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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자캐오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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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7-10-08 조회수4,116 추천수0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자캐오의 기쁨

 

 

난생처음 이스라엘에 방문했던 날들을 저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복음서들을 통해 이미 알고 있던 장소들을 드디어 처음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저를 한껏 사로잡았지요.

 

한번은 제가 속한 소규모 여행 단체가 예리코에 도착했습니다. 당연히 우리 모두는 자캐오 이야기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지요. 그의 키가 작아서 군중에 가려 예수님을 볼 수 없는 까닭에, 그가 예수님을 보려고 돌무화과나무에 기어 올라간 장면(루카 19,3-4 참조)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스라엘인 안내자에게 돌무화과나무를 보여 달라고 청했습니다. “돌무화과나무라는 게 도대체 어떻게 생겼나요?” “오늘날에도 그 나무들이 이 지역에서 여전히 자라고 있나요?” “그 나무에 올라갈 수는 있나요?” 이런저런 질문들로 우리는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든 것이 그저 알고자 하는 욕구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진지하게 말해, 우리는 자캐오 이야기가 어쨌든 역사적으로 믿을 만한 사실인지 조금이라도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드디어 한 그루 울창한 돌무화과나무 아래 당도하자, 우리는 모두 눈을 들어 위를 바라보았습니다. 예리코에 훌륭히 뿌리내린 그 나무야말로 오르기에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이미 밑동에서부터 단단한 곁가지들이 거의 수평으로 뻗어나 있었고, 그 위로 기어오르기란 별 어려움이 없어 보였지요. 심지어 그 위를 뛰어다닐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저는 좀 부끄러웠습니다. 자주 그렇듯이, 복음서의 이야기가 매우 정확하고 사실적임을 확인한 때문이었지요.

 

 

나무 위에 오른 키 작은 사람

 

물론 우리는 그다음에, 울창한 돌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복음서의 자캐오 이야기를 봉독했습니다. 언뜻 보기에, 세관장 자캐오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는 그다지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맛좋은 점심식사와 같았지요. 기분 좋고 편안한 이야기였다고나 할까요.

 

든든한 나뭇가지에 올라간 키 작은 사람과 그 아래 지나가는 군중 가운데 서 계신 예수님!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저녁식사에 초대하게 하시고 기꺼이 하룻밤 묵어가기를 원하십니다. 세관장 자캐오는 곧바로 응답하고요. 그야말로 종교적인 해피 엔드(happy end), 유치원에서 아이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게다가 이 이야기는 우리의 종교적 시대정신에도 딱 들어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달콤한 음료와도 같이 부드럽고 온화한 그리스도교라는 이상에 아주 잘 부합하지요. 누구의 마음도 아프게 하지 않는 선에서 알맞게 복음을 재단하는 그러한 시대정신을 다음 세 문장으로 요약해볼 수 있겠습니다.

 

첫째, “아무도 배척하지 마라. 누구나 같은 부류에 속한다.” 둘째, “나도 괜찮고, 너도 괜찮고! 하느님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사랑하신다.” 셋째, “누구나 아무 두려움 없이 서로를 사랑으로 대한다면, 세상의 모든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제가 여기서 이 세 가지 진술이 모두 틀렸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진리는 그러한 시대적 조류의 구호 속에서도 그 틈 사이로 언제나 제 빛을 드러낼 만큼 강합니다. 물론 우리는 아무도 배척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도 사실이지요. 사랑이, 정확히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열쇠임도 틀림없습니다.

 

문제는 다만, 이 사랑이 어떻게 세상 안에 들어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러한 사랑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러한 사랑이 실제로 세상 안에 들어온다면,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우리는 자캐오 이야기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길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리코에서 수도 예루살렘까지는 그리 먼 길이 아니지요.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하느님의 사랑을 사시던 바로 그 방식 때문에 처형을 당하십니다. 자캐오 이야기는 보기보다 그리 편안한 이야기가 전혀 아닙니다. 예수님과 자캐오 사이에 일어난 일은 아이들에게 들려줄 이야깃거리와는 한참 먼, 그야말로 삶과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증오의 대상이 된 사람

 

게다가 우리는 자캐오의 삶을 미화할 아무런 권리가 없습니다. 당시 세리와 세금 차용인들은 로마 식민 지배 권력의 손에서 놀아나는 도구였습니다. 한 해 초에 일정한 양의 돈을 먼저 식민 지배자들에게 상납하고, 그런 다음 그만한 돈을 회수해야만 했습니다. 물론 거기에 당연히 높은 이익을 덧붙였지요. 그들은 말하자면 착취자들이었습니다. 그들 때문에 백성 가운데 수많은 이들이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들의 그러한 삶을 미화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당시 세리들이 사회적으로 고립된 삶을 살았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방인들과 끊임없이 교류해야 하기에 그들은 부정하게 여겨졌고, 아무도 그들과 엮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도둑이나 강도와 같은 부류로 취급받았지요. 그런 사람에게 예수님이 말을 건네시고,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회적 규범들을 깨뜨리는 일이지요. 뒷말이 무성할 사건입니다.

