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인물] 구약인물과 함께하는 치유여정: 발락과 발라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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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7-10-08 | 조회수6,197 | 추천수1 | |
[구약인물과 함께하는 치유여정] 발락과 발라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을 지배하려드는 이들의 눈에 비친 세상과 세상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여기는 이들의 눈에 비친 세상은 사뭇 다를 것입니다. 세상과 나와의 객관적인 거리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사람만이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계명을 어긴 아담에게 나타나 질문하셨습니다.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 이 질문은 하느님을 포함한 온 세상과 나와의 거리, 세상 안에서 내가 서 있는 자리의 좌표가 무엇인지 묻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 있습니까? 이번 달에는 민수기에 등장하는 두 인물, 발락과 발라암을 초대하여 그들은 세상 속에서 어떤 좌표를 선택하였는지, 그리고 그 선택은 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발락과 발라암 이야기는 민수기 22-24장에 나오는데, 기원이 다른 여러 이야기들이 한데 결합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바꾸려는 인간들의 시도가 담긴 이 이야기 안에는 희극적인 요소들도 많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이야기를 재미있게 전개하려는 목적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변경시키려는 인간의 의도 자체가 얼마나 희극적인가 보여주기 위해 도입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시간과 장소는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영도로 가나안 동편에 이르러 아모리 임금과 바산 임금의 땅을 공략한 후, 모압 평원에 진을 치고 있던 때였습니다. 아모리 임금의 땅이 이스라엘의 손에 넘어갔다는 소식에 놀라고, 이스라엘인들의 수에 겁을 먹은 모압 임금 발락은 이스라엘과 맞서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는 흑마술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을 몰락시키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발락은 당시에 가장 영험하다고 알려진 마술사 발라암을 불러오기 위해 신하들을 아람으로 보냅니다.
민수기 22장 6절에 의하면 발라암이 축복하면 축복이 내리고, 그가 저주하면 저주가 내릴 만큼 발라암은 뛰어난 마술사였습니다. 발라암의 유명세는 성경뿐만 아니라 기원전 8세기에 새겨진 비문을 통해서도 증명이 됩니다. 현재 요르단의 ‘텔 데이르 알라’라는 곳에서 벽에 잉크로 쓴 비문이 1967년에 발견되었는데, 이 비문에 “브오르의 아들 발라암”의 이름이 언급되고, 또 그가 본 환시의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발라암에게는 모압의 원로들뿐만 아니라 미디안의 원로들도 파견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모압과 미디안이 동맹을 맺고 이스라엘을 공격하려 했음을 시사합니다. 만약 이들이 성공한다면 모압 땅을 지나 약속의 땅에 들어가려 했던 이스라엘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곧 이스라엘을 위한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과연 발락은 하느님의 구원의지를 막을 수 있을까요? 그가 가진 부와 권세가 하느님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이 이야기 전체는 인간이 지닌 그 어떤 능력도 하느님을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많은 복채를 들고 온 발락의 대신들을 맞이한 발라암은 주님의 뜻을 묻기 위하여 하룻밤의 시간을 청합니다. 그날 밤, 발라암은 이스라엘 백성은 이미 복을 받은 백성이니 저주해서는 안 되며 그들과 함께 가지 말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들과 동행하지 않습니다. 이에 발락은 더 높은 대신들을 보내어 복채는 요구하는 대로 주겠노라고 약속합니다. 발라암은 그날 밤 다시 주님의 뜻을 여쭈어봅니다. 하느님은 발라암에게 그들과 함께 떠나라는 허락을 주시며, 당신이 보여주시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말하지 말라는 단서를 붙이셨습니다. 그리하여 발라암은 아침 일찍 나귀를 타고 발락의 신하들과 함께 길을 떠납니다. 여기에 소개되는 발라암은 주님의 뜻을 선택과 식별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있는 사람으로 드러납니다. 비록 그가 하룻밤이라는 시간을 지체하기는 하였어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그 의지는 확고해보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발라암은 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민수기 22장 22-35절은 발라암이 길을 떠나게 된 경위를 설명하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발라암은 하느님의 뜻을 여쭙지도 않고 발락이 보낸 사람들을 따라 길을 떠났나봅니다. 그가 나귀를 타고 하인 둘과 함께 모압을 향해 가고 있는데, 이에 분노하신 하느님께서 주님의 천사를 시켜 그를 가로막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칼을 들고 길을 막고 서자 나귀는 이를 알아보고 밭으로 들어섭니다. 