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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히브리어 산책: 라옐라, 욤(밤, 낮 또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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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7-09-19 조회수5,962 추천수0

[주원준의 히브리어 산책] 라옐라, 욤


유혹의 어둠 떨치고 빛으로 교회 이끌다

 

 

한국교회의 초기 순교자들은 세계사에서 독특하신 분들이다. 수백 년 전 동아시아를 지배했던 쇄국정책을 뚫고, 먼 나라의 신앙을 받아들이고 목숨까지 바쳤다. 캄캄한 밤을 스스로 걷어내고 이 땅에 빛을 들여오신 분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오늘은 밤(라옐라)과 낮(욤)을 알아보기로 하자.

 

라옐라. 밤을 의미한다. 윗첨자 e(검은색)는 거의 발음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말로 음역하기가 까다롭다. ‘라옐라’ 또는 ‘라윌라’처럼 들린다.

 

 

캄캄한 밤

 

라옐라는 컴컴한 밤인데 해뜨기 전까지를 라옐라라고 했다. 잠언에 보면 훌륭한 아내는 ‘아직 어두울 때(라옐라) 일어나 식구들에게 음식을 만들어 준다’(잠언 31,15)는 구절이 있다. 새벽에 일어나 식구를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으시던 우리네 어머님들이 생각난다.

 

밤은 범죄의 시간이다. 솔로몬의 명판결을 보면, 자기 아이라고 다투는 두 여인이 나온다. 소송을 건 여인은 상대편 여인이 “그 라옐라(밤중)에 일어나”(1열왕 3,20) 죽은 아기와 산 아기를 바꿨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한밤에 은밀하게 일어난 범죄를 밝혀 달라고 청원했던 것이다. 컴컴한 밤은 유혹의 시간이기도 하다. 시편에는 “라옐라(밤)에도 제 양심이 저를 일깨웁니다”(시편 16,7)며 밤을 지키는 노래가 있다.

 

라옐라(밤)는 하느님이 일하시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집트 탈출의 결정적 사건은 라옐라에 일어났다. 파라오가 거듭하여 주님의 말을 듣지 않자, 하느님께서는 “내가 라옐라의 가운데에(한밤중에) 이집트 가운데로 나아가겠다”(탈출 11,4)고 말씀하시고, 한밤중에 이집트의 모든 맏배들을 치셨다.(탈출 12,29) 그리고 그 라옐라(밤)에 백성들은 “머뭇거릴 수가 없어서”(탈출 12,39) 빵의 반죽이 부풀기 전에 나왔어야만 했다. 그래서 그날은 누룩 없는 빵을 먹는 규정이 생겼다.(탈출 13,7)

 

야곱은 한밤의 꿈으로 하느님과 소통하였다. 일찍이 그는 베텔에서 꿈을 꾸었다.(창세 28,10-22) 하느님은 그 후에도 그에게 꿈에서 말씀하셨고(창세 31,11), 심지어 장인 라반의 꿈에도 나타나셔서 야곱을 지켜주셨다.(창세 31,24.29) 그리고 아들 요셉을 찾아 이집트로 떠나기 직전에도 하느님은 “라옐라(밤)의 환시 중에”(창세 46,2) 나타나셔서 길을 알려 주셨다. 야곱은 밤에도 일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담뿍 받은 사람이다.

 

- 라얀. 본래 ‘밤 새 두다’는 의미인데, 셈어 외의 언어로 번역하기 까다롭다. 문맥에 따라 ‘밤을 새다’, ‘밤을 보내다’, ‘한밤을 머무르다’ 등으로 옮긴다. 동사어근은 이렇게 대문자로 옮긴다.

 

 

밤 새 두다

 

히브리어에는 우리말에 없는 독특한 말이 있는데, 이런 말들을 옮기려면 조금 까다롭다. ‘라얀’이라는 동사도 여기에 속한다. 라얀의 본래 뜻은 ‘밤 새 (놓아)두다’이다. 율법에 ‘고기를 아침까지 남겨두지 마라’(탈출 23,18; 신명 16,4)는 규정이 있는데, 직역하면 ‘고기를 라얀 하지 말라’는 말이다. 생고기는 쉽게 부패하기 때문에 이런 규정이 생겼을 것이다. 라얀은 문맥에 따라 의역할 수밖에 없는데, 때로 ‘밤을 지샌다’로 옮긴다.

 

이스라엘에는 사람을 나무나 말뚝에 매달아 죽이는 형벌이 있었다.(창세 40,19; 여호 8,29; 10,26; 에스 2,23; 애가 5,12) 예수님도 이 형벌로 돌아가셨다. 율법에 따르면 이렇게 처형된 자의 주검을 라얀해서는 안 된다.(신명 21,23) 죽은 자를 밤새 나무에 놓아두면 들짐승이 시신을 훼손하기 때문이다.(창세 40,19)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아리마태아의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내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할 근거가 바로 이 규정이었다.(마태 27,57-58) 우리나라에서도 사람의 신체를 높이 매다는 형벌이 있었는데, 순교자들도 그리스도처럼 그런 형벌을 받으셨다.(군문효수) 목숨을 내놓은 순교자들의 고통도 컸지만, 그 시신을 수습하고 뒷감당을 맡은 동료 신자들의 노력과 고통도 그에 못지않았을 것이다.

 

욤. ‘낮’ 또는 ‘날’을 의미한다. 무척 쓰임새가 폭넓은 말로, 이따금 ‘인생’, ‘년(年)’, ‘(통치)기간’, ‘특정한 날’ 등을 의미한다.

 

 

낮이나 밤이나

 

라옐라의 반대말인 욤은 ‘낮’ 또는 ‘날’로 옮긴다. 욤은 구세사의 처음과 끝을 수놓은 말이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처음 만드신 것이 빛이요, 하느님을 그 빛을 욤(낮)이라 부르셨다.(창세 1,3-5) 이사야 예언자 등은 하느님께서 심판하실 마지막 날을 ‘주님의 욤(날)’(이사 2,12)으로 불렀다.

 

성경에는 욤(낮)이든 라옐라(밤)든 모두 하느님께 속한 것이라는 가르침이 빼곡하다. 홍수가 그치고 하느님은 노아에게 욤과 라옐라가 그치지 않을 것을 약속하셨다.(창세 8,22) 광야에서도 하느님은 욤에는 구름기둥, 라옐라에는 불기둥으로 백성을 인도하셨다.(탈출 13,22; 느헤 9,19) 낮이든 밤이든 하느님께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이다.(오늘 2독서) 돌아가신 순교자들의 마음이나 살아서 교회를 이끄신 동료 신자들의 마음이나 하나일 것이다.

 

* 주원준(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 독일에서 구약학과 고대 근동 언어를 공부한 평신도 신학자다.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주교회의 복음화위원회 위원, 의정부교구 사목평의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7년 9월 17일, 주원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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