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엘리야의 후계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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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7-10-08 | 조회수4,793 | 추천수0 |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엘리야의 후계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실 때, 그분을 위한 자리조차 없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미 모든 자리가 꽉 들어차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의 삶을 계획해 놓고 있습니다. 자신만의 생각들과 자신만의 소망과 갈망들, 자신만의 꿈들로 가득합니다. 가능한 모든 수단과 대책들을 미리 세워 두고 있지요.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니 거기 하느님을 위한 자리는 없습니다. 사실 그분이 우리의 개인적인 삶에 끼어들 권리조차 있기나 한 것일까요? 어떤 이는 말합니다. “나는 우리 부모에게 온통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돼!” 또 다른 이는 말합니다. “드디어 내가 가정을 이루게 되었어!” 또는 이렇게 말하는 이도 있지요. “나는 업무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어!” 또 “나는 집을 짓고 있는 중이야!”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다들 말합니다.
“시간이 없어!” ‘혼인 잔치’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에서, 초대받은 이들이 말합니다(루카 14,18-20 참조). “내가 밭을 샀는데 나가서 그것을 보아야 하오.”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보려고 가는 길이오.” “나는 방금 장가를 들었소.” 시간이 없다고, 다들 하나같이 양해를 구합니다. 태만에서 나온 핑계들이 전혀 아니지요. 말 그대로 충분한 근거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늘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생각에, 하느님은 늘 너무 늦게 오십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것은 이 세상에서 이미 끝장난 것처럼 보입니다. 이처럼 ‘나’라는 집이 이미 다 들어차 있기 때문에, 하느님을 위한 자리는 더 이상 없습니다. 그분이 오시어 문을 두드릴 때, 우리는 모두 무언가에 정신없이 열중하고 있지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또 전혀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정말로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그런 기적들 때문에 교회는 살고, 세상도 삽니다.
겉옷을 벗어 걸쳐주다
이스라엘 북왕조 시대에 엘리야라는 예언자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계속 참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가 주위의 훨씬 더 편하고 안락한 신들에게 정신이 팔려 있던 시절이었지요. 이때 엘리야가 거의 혈혈단신으로 하느님의 것을 대변합니다. 그는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에 탄식합니다. 한없지친 나머지 죽기를 간청합니다(1열왕 19,4-5 참조). 그러자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에게는 이미 후계자가 있다. 나는 너의 일을 이어받을 사람을 이미 보아두었다.”(1열왕 19,16 참조) 뒤이어 곧바로 엘리야는 엘리사를 만나게 됩니다(1열왕 19,19-21 참조). 엘리사는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고 있던 참이었지요.
엘리사는, 대개 이런 종류의 부르심이 늘 그렇듯이,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예언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농사꾼이었고, 부농의 아들이었습니다. 그 부모의 농토는 척박한 산기슭이 아니라 비옥한 평지였습니다. 한꺼번에 여러 쌍의 겨릿소를 부려야 밭을 갈 수 있었지요. 엘리사는 마침 여러 명의 일꾼들과 여러 쌍의 소들을 감독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을 앞세우고 엘리사 자신이 마지막 ‘열두 번째’ 겨릿소를 부리고 있었으니까요. 맨 뒤에서 그 자신도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길을 지나다가, 밭을 갈고 있던 엘리사에게 자신의 예언자 겉옷을 걸쳐줍니다. 이는 예언자적 표징 행동이지요. 곧 하느님께서 너를 부르신다는 뜻을 나타냅니다. 바로 이런 뜻이지요. 너는 그를 도와야 한다. 세상에 구원을 가져다주시려는 하느님의 원대한 계획에 너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그 일을 위해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신다. 바로 너를 필요로 하신다. 그분이 너에게 당신의 영을 주신다. 너를 덮는 외투처럼 당신의 영으로 너를 감싸신다. 와서 도와라!
엘리사는 내면 깊숙이에서 흔들립니다. 이 일이 하느님의 것과 관련됨을 깨닫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것보다 중요하며, 열두 겨릿소와 부모의 경작지보다도 더 중요함을 알아차립니다. 엘리사의 마음이 불타오릅니다. 그는 엘리야를 따르기로 작정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막상 그리 단순하지 않은 여러 이유들이 그에게 떠오릅니다. 먼저 부모에게 가서 작별 인사를 고해야 합니다. 본문의 글자 뜻대로 하면, 그는 마지막으로 부모에게 입맞춤을 해야 합니다(1열왕 19,20 참조). 어쨌든 그는 전반적으로 부모와 상의해야 합니다. 정리해야 할 일들도 아주 많고, 여전히 심사숙고해야 할 사항들도 넘쳐납니다. 모든 것을 그대로 두고 떠난다? 말처럼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엘리사의 마음속 움직임을 엘리야는 이해합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였다고 그러느냐?”(1열왕 19,20)라고 엘리야는 말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말하자면 이런 뜻입니다. “다녀오너라. 너는 전적으로 자유롭다. 사명을 맡기실 때, 하느님께서는 그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으신다.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우리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될 것이다. 선택은 너의 자유다.”
