인과 사마리아인들은 같은 민족이면서도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만날 그때까지도 앙숙처럼 살고 있었다. 사실 안타깝게도 현재까지도 그들은 화해를 이루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한술 더 뜬 나그네의 대답

 

그러니 유다인 남자가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니 기가 막힌다. 어쩌면 그여인은 이 유다인이 자신을 가벼이 보고 한 말로 여겼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한술 더 뜨신다.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라고 말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어이없었을 것이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 여인들이 갓난아기 때부터 생리한다며 부정히 여겨 항아리를 절대 공유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이 만진 두레박으로 물을 얻어 마시겠다니 이 유다인의 의도가 심히 의심스러웠을 것이다.

 

율법을 잘 지키는 유다인들은 여행을 할 때 정결법을 잘 지키려고 두레박을 가지고 다녔다. 그런데 두레박도 없으면서 조상 야곱보다 더 우월한 것처럼 말하는 이 유다인의 콧대를 사마리아 여인은 꺾어 주고 싶은 오기를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물 긷는 도구도 없으면서 이 깊은 우물에서 생수를 주겠다니!

 

 

사람 안에서 솟는 샘이 되는 신비한 물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을 우물의 더 깊은 곳으로 이끄신다. 그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도 않을 뿐 아니라 물 마시는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한다는 것이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7,37)하고 말씀하신다. 은혜롭게도 이 물은 무상이다. 아모스 예언자는 굶주림을 말할 때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8,11)라고 했다.

 

요한은 말씀이 사람이 되셨고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다(요한 1,1-4 참조)고 했다. 참으로 신비롭지 않은가! 예수님께서는 그 생명의 물은 물 마시는 사람 안에서 샘처럼 끊임없이 솟아난다고 알려 주신다. 그러나 삶의 고통 속에 갇혀 있는 그녀는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사마리아 여인의 갈증의 바닥이 드러나다

 

갑자기 목마른 사람의 주체가 바뀌었다. 처음엔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물을 달라고 하셨는데 이젠 그 여인이 까칠하게 ‘신비한 물’을 달라고 요구한다. 일상에서 만나는 까칠한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종종 삶의 상처가 크게 숨어 있다. 상처가 클 때 현실에서 보여 주는 방어기제는 더 강한 경향이 있다.

 

그런데 비꼬듯 물을 달라는 그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남편’을 데려오라고 하셨다. 순간 여인은 시간이 멈추고 모든 것이 천천히 움직이는 것 같았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녀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셨기 때문이다. 그녀의 방어적인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요한 4,17).

 

한순간에 그녀의 삶이 얼마나 메마른지 드러났다. 다섯 번째 남자를 거쳤고 여섯 번째 남자와 사는 여자, 그것이 그녀의 현실이었다. 브라운 신부는 유다의 법으로는 몇 번 결혼하건 상관이 없지만 랍비들은 세 번 이상 결혼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본다( 「앵커 바이블」). 그러니 이 여인이 겪었을 아픔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신 분

 

사마리아 여인의 대답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비난하시거나 무시하시지도 않고 오히려 사실을 말했다고 인정해 주셨다. 이 유다인은 지금까지 만난 남자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아마도 자신을 거의 창녀 정도로 무시하며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수용해 주시는 그분의 태도에 순간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서 뭔가가 강하게 움직였다. 삶의 가뭄으로 바닥이 쩍쩍 갈라져 있던 그녀의 마음에 마침내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잠언 13장 14절은 “현인의 가르침은 생명의 샘이라 죽음의 올가미에서 벗어나게 한다.”고 했다. 좌절하며 무기력하게 살아왔던 그녀 안에서 자신을 살리는 물이 솟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시군요!”

 

 

여인의 신학적 질문, 예수님의 심오한 대답

 

사마리아 여인은 삶의 고통 속에서 살았지만 하느님 안에서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녀의 심오한 신학적 질문이 이를 증명해 준다. 사람은 마음속에 있는 것을 말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비로소 그녀가 예배에 관해 진지하게 질문한다. 어쩌면 고통의 삶의 언저리에서 그녀는 예배 공동체에서 환영받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북이스라엘의 예로보암 임금은 백성들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예배하러 갔다가 남유다로 돌아갈까 봐 두려워 예루살렘 성전 대신 베텔에서 예배하게 하고 그 뒤에 그리짐산에 성전을 가지게 된 그 당시의 상태를 두고 물어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예배의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새로운 진리를 알려 주신다. 그리고 메시아가 오시면 모든 것을 알게 되리라는 희망을 전면으로 드러낸 그녀에게 직접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요한 4,26)라고 신원을 밝히셨다.

 

 

상처받은 치유자의 선교

 

그녀 안에서 콸콸 샘솟는 생수는 그녀를 사람들에게 뛰어가게 했다. 그녀는 항아리도 두고 뛰었다. 마르 에프렘 성인은 “그대는 항아리를 두고 그대의 사색을 채워 그대의 백성을 마시게 하였네.”라고 사마리아 여인을 칭송했다( 「낙원의 찬가」).

 

더는 아무것도 부끄럽지 않았다.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그녀는 헨리 나웬의 말처럼 이제 ‘상처받은 치유자’가 되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녀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받아들였다.

 

누구든지 고통의 시간 속에 있을 때 삶의 깊은 의미에 대한 영혼의 갈증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뜻하지 않는 시간에 우리를 찾아오시고 갈증을 해소해 주신다. 바로 그런 은총의 시간이 우리에게 삶 자체로 선교하도록 이끌어 주는 생수의 체험이다.

 

* 허귀희 클라라 -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전교수녀회 수녀. 예수회 영성 센터에서 ‘성경과 영성’을 가르치며, 성경의 학문적이고 영성적 의미를 통합하고자 연구하고 있다. 미국 엘름스대학교에서 종교학과 신학을 전공하고, 가톨릭대학교에서 성서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7년 7월호, 허귀희 클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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