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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예수님 이야기25: 종을 고치시고 외아들을 살리시다(루카 7,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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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7-08-05 조회수4,323 추천수0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 루카복음 중심으로] (25) 종을 고치시고 외아들을 살리시다(루카 7,1-17)


인간의 간절함에 응답하신 예수님

 

 

- 갈릴래아 나자렛의 추락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이즈르엘평야. 왼쪽 사발을 엎어놓은 듯한 산은 타보르 산이고, 오른쪽 산 아래 동네가 예수님께서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리신 나인이다.

 

 

루카는 평지 설교에 이어 예수님께서 보이신 두 기적 이야기를 전합니다. 하나는 카파르나움에서 백인대장의 병든 종을 고치신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나인이라는 동네에서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리신 이야기입니다. 이 두 이야기를 차례로 살펴봅니다.

 

 

백인대장의 종을 고치시다(7,1-10)

 

무대는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한 카파르나움입니다. 예수님의 활동 중심지여서 이곳에 가면 ‘예수님의 고을’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 북단에 있는 카파르나움은 어항이기도 했지만, 북으로는 시리아의 다마스쿠스, 남으로는 예루살렘에, 그리고 서쪽으로는 지중해 연안으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세관도 있었고, 로마 군대도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평지 설교를 마치고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셨을 때였습니다. 로마 군대의 백인대장이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노예의 병을 고쳐 달라고 유다인 원로들을 통해 예수님께 청을 넣습니다. 로마 군대의 백인대장이라면 오늘날 군대로 치자면 중대장쯤 되는 위관급 장교일 것입니다. 그는 유다인이 아닌 이방인이었습니다. 유다인과 이방인, 그것도 유다인 원로들과 로마 군대 장교, 뭔가 어울리지 않은 조합 같습니다. 

 

유다인 원로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들이 마지못해서 백인대장의 청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백인대장을 위한 마음에서 간청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간곡히 청하였다. ‘그는 선생님께서 이 일을 해 주실 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회당도 지어 주었습니다.’”(7,4-5)

 

원로들의 이 간청에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집으로 향하십니다. 그런데 도중에 백인대장이 또 전갈을 보냅니다. 이번에는 친구들을 통해서였습니다. 요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치 않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주십시오’였습니다. 백인대장은 자신에게도 부하와 노예가 있어 하라고 명령만 내리면 그들이 그대로 따라 한다는 이야기를 덧붙입니다.(7,6-8) 백인대장의 이 말에는 예수님께 대한 지극한 경외심과 함께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굳은 신뢰심 그리고 백인대장의 겸손함과 간절함이 그대로 묻어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고는 따르던 군중을 돌아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스라엘에서는 이런 믿음을 본 적이 없다.”(7,90) 여기서 이스라엘은 유다인들을 가리킵니다.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유다인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믿음을 이방인이자 이교도인 백인대장에게서 보셨다는 것입니다. 

 

백인대장의 믿음은 바로 보답을 받습니다. “심부름 왔던 이들이 집에 돌아가 보니 노예는 이미 건강한 몸이 되어 있었다.”(7,10)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시다(7,11-17)

 

이 사건의 무대는 나인입니다. 나인은 나자렛에서 남쪽으로 20㎞ 정도 떨어진 곳으로, 갈릴래아 지방의 거의 끝자락에 있는 고을입니다. 나인에서 산을 낀 남쪽에는 수넴이라는 고을이 있는데, 구약에서 엘리사 예언자가 한 여인의 외아들을 살린 곳입니다.(2열왕 4,8-37 참조) 

 

예수님께서 나인 고을의 성문 가까이에 가셨을 때 사람들이 죽은 이의 관을 메고 나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과부의 외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을의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습니다.(7,11-12) 아들을 묻으러 가는 길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울지 마라” 하고 위로하신 후 관을 세우십니다. 그러고는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하고 말씀하시자 죽은 아들이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십니다.(7,13-15)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고 루카는 전합니다.(7,16-17)

 

이 두 이야기를 종합해서 살펴보면 공통되는 특징과 구별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공통되는 특징은 예수님의 신적 권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 한 마디로 백인대장의 병든 노예를 낫게 해주셨을 뿐 아니라 죽은 외아들을 살리셨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은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주셨다’ 하며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뚜렷이 대비되는 특징도 있습니다. 백인대장의 노예를 살리신 이야기에서는 백인대장의 깊은 믿음과 겸손, 간절함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백인대장을 동정하여 예수님께 청을 드린 유다인 원로들과 친구들도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이야기에서는 과부나 고을 주민들, 예수님의 제자나 따르던 군중 등 어느 누구도 외아들을 살리시는 예수님의 기적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측은지심이 외아들을 살리는 기적의 동기가 됩니다. 

 

말씀 한 마디로 병자를 낫게 하고 죽은 이를 살리는 예수님의 기적은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역사, 하느님의 놀라운 일입니다. 두 이야기는 하느님의 일이 언제 이루어지는지를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하나는 인간의 간절함이 있을 때입니다. 그러나 간절함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굳은 믿음에 찬 신뢰와 겸손함이 동반된 간절함이어야 하늘을 울릴 수 있습니다. 백인대장의 종을 고치신 이야기가 이를 말해 줍니다. 

 

다른 하나는 주님의 측은지심입니다. 측은지심은 자비의 다른 표현입니다. 하느님은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기적은 인간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느님 자비가 드러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7,16)는 사람들의 찬양은 하느님의 자비가 사람들 사이에서 드러났다는 찬양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 백인대장이 친구들을 통해 예수님께 고백한 내용을 전례에 맞게 고친 것이 미사 때 영성체 직전에 신자들이 바치는 기도입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우리는 성체를 받아 모시기에 앞서 이 기도를 얼마나 간절하게 겸손한 마음으로 믿음을 가지고 바치고 있는지요?

 

- 병이 든 노예를 살리고자 하는 백인대장의 노력에 유다인 원로들과 친구들까지 한마음으로 동참합니다. 어려움에 처해 주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는 이웃이 우리에게 기도와 도움을 청할 때 우리는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지요?

 

-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심으로써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고 가르치십니다. 우리는 이웃에게 어떻게 자비로운 사람이 되고 그럼으로써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낼 수 있을까요?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8월 6일,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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