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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물] 성경의 세계: 아합과 이제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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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7-08-06 조회수5,461 추천수0

[성경의 세계] 아합과 이제벨 (1)

 

 

구약성경에서 북이스라엘은 남쪽 유다에 비해 허술한 모습이 많다. 반란도 잦고 왕들의 이미지도 매우 안 좋다. 우상숭배도 심했고 유배도 먼저 갔다. 아시리아 침공으로 남쪽보다 136년 앞서 멸망한 것이다. 성경에서 보면 북쪽은 남쪽보다 허약한 공동체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은 다르다. 북쪽은 10지파 연합체였기에 남쪽보다 인구도 많았고 영토도 넓었다. 경제 군사적으로도 훨씬 강했다. 한때는 남쪽 유다를 혼인으로 끌어들여 우위에 서기도 했다. 북쪽 임금 아합은 자신의 딸 아탈야(Athaliah)를 남쪽 임금 여호람과 혼인시켜 패권을 장악했던 것이다(2열왕 8,18).

 

구약성경 기록은 바빌론 유배 때 시작된다. 나라가 망하고 이민족 문화에 눌리자 역사적 자료에 눈 돌린 것이다. 신명기계 역사가들이다. 이들의 작품이 여호수아기, 판관기, 사무엘 상하권, 열왕기 상하권이다. 남쪽 출신이기에 다윗 왕가와 예루살렘을 기록 중심에 뒀다. 열왕기에서 남쪽 유다가 북이스라엘보다 우세하게 등장하는 이유다. 열왕기는 글자 그대로 왕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역사적 기록이 목적은 아니다. 집필자 관점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것이다. 민족의 멸망원인을 신앙 안에서 찾는 작업이었다. 하느님께 대한 불순종이 이유였다고 열왕기는 결론 내린다.

 

북이스라엘 전성기를 시작한 왕은 오므리와 그의 아들 아합이다. 두 임금은 34년간 재위하면서 제도정비와 주변 국가복속을 성공한다. 하지만 열왕기에서는 사악하고 어리석은 왕들로 묘사되어 있다. 아합의 왕비 이제벨은 악의 축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녀는 페니키아 항구도시 시돈의 왕이었던 엣바알(Ethbaal)의 딸이다(1열왕 16,31). 아합의 아버지 오므리는 외부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정략혼을 성사시켰던 것이다. 이제벨의 등장으로 사마리아와 다른 도시에 페니키아의 영향이 커진 것은 사실이다.

 

고고학 조사결과 북쪽이 누린 경제적 번영의 발판은 둘이었다. 올리브유와 포도주 사업 그리고 구리광산이었다. 아합이 나봇의 포도밭을 탐낸 것은 상징성 있는 이야기다. 구리는 솔로몬 때부터 주 수입원이었다. 이 무렵 아합 왕조는 유다 왕국에게는 어른이었고 주변국에게는 맹주의 위치였다. 두 번에 걸친 다마스쿠스 벤 하닷과의 전쟁이 증명한다(1열왕 20장). 당시 북 왕조는 열왕기가 전하는 단편적 정보를 넘어 훨씬 강력하고 부유한 국가였던 것이다. [2017년 8월 6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의령본당 주임)]

 

 

[성경의 세계] 아합과 이제벨 (2)

 

 

이스라엘로 시집온 이제벨은 왕궁에 바알 신상을 세우고 제사를 바친다. 자신의 종교를 신봉하겠다는 선언이었다. 하지만 예언자들 눈에는 우상숭배였다. 강력히 항의하자 왕비의 권력으로 눌렀다. 항의가 거세지자 옥에 가두고 핍박했다. 이제벨은 시돈의 공주였다가(1열왕 16,31) 아합의 정실이 된 여인이다. 당시 시돈은 도시국가로 이스라엘보다 군사 경제적으로 앞섰다. 그런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기에 이제벨은 꿀리지 않았던 것이다.