밭 한가운데서
부농의 아들 엘리사에게 허용된 이 온전한 자유의 순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텍스트의 이야기는 전해주지 않습니다. 다만 엘리사가 취한 행동에 대해 전합니다. 곧 그는 집으로 가지 않습니다. 일꾼들에게 마련해줄 작별의 식사를 위해 장작과 고기를 구해 올 별도의 시간조차도 따로 내지 않습니다. 한시도 흘려버릴 수 없을 만큼, 엘리사가 하느님의 것에 사로잡힌 것이지요. 그는 쟁기를 잘게 부수게 하고, 불을 지피고 자신의 두 겨릿소를 잡게 합니다. 그러고는 자신의 일꾼들과 함께 밭 한가운데서 작별의 식사를 나눕니다. 그런 다음 엘리야를 따라나서지요.
하느님께서는 어쨌거나 세상에서 자리를 찾으십니다. 늘 다시, 당신 것을 위해 자신의 삶을 전환하는 이들을 찾아내십니다. 성경은 그러한 이야기들로 가득합니다. 어부였던 베드로와 안드레아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을 때, 예수님은 그들을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마르 1,17)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십니다. 그러자 그는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연로하신 제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그 전에는 좀 곤란합니다.”(루카 9,59 참조)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루카 9,60) 예수님께 깊은 감명을 받은 또 다른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찾아옵니다. 하지만 그전에 먼저 그는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십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모두 우리 시대의 시민사회적인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들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그러한 상식과 이해가 정말로 대단한 것일까요? 그것이 이 세상의 문제를 하나라도 제대로 해결해준 적이 있을까요? 가난한 이들은 여전히 굶주립니다. 세상은 난민들로 넘쳐납니다. 전쟁과 전쟁의 위협들은 끊이지 않습니다. 세상을 위한 희망은 오직, 당신께서 몸소 마련하실 구원을 위해 헌신하는 이들을 하느님께서 늘 또다시 찾아내시는 것, 바로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부르심에 마음이 흔들리고, 하느님께 공간을 내어드리는 이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다음에요!” “내년에요!” “제가 이것 이것을 다 끝낸 다음에요!”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찾아내십니다. 보통 우리 인간이 자신만의 집을 이미 다 채워 놓고 있는데도 그렇게 하십니다. 그러니 세상에 그보다 더 큰 기적이 있을까요. 이런 점에서 우리가 처음에 거부 반응을 보이는것도 썩 나쁘지는 않습니다. “말도 안 됩니다. 왜 하필 전가요?” 이런 말도 온전히 정상적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그러하니까요. 중요한 것은 오로지, 우리 자신을 닫아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을 열어 두고, 자신에게서 기적이 일어나도록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부르심의 다양한 모습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는 이야기는 많은 점에서 엘리사의 소명 이야기와 닮았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이는, 자신이 지목되었다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차립니다. 온전히 개인적으로 그 자신이 부르심을 받은 것이지요. 그리고 이 부르심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과 관련됩니다. 이 부르심 앞에서 대답을 뒤로 미룰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나중에!” “이런저런 조건이 맞는다면!”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은 그 즉시 다만 “예.”라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엘리사가 그렇게 했지요. 베드로와 안드레아가 그렇게 했고, 사도들이 모두 그렇게 했습니다. 물론 다른 태도도 존재합니다. 부르심을 비껴가는 방법이지요. 바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한 부르심이라고요? 그것은 사제나 주교들에게 해당되는 일 아닌가요? 또는 수도회에 입회하려는 이들에게나 해당되겠지요. 서약을 하고, 자신의 온 삶을 하느님께 바치려는 이들에게나 해당될 것입니다.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지요. 저는 ‘보통의’ 그리스도인입니다. 저는 그런 부르심을 받은 적이 없어요. 엘리사 이야기나 사도들이 부르심을 받은 이야기는 저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는 핵심을 벗어납니다. 도피에 지나지 않지요. 하느님을 피하려는 시도입니다. 세례를 받은 이, 견진을 받은 이는 누구나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는 부르심의 다양한 모습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면 가난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하지만 부유함의 부르심도 있습니다. 곧 자신의 부를 하느님의 것을 위해 봉사하는 데 사용하라는 부르심이지요. 하늘 나라를 위해 독신의 삶을 사는 부르심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늘 나라를 위해 혼인의 삶을 사는 부르심도 있습니다. 이는 자신의 혼인과 가정을 하느님의 것을 위해 열어 놓는 것을 의미하겠지요. 교회 안의 수많은 부부가 이미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아퀼라와 프리스킬라의 예를 들고 싶습니다(사도 18,1-4 참조). 그들은 바오로를 자기 집에 맞아들이고, 바오로에게 생계에 필요한 일거리도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바오로의 선교 여행을 지원했지요. 그들이 없었다면, 바오로가 이룬 많은 일들이 아예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부르심이 존재합니다. 세례 받은 이는 누구나 자신의 소명을 갖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것에 봉사할 자신만의 가능성을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지요. 각자에게 필요한 것은 다만,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정확하게 감지해내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자신의 온 실존을 다해 주저함 없이 하느님께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엘리사처럼!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 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그리스도론을 가르치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저명한 성서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나아가 한국의 신앙인들에게 보내는 연재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6년 6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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