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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물]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마리아 막달레나의 충실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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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7-08-18 조회수6,038 추천수0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마리아 막달레나의 ‘충실한 사랑’

 

 

회개한 창녀, 사실인가

 

마리아 막달레나는 신약 성경의 여러 여인 가운데 예수님의 어머니 나자렛 마리아 다음으로 주목받은 사람일 것이다. 전통적으로 전직이 창녀였던 그녀는 예수님을 만나 극적으로 인생 역전을 이루었고, 예수님 부활의 첫 증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 강론이나 예술 분야 등에서 인기가 많다. 그 이유는 회개한 죄인의 표본이기 때문이다. 많은 성화에서 그녀는 자주 가슴을 드러낸 반라의 매혹적이고 관능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 주위에 늘 향유나 해골이 함께 그려져 있는데 그녀가 회개한 창녀임을 상징한다.

 

현대에도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가 세간의 주목을 받음으로써 그녀는 그리스도교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었다. ‘다빈치 코드’ 속 그녀는 창녀에서 예수님의 연인이 된다. 이는 아마도 현대 학계에서 연구되고 있는, 1945년 이집트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된 영지주의 문헌 중 마리아 막달레나에 관한 내용에서 영감을 얻은 것일 수 있다.

 

전직이 창녀가 되었든 또는 ‘다빈치 코드’ 속 연인의 이미지든 모두 그녀를 왜곡시키고 있다. 그 이유는 성경 속 어디에도 그녀가 창녀였다는 것도, 예수님과 연인 관계였다는 그 어떤 구절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진실과 오해의 역사 속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참 억울했겠지만, 그녀를 창녀나 죄인, 간음한 여자로 오해하기 시작한 것은 그레고리오 1세 교황의 강론(591년)에서 기인한다고 전해진다. 그는 강론에서 마리아 막달레나를 루카 복음 7장의 죄 많은 여인과 요한 복음 11장의 베타니아의 마리아와 동일 인물로 보았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신 일곱 마귀는 그녀가 창녀로서 저지른 성적인 죄악이라며 회개한 죄인임을 강조했다.

 

루카 복음 8장 2절과 마르코 복음 16장 9절에서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여자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복음서가 말하는 ‘일곱 마귀’는 무엇인가? 루카 복음 11장 24-26절의 예수님의 비유를 보면 ‘악한 영 일곱’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러한 구절을 통해 유추해 보면 마리아 막달레나의 일곱 마귀는 성적인 죄악이라기보다 오히려 그녀가 악한 영에 사로잡혀 비참한 상태로 살았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긴 오해의 시간이 지났지만, 다행스럽게도 1969년 교회는 그레고리오 1세 교황의 해석을 재고하여 마리아 막달레나가 창녀였다는 오해를 철회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한 ‘사도들에게 보내진 사도’(Apostola Apostolorum)로 인정했다. 그럼에도 긴 오해 역사의 결과인지 모르겠지만, 마리아 막달레나가 창녀였다는 것에 대한 오해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삶의 멍에를 풀어 주신 분

 

신약 성경에 등장하는 마리아가 여럿 있지만, 마리아 막달레나는 출신 지방을 붙여 불리고 있다. ‘막달레나’(magdalene)는 그녀의 성이 아니라 ‘막달라’(magdala) 지방 출신이라는 뜻이다. 막달라는 ‘망대’라는 의미를 지녔고, 예수님 당시에는 부유한 어촌 마을 가운데 하나였다.

 

복음서는 그녀가 언제 어떻게 예수님께 치유를 받았는지는 전혀 알려 주지 않는다. 젊은 여자에게 일곱 마귀가 들렸다는 것은 그녀의 삶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아마 그 시절의 그녀는 남들이 하는 일상적인 일이나 장밋빛 같은 아름다운 미래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그녀에게는 생의 전환점이었다.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를 따라다닌 여인

 

예수님께 치유를 받은 마리아 막달레나는 일생 그분을 섬기기로 했다. 루카 복음을 보면 이미 여러 여성이 자신들의 재산을 바쳐 예수님과 그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고 한다(8,3 참조). 여기서 여성들에게 사용된 ‘시중을 들다’(디에코논)는 용어는 ‘섬김’과 ‘봉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사용하는 같은 단어이다.

 

예수님 시대는 여성이 많은 억압과 차별을 당하던 시대였고, 당시 율법 학자들은 여성을 제자로 삼지도 않았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 일행의 든든한 후원자들이기도 했던 여성들의 역할이 컸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예수님의 수난과 임종을 지켜본 사람

 

네 복음서는 예수님의 수난의 시간에 도망간 열두 제자들, 특히 베드로의 배반까지 전혀 봐주지 않고 기록했다.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동산에서 체포당하실 때 제자들이 도망간 것과 십자가의 길에서 만난 벌거벗은 채 도망간 이름 없는 남성의 이야기까지 적나라하게 보도한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수난과 임종을 지켜보았다(마르 15,40.47; 마태 27,56; 루카 23,49; 요한 19,25 참조). 복음서는 그녀와 함께 예수님의 수난과 임종을 지켜본 여성들을 말할 때 ‘갈릴래아에 서부터 예수를 섬기며 따르던 여성들’이라고 강조한다. 그중 마리아 막달레나는 거의 매번 처음 거명된다는 점에서 그녀의 존재에 대한 중요성이 드러난다.