우둔한 짐승으로 알려진 당나귀는 천사를 알아보는데, 뛰어난 점술사로 알려진 발라암은 천사를 보지 못합니다. 발라암은 나귀를 때려 길로 들어서게 하였지만 이번에는 좁은 길목을 지키고 선 천사 때문에 나귀는 벽쪽으로 바짝 붙어섰고, 그 때문에 발라암의 몸도 벽쪽으로 기울어지자 그는 나귀를 또 때립니다. 천사가 도저히 비켜날 수 없는 곳에서 다시 막아서자 나귀는 아예 주저앉아버립니다. 그러자 발라암은 또 나귀를 때립니다. 마침내 나귀는 입을 열어 왜 자신을 때리는지 항의하며,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의 놀라움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발라암을 오히려 질책합니다. 나귀는 자신이 언제나 주인에게 충실한 존재였는데, 왜 지금 이렇게 평소답지 않은 행동을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느냐고 묻습니다. 칼을 든 천사가 자신의 모습을 발라암에게 드러내자 그는 비로소 사태를 이해합니다. 천사는 그가 나쁜 길을 가고 있기에 막아섰으며, 나귀가 비켜나지 않았으면 발라암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제야 발라암은 주님의 뜻을 묻습니다. 천사는 그에게 가던 길을 계속 가라고 하지만, 자신에게 들은 말만 해야 한다는 단서를 붙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의 뜻을 무시하거나 존중하지 않는 행위는 나귀보다 어리석은 이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하는 동시에, 발락이 크게 기대를 걸고 있는 발라암이 사실은 나귀보다 못한 존재일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발락의 기대가 얼마나 부질없는지 미리 알려줍니다.
발라암이 도착한 다음날 아침 발락은 발라암을 데리고 이스라엘의 진영이 보이는 바못 바알로 올라갑니다. 발라암은 그곳에 일곱 제단을 쌓게 하고 각각의 제단에 소 한 마리와 숫양 한 마리를 번제로 바친 후 주님의 신탁을 청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발라암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대신 그들의 수가 먼지처럼 많아질 것이며, 이스라엘의 운명이 자신의 운명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발락은 화를 내며, 발라암을 이스라엘 진영의 다른 쪽이 내려다보이는 피스카산 꼭대기로 데려갑니다. 거기에서 희생제사를 바친 후 발라암은 주님의 신탁을 청합니다. 발라암은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시는 하느님의 의지가 변경 불가능한 것임을 알아차리고 이스라엘을 축복합니다. 그러자 발락은 다시 발라암을 프오르산 꼭대기로 데려갑니다. 이번에도 발라암이 이스라엘을 축복하자 발락은 화를 내며, 발라암에게 약속했던 복채도 주지 않고 그를 쫓아냅니다. 발라암은 떠나가면서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을 축복합니다. 언젠가 이스라엘이 모압 위에 승리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모든 원수들이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이야기는 발라암이 제 고향으로 돌아가고 발락도 제 길을 갔다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로만 보면 발라암은 주님의 뜻을 충실히 따른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의 방향이 근본적으로 주님을 향한 것은 아니었나봅니다. 하느님의 힘이 발라암의 모든 능력을 지배했던 것이지 발라암이 훌륭하여 자발적으로 하느님의 힘을 드러낸 것은 아니었음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민수기 31장 16절에 의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프오르에서 우상숭배에 빠지게 된 것은 발라암의 권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발락과 헤어진 후 아람 땅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미디안족과 함께 머물면서 이스라엘을 이기기 위한 방안으로 그들을 우상숭배로 이끄는 정책을 제안하였고, 그 결과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민수 25장 참조). 이 때문에 주님께서는 미디안과의 전쟁을 명하셨고, 이 전쟁에서 발라암은 죽임을 당합니다(민수 31,8 참조). 신약성경에서 발라암이 돈 때문에 이스라엘을 위험에 빠트린 부정적인 인물로 소개되는 것은 바로 이런 까닭입니다(2베드 2,15; 유다 11; 묵시 2,14).
발락과 발라암의 이야기는 인간의 계획과 하느님 계획의 상관관계를 생각해보게 합니다. 하느님의 존재를 무시하는 이들에게는 인간의 뜻과 계획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믿는 이들에게 삶의 좌표 한 축은 언제나 하느님의 뜻과 계획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의 뜻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강제가 아니라 더 큰 선과 행복을 가져오는 계획입니다. 누구도 이 뜻과 계획을 변경시킬 수 없습니다. 악의 편에 선 인간의 힘이 강해 보일지라도 하느님의 선을 이기지는 못합니다. 인간이 막아서면 당나귀가 말을 하고, 돌멩이가 외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나의 뜻과 계획은 하느님의 뜻과 계획 위에 서 있는지, 혹은 그것을 거스르는 것인지.
하느님을 막아서는 우를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김영선 -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소속 수도자로, 현재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생활성서 2017년 8월호, 김영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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