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 히브리어 산책: 마임(물) | |||
---|---|---|---|---|
이전글 | [신약] 신약 여행67: 그대는 그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종 이상으로...(필레 16) | |||
다음글 | [구약] 똑똑 성경: 신명기 | |||
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7-09-25 | 조회수5,706 | 추천수0 | |
[주원준의 히브리어 산책] 마임 천지 창조 순간, 물은 생명을 품에 안았네
히브리어의 13번째 글자는 멤이다. 이 글자는 자유롭게 흐르는 물에서 유래했다. 물을 뜻하는 히브리어 마임은 고대의 세계관을 잘 드러내는 말이다.
- 고대 이집트어 무.물결 또는 파도를 형상화한 고대 이집트어의 글자다. 세 개를 겹쳐 쓰면 ‘무’(mou)라고 읽는다(붉은색). 고대 페니키아어에서는 세로 형태도 보인다(파란색).
물결 또는 파도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 가운데 지그재그로 그은 1획의 글자가 있다. ‘m’의 음가를 지닌 이 글자는 강이나 호수의 물결 또는 바다의 파도를 형상화한 것이다. 이집트 상형문자는 똑같은 글자를 겹쳐서 새로운 뜻을 만들기도 한다. 이 글자를 세 개 겹쳐 쓰면 ‘무’(mou)라고 읽는데, ‘물’ 또는 ‘액체’를 의미한다. ‘무’는 고대 페니키아어 등으로 수용되었다. 마치 들과 계곡을 굽이굽이 흘러 바다로 가는 물의 자유로운 모습처럼, 가로나 세로로 자유롭게 썼다.
고대 이집트어의 ‘무’는 우리말의 ‘물’과 뜻과 소리가 무척 비슷하다. 그런데 이런 단편적 유사성만으로 어떤 역사적 기원을 단정 지으면 안 된다. 가장 오래된 문명에 속하는 고대 이집트의 몇몇 단어가 우리말과 비슷하다는 느낌만으로, 우리 민족의 기원을 단정할 수 있을까? 그런 일은 독서와 성찰의 협소함을 드러낼 뿐이다. 오히려 이런 유사성은 인간 존재의 보편성과 관련하여 새겨야 할 것이다. 물은 생명의 필수 조건이다. ‘물’이나 ‘무’나 마치 ‘엄마’ 같은 순음(입술소리)의 단순하고 가장 기초적인 1음절의 말이다. ‘물’은 엄마 같은 존재다.
- 아람어 발전. 이 글자는 지그재그를 두세 번 쓰고 길게 내리는 형태로 발전했는데(하늘색) 우가릿어 쐐기문자도 이 형태를 따랐다(파란색). 그런데 점차 아람어 문자에서 파도치는 모습이 강조된 듯 발전하다가(붉은색) 히브리어 문자로 수용된다(초록색). 맨 오른쪽은 단어가 끝날 때만 사용하는 형태다(미형).
두 방향의 발전
기원전 10세기경에 세로 형태는 사라지고, 가로 형태로 고정된다. 이윽고 지그재그로 두세 번 그은 다음 오른쪽을 길게 내린 모습으로 정형화되었다. 이 형태에서 다양한 변형이 나온다. 고대 아람어와 페르시아의 제국아람어에서는 굽이치는 물결이 강조된 듯하다. 이 형태는 히브리어의 ‘멤’으로 발전했다.
- 그리스어 발전.그리스어는 우선 길게 긋고 지그재그를 쓰는 형태로 발전했는데(초록색) 여기서 그리스어 문자 ‘뮤’가 나왔고, 라틴어 알파벳으로 계승되었다. 대문자(자주색)보다는 소문자(파란색, 붉은색)에서 고대의 형태나 물결을 연상하기가 쉽다.
한편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번에도 글자의 모양을 뒤집었다. 길게 내린 선이 왼쪽에 오고, 지그재그가 오른쪽에 붙었다. 이 형태에서 그리스어 알파벳 ‘뮤’가 나왔는데, 고대 이집트어의 ‘무’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단순한 단음절의 입술소리는 그대로 보존했다. 뮤의 대문자보다는 소문자에서 고대의 모습을 연상하기 쉽다. 이를 따른 라틴어 알파벳도, 역시 소문자에서 잔잔한 물결의 형태를 더 연상할 수 있다.
삼중우주론의 ‘물들’
히브리어로 물은 마임이다. 그런데 마임은 단수형으로는 전혀 쓰지 않고 오직 복수형으로만 쓰는 말이다.(plurale tantum) 그러므로 마임을 글자 그대로 직역하면 ‘물들’이다. 왜 ‘물’을 ‘물들’이라고 불렀을까? 그 배경에는 고대근동의 삼중 우주관이 있다.
- 마임. 물을 의미한다. 쌍수형이라고 오해하기 쉬운 형태지만, 사실은 복수형이다. 마임은 멤의 본디 뜻과도 가깝고, 멤의 기본형(자주색)과 미형(붉은색)을 모두 볼 수 있는 낱말이기도 하다.
고대근동 사람들은 우리 눈에 보이는 그대로 이 세상을 소박하게 이해했다. 신명기를 보면, 하느님이 십계명을 주시기 전에 “땅 위에 있는” 짐승도, “하늘을 날아다니는” 짐승도,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짐승의 모습으로도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다.(신명 4,17-18) 이렇게 세 영역의 짐승을 거론한 것은 이 세상이 ‘하늘 - 땅위(궁창) - 지하’의 삼중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이렇게 만드셨다고 믿었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느님은 “마임(물) 한가운데에 궁창이 생겨, 마임(물)과 마임(물) 사이를 갈라놓아라”(창세 1,6)고 명령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세상은 거대한 ‘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저 하늘이 푸른 이유는 바다처럼 물이 가득 찼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성경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만 믿어서, 마치 성경을 빅뱅이나 진화론 등 현대학문을 폄하하는 도구로 추락시키는 경우를 본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른바 창조과학의 신봉자들은 저 하늘이 푸른 액체로 가득 찬 것이라는 고대 우주관도 신봉하는가. 무릇 성경의 가르침이란 한 글자씩 깊이 새겨 내 마음과 실천의 기준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 주원준(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 독일에서 구약학과 고대 근동 언어를 공부한 평신도 신학자다.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주교회의 복음화위원회 위원, 의정부교구 사목평의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7년 9월 24일, 주원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