시돈(Sidon)은 지중해 연안 도시로 현재는 레바논에 속한다. 예부터 비옥한 땅이었고 페니키아라 불린 곳이다. 시돈에서 남쪽 40km 지점에 티로(Tyre)가 있다. 두 도시는 예수님 시대에도 이방인 도시로 유명했다(마태 11,21). 이스라엘은 가나안 지역 대부분을 정복했지만 티로와 시돈은 끝내 점령 못했다. 그만큼 강했다. 남북으로 갈라지자 상황은 더 나빠졌다. 페니키아 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아합은 시돈 공주와 정략혼을 맺은 것이다. 이후 이스라엘은 북쪽 방비에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히브리인과 페니키아인은 가까운 관계였다. 문자도 같고 언어도 통했다. 페니키아 문자와 고대 히브리 문자는 동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알은 그런 페니키아의 수호신이었다.

왕과 왕비가 바알숭배에 기울자 엘리야는 메시지를 전한다. 당분간 이스라엘 땅에 비가 오지 않으리라는 예언이었다. 3년 6개월간 독한 가뭄이 들었다. 보속이었다. 이렇게 해서 엘리야 예언자는 바알 사제들과 붙는다. 유명한 카르멜 산 대결이다(1열왕 18,20-40). 바알 사제 850명과 엘리야 한 사람이 맞붙은 것이다. 물론 과장된 숫자다. 그만큼 많은 예언자가 나섰지만 참 예언자 한 사람을 이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엘리야는 민중에게 외친다. 언제까지 양다리 걸칠 겁니까?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을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1열왕 18,21). 카르멜 산 대결의 핵심이 담긴 외침이었다.

제단 번제물에 바알은 불을 붙이지 못했다. 바알 사제들이 애절하게 청했지만 소용없었다. 엘리야 차례가 되자 즉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모든 걸 태웠다. 기적이었다. 놀란 군중을 충동질하자 바알 사제들은 무참히 살해되었다. 사건을 보고받은 이제벨은 엘리야 제거를 맹세한다. 이렇게 해서 잠적하지만 예후를 새 임금으로 택하라는 계시를 받는다(1열왕 19,16). 엘리야는 엘리사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사라진다. 임무가 끝난 것이다. [2017년 8월 13일 연중 제19주일 ·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 · 8월 20일 연중 제20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의령본당 주임)]

 

 

[성경의 세계] 아합과 이제벨 (3)

 

 

아합은 아람족과의 전투에서 화살에 맞아 전사한다(1열왕 22,35).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이제벨의 반응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맏아들 아하즈야가 8번째 임금이 되었다. 하지만 2년 만에 옥상에서 떨어져 후유증으로 죽는다. 동생 요람이 왕위를 이었다. 이제벨은 임금의 어머니로 모든 상황에 관여했다. 그러면서 더욱 막강해진 힘으로 이스라엘을 20년 가까이 휘저었다. 남쪽 왕국에는 자신의 딸과 혼인한 여호람이 왕으로 있었다. 그가 죽고 외손자 아하즈야가 임금이 되는 것도 보았다. 하지만 예후의 반란으로 1년 만에 죽는 것도 보게 된다. 이제벨 역시 쿠데타 세력에 살해된다.

아합은 아람족과 세 번째 전투에서 죽었다. 아람은 지금의 시리아다. 다마스쿠스 인근에 살던 민족으로 당시 왕은 벤 하닷(Ben-Hadad) 2세였다. 첫 전투에서 아합은 승리한다. 두 번째 전투에서는 벤 하닷을 사로잡지만 살려준다(1열왕 20,34). 동쪽에서 세력이 커지고 있던 아시리아 견제를 위해서는 아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방패 역할로 판단한 것이다. 이후 이스라엘과 아람은 3년간 전쟁이 없었다(1열왕 22,1).

아합이 전사한 세 번째 전투에는 남쪽 임금 여호사팟도 동참했다. 둘 사이는 좋았다. 아합의 딸 아탈야와 여호사팟 아들 여호람은 부부였다. 두 임금은 사돈 간이었던 것이다. 화합 무드는 아합의 죽음으로 시들해진다. 주변국과 힘의 균형도 서서히 바뀐다. 북쪽 지배를 받던 모압은 독립을 시도했다. 남북 연합군이 응징했지만 제압에는 실패한다(2열왕 3,27). 남쪽에 조공을 바치던 에돔 역시 반기를 들었다(2열왕 8,20). 아시리아를 견제하던 동맹체제는 무너진 것이다. 아합은 지극히 현실적인 왕이었다. 바알 숭배 역시 현실주의 결과였을 뿐이다. 하지만 신정국가에서는 용납될 수 없었다. 예언자들의 비난을 사고 사악한 왕으로 기록된 이유다.