 

 

사랑과 용기로 선 십자가의 언덕

 

예수님의 죽음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엄청난 상실을 주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시체를 끌어안고 통곡하는 그녀의 모습을 그린 중세의 여러 성화에서 예수님을 잃은 막달레나의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The Lamentation over the Dead Christ).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의 마지막 고통의 시간까지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승에 대한 그녀의 진실한 사랑의 충실성과 용기일 것이다. 공생활 당시 사람에게 보여 준 스승의 깊은 연민, 그들을 고통에서 해방해 주는 치유, 진리의 가르침 등은 그녀의 마음속에서 언제나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십자가 아래 서 있는 그녀에게 그분과 함께한 공생활의 여정은 스승의 죽음을 바라봐야만 하는 그 고통의 시간을 수용하고 극복할 힘이 되었다. 두려워 도망간 남성 제자들과는 달리 십자가 아래의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최후의 순간까지 얼마나 충실하게 따랐는지 대조적으로 보여 준다.

 

 

눈물이 앞을 가린 그 이른 새벽

 

존경하는 스승의 죽음이 가져온 비탄의 순간에도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시신을 어디다 묻었는지를 눈여겨보았다. 왜냐하면 할 일이 하나 더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곧, 시신에 향유를 바르는 일이다.

 

‘이른 새벽’이라는 표현을 통해 스승을 잃은 그녀의 슬픔의 강도가 느껴진다. 향료를 바르려고 여명의 순간을 기다려 무덤에 갔지만 정작 예수님의 시신은 사라졌던 것이다(마르 16,1-8; 마태 28,1-8; 루카 24,1-12; 요한 20,1-2 참조). 하지만 무덤은 비어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안엔 천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녀에겐 무덤이 비어 있었다, 그분이 계시지 않았기에. 예수님의 시신을 도둑맞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눈물이 쏟아져 천사의 발현도 제대로 알아채지 못한다.

 

 

마리아야! 그 한마디

 

새벽 무덤가에서 울고 있던 그녀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신다. 애타던 심정과 달리 흐르는 눈물에 가려 첫눈에 알아보지 못한다. 더욱이 눈물에 가려진 것은 마리아의 눈만이 아니라 그분의 부재에 집중한 그녀의 생각도 예수님을 정원지기로 착각하게 만든다.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신 예수님의 목소리에 그녀의 슬픔은 끝이 난다(요한 20,16). “마리아야!” 하고 불렀을 때 “라뿌니!”(스승님!)라고 대답한 것은 무의식적인 반응이다. 곧, 평소에 부르던 호칭으로 대답한 것이다. 그렇기에 두 사람이 사제지간임을 알 수 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새벽 무덤가에서 기쁨에 찬 그녀에게 예수님께서는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 20,17)하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그녀에게 새로운 관계로 사명을 주신다.

 

형제들에게 “가서 전하여라.” 하신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본 마리아의 한마디,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라는 말은 강한 충격을 가진다. 진실이며 사실이기 때문이다. 1세기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증언은 남성의 증언보다 무게가 없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그녀를 열두 제자들에게 부활의 증언자로 보내신 것은 가히 혁명적이다. 복음서에 나와 있듯이 토마를 비롯해 제자들이 마리아 막달레나가 전하는 예수님의 부활을 그렇게 쉽게 믿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보고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그녀는 제자직의 모범이 되었다.

 

 

충실한 사랑과 고귀함

 

마리아 막달레나는 자신을 고통에서 구해 주신 예수님에 대한 감사를 평생을 통해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의 공생활의 시간뿐만 아니라 수난의 시간에도 그분께 충실했고, 돌아가신 뒤에도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충실한 사랑’은 고귀함을 낳는다.

 

인생에 도전과 고통이 오면 사람들은 자주 제자들처럼 두려워 도망가고, 고통에 맞서 진리를 지켜 내지 못한다. 그러나 진리를 아는 사람은 진리의 길을 따라간다.

 

우리도 위대한 신앙의 여성인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세상의 어려움 가운데서도 예수님에 대한 충실한 사랑으로 자신의 고귀함을 지켜 나갔으면 좋겠다.

 

* 허귀희 클라라 -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전교수녀회 수녀. 예수회 영성 센터에서 ‘성경과 영성’을 가르치며, 성경의 학문적이고 영성적 의미를 통합하고자 연구하고 있다. 미국 엘름스대학교에서 종교학과 신학을 전공하고, 가톨릭대학교에서 성서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7년 8월호, 허귀희 클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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