 

물론 이는 사회적 규범을 건드리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회질서, 하느님 백성의 삶에 관계된 일이지요. 시편은,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시편 1,1)이라고 하지 않던가요?

 

이러한 경고와 함께 시편 제1편은 바로 시편 전체의 분위기를 지배하는 말을 합니다. 이어지는 모든 것을 위한 지침과도 같지요. 곧 하느님 백성 안에는 토라, 곧 하느님의 법을 지키고 오롯이 그에 따라 사는 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모르는 악인들을 멀리한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그들이야말로 심판에서 살아남을 것이며, 그들의 삶은 성공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반면 하느님을 모르는 악인들의 삶은 성공하지 못하며, 그들은 바람에 흩어지는 겨와 같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멸망의 길에서 사라지고 마는 흔적과 같다고요. 그러니 그들과는 상종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캐오는 하느님의 법에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느님 백성 안에서 사회 정의를 짓밟고 사는 죄인이요 악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초대하도록 하시다니요? 이스라엘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과 한 식탁에 앉다니, 대체 있을 수 있는 일인가요?

예리코에서 예수님 주위에 떼 지어 몰려든 사람들에게 그것은 있을 수 없는 부도덕한 사건이었습니다. 참을 수 없는 일이었지요. 경건한 신심의 측면에서도 그렇고, 신앙의 관점에서도 그러했습니다. 죄인들을 대하는 예수님의 행동이 결국은 그분을 죽음으로 몰아갔지요. 예루살렘 최고 법정에서 그분은 백성을 그릇된 길로 이끄는 자라는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정말로 여기에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걸린 것이지요.

 

 

자신의 삶을 바꾼 사람

 

자캐오의 반응 역시 순진무구한 행동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사회적으로 고립된 채 증오와 기피의 대상이 된 자신의 집에서 예수님이 하룻밤 묵어가기를 바라신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선뜻 이해가 안 되었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그가 잃어버린 품위를 되찾아주십니다. 그의 집에서 묵으시고, 그를 포함한 그의 가족과 빵을 나누심으로써 그렇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행동이 자캐오를 압도합니다. 그에게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힘을 줍니다. 주변의 그 모든 비난과 무시가 줄 수 없었던 것, 그것을 예수님의 애정이 가져다줍니다. 자캐오가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다스림을 만난 것입니다. 하느님의 다스림이 가져오는 새로운 삶의 방식, 곧 서로 받아주고 서로 한 식탁에 함께 앉아도 되는 그런 삶의 방식을 만난 것입니다. 서로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모든 자녀를, 의인이든 죄인이든, 힘 있는 이든 힘없는 이든, 한데 모으려 하시기 때문이지요.

 

자캐오는 자신의 이웃들을 착취하는 데 모든 것을 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의 회심을 통해 역시 모든 것을 겁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자신이 가진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과거에 지나치게 요구했던 것에 대해서는 네 곱절로 갚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합니다. 여기서도 우리가 보는 것은, 목가풍의 낭만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무것도 이전처럼 그대로 머무르지 않습니다. 온 삶이 움직이고 흔들립니다.

 

그리고 정확히 여기에 또한 우리의 약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위해 존재합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위해, 또 교회를 위해 존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사실이 우리의 삶을 무엇인가 조금이라도 바꾸어 놓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를 다, 곧 하느님의 것도 원하고 동시에 나의 안락함도 원합니다. 하느님의 것도 열매를 맺고, 동시에 나의 모든 것도 있는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게 가능한 일인가요? 우리는 두 가지를 다, 곧 하느님과 중산층적인 배부름을 동시에 다 누릴 수는 없습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성인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지요. “하느님 나라를 믿는 사람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함께하는 꿈틀대는 역사를 만납니다. 이 만남을 통해 그는 자신이 흔들리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역동적인 움직임에 자신을 내맡깁니다. 이 움직임은 처음에는 그저 그가 나무를 기어오르게 했을 뿐입니다. 그는 더 잘 보기를 원했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자 했을 따름입니다. 하지만 그다음에 이 움직임은 그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우리는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잘 알지요. 새것에 자신의 삶을 내맡기는 것, 하느님의 것 때문에 자신의 삶을 바꾸는 것,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제 결정적인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곧 우리의 삶은 놀라울 정도로 타성에 젖어 지속적인 나태함에 빠져 있습니다. 하느님마저도 우리 삶의 중심을 밀어내고 우리의 게으른 악습을 흔들어 움직이게 하실 수 없을 정도지요.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성공하십니다. 그분이 당신 백성 한가운데서 이루시는 역사에서 솟아나는 기쁨이 그러한 일을 가능하게 하는 신비지요.

 

자캐오는 기쁨에 충만하여 예수님을 자기 집에 맞아들입니다(루카 19,6 참조). 이제 자신의 삶을 바꾸고, 자신의 온 삶을 뒤집어서 새로 세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에게는 이 모든 것이 어려운 일도 무거운 짐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난 새로운 체험이 그에게 기쁨을 샘솟게 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이 기쁨이야말로 그가 회심할 수 있는 힘입니다.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 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그리스도론을 가르치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저명한 성서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나아가 한국의 신앙인들에게 보내는 연재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6년 10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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