마침내 엘리사는 예후 장군을 사주해 반란을 일으키게 한다. 예언자 그룹과 군부가 합세한 쿠데타였다. 북쪽 임금 요람과 남쪽 임금 아하지야는 살해된다. 요람은 아합의 아들이었고 아하지야는 외손자였다. 남쪽으로 시집 간 아합의 딸 아탈야의 아들이 아하지야였던 것이다. 예후의 칼날은 이제벨을 향한다. 악의 축이었던 여인이다. 죽음에 직면한 그녀의 모습을 열왕기는 이렇게 전한다. 눈 화장을 하고 머리를 꾸민 다음 창문으로 예후가 오는 걸 보고 있었다(2열왕 9,30). 당당하게 마지막을 맞겠다는 모습이었다. [2017년 8월 21일 연중 제21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의령본당 주임)]

 

 

[성경의 세계] 아합과 이제벨 (4)

 

 

역사에서 아합은 유능한 왕이었다. 이스라엘에 안정을 가져다준 인물로 보고 있다. 지중해 최강자 페니키아를 혼인으로 끌어들였고 남쪽 유다와 우호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남북이 처음으로 화해하고 군사동맹을 이룬 것이다. 이후 북쪽은 모압을 장악했고(2열왕 3,4) 남쪽은 에돔을 속주로 만들었다(1열왕 22,47). 동쪽의 아람족도 2차례 전쟁으로 기를 꺾었다. 두 번째 전투에선 왕을 사로잡지만 풀어주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막강한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이후 아합은 사마리아에 바알 신전을 세우고 도시를 국제화한다. 사악한 왕으로 기록된 결정적 이유다. 왜 그랬을까? 이스라엘은 페니키아 수교로 번영을 누렸다. 상업적 부(富)가 흘러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거주와 더 많은 왕래를 위해 바알 신전을 허락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예루살렘이 갖는 특별한 위치를 사마리아에도 심으려 했다.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걸 막기 위한 조치였다. 반발이 심했다. 예언자 그룹과 제관 계급은 조직적으로 저항했다. 왕비 이제벨이 강력히 대응하자 저항세력은 지하로 잠입했다(1열왕 18,4).

아합시대 종교의 또 다른 구심점은 분명 이제벨이었다. 그녀 뒤엔 돈을 쥔 페니키아 상인들이 있었다. 그들이 사마리아에 바알 신전을 짓도록 압력을 가한 것이다. 예언자와 제관 계급에겐 충격이었다. 이스라엘 존폐가 걸린 문제였기 때문이다. 당시 상징적 저항인물은 엘리아였다. 그를 중심으로 정통신앙 수호자들이 모였다. 이들이 세력을 넓히면서 접촉한 인물이 예후다. 국경에서 전차부대를 이끌던 사령관이었다. 군의 실세를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게 한 것이다. 그를 택해 왕으로 선언한 이는 엘리야 제자 엘리사였다(2열왕 9,1-4). 실행에 옮긴 이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젊은 예언자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예후는 군대를 이끌고 왕을 살해하러 간다. 쿠데타였다. 아합의 아들 요람 왕은 아람족과 싸우다 부상당해 이즈르엘에 있었다. 유다 임금 아하즈야는 병문안 와 있었다. 두 사람은 국경을 지키는 예후가 반란을 일으킬 줄 전혀 예측 못 했다. 무방비 상태에서 두 임금은 살해된다. 반란군은 이제벨과 아합 가문에 속한 이들도 모두 죽였다. 대학살이었다. 당연히 바알신전도 파괴되었다. 이스라엘 10번째 임금 예후는 이렇게 등장했다. 하지만 페니키아 동맹은 깨진다. 남쪽 임금 아하즈야를 죽였기에 남북동맹도 끝이 났다. 아람족이 침입하자 힘을 쓰지 못했다(2열왕 10,33). 아시리아가 공물을 요구하자 순순히 응해야 했다. 영국 박물관에 소장된 검은 오벨리스크엔 아시리아 왕에게 납작 엎드려 절하는 예후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2017년 9월 3일 연중 제22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의령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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