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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성탄의 평화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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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7-10-08 조회수4,396 추천수0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성탄의 평화는 다르다

 

 

이미 몇 해 전 일입니다. 유럽 언론들이 로마에서의 고고학적 발굴을 대서특필한 적이 있습니다. 학자들이 로마 황제의 궁전이 들어서 있던 팔라티노 언덕 아래를 탐사하면서 진귀한 모자이크로 장식된 동굴을 찾아냈다는 보도였지요.

 

이 동굴이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은, 고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작품을 비롯한 여러 고대 문헌들을 통해 이미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 동굴은 고대 로마에서 가장 중요한 제의 장소였으니까요. 로마의 건국 신화에 따르면, 이 동굴 안에서 로물루스와 레무스 쌍둥이 형제가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으며, 후에 로물루스가 이 언덕에 로마를 세웠다고 합니다. 그런 역사적인 고대의 제의 장소가 드디어 발굴된 것이지요. 고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흥분했습니다.

 

 

두 개의 동굴

 

이 놀라운 소식을 접했을 때, 저는 곧바로 또 하나의 동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랜 전승에 따라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으로 전해지는 동굴 말이지요. 물론 우리는 예수님을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것으로 묘사하는 데 익숙합니다. 그렇게 꾸며놓은 성탄 구유 장식들은 대개 예술품처럼 멋지고 훌륭해서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흠뻑 빠져듭니다. 하지만 가장 오래된 전승과 무엇보다 동방교회의 모든 전승은, 예수님이 마구간이 아니라 동굴에서 태어나신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런데 이는 역사적으로도 많은 의미를 지닙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비탈진 언덕의 무른 바위를 파고 거기에 가축우리를 만드는 경우가 흔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정말로 동굴에서 태어나신 게 맞을지도 모릅니다. 루카 복음서는 갓 태어난 아기 예수님을 마리아가 구유에 뉘었다고 전합니다(루카 2,7 참조). 아무튼 그런 구유가 있는 동굴은 평상시에 염소나 양이 피난처로 찾아들던 곳이었지요.

 

로마의 쌍둥이 형제가 자란 동굴과 예수님이 태어나신 동굴, 이 둘을 서로 비교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저에게 밀려왔습니다. 물론 정확히 말해 동굴 자체의 모양새가 아니라 두 이야기가 전하는 사건을 비교하는 것이지요. 더 나아가 이런 비교도 가능할 것입니다. 결국 두 동굴에서 각각 어떤 결과가 빚어졌는가?

 

 

형제의 분열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랍니다. 늑대의 젖이 분명 그들에게는 큰 효과가 있었지요. 그들은 장성하고 강력해집니다. 늑대와 같은 본성은 후에 그들이 각자 도시를 세우려고 할 때 비로소 나타납니다. 로물루스는 팔라티노 언덕에, 레무스는 아벤티노 언덕에 도시를 세우려 합니다. 각자 자신의 도시를 말이지요. 이미 분열이 발생한 것입니다.

 

하지만 더욱 불행한 일은 이후에 일어납니다. 한번은 로물루스가 두 마리 흰 소에 쟁기를 매고 팔라티노 언덕에 이른바 ‘신성한 고랑’을 내고 있었습니다. 머릿속에 담아둔 도시의 윤곽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는 고랑은 자신이 세울 도시의 ‘배수구’요 흙이 두둑한 부분은 ‘성벽’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레무스가 그 우스꽝스러운 ‘성벽’을 훌쩍 뛰어넘으며 형제를 놀렸습니다. 이에 화가 난 로물루스가 레무스를 때려죽이며 “누구든지 내 성벽을 넘는 자는 이렇게 될 것이다.”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의 건국 신화입니다. 모든 신화가 그렇듯이 여기에도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곧 조그만 도시 로마에서 대제국이 나온 것이지요. 인간이 세운 모든 나라와 마찬가지로 폭력 위에 세워진 제국 말입니다. 이 제국의 표어는 이러했습니다. “우리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민족에게는 관용을 베푼다. 그러나 우리에게 저항하는 민족은 가차 없이 진압한다.” 물론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민족은 해마다 힘겹게 조공을 바쳐야만 했지요. 아무튼 이 대제국은 천년 이상을 지탱했습니다.

 

하지만 로물루스가 폭력 위에 세운 이 로마 제국도 결국은 나라에서 나라로 이어지는 긴 역사 가운데 그저 한 나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나라들은 모두 힘에 의해 유지되지요. 통치자의 옷을 걸친 늑대와 같은 폭력적인 힘에 의해서든지 또는 법과 질서를 만드는 온건한 힘에 의해서든지, 모두 힘으로 지탱됩니다. 

 

법과 질서 위에 세워진 나라, 평화를 추구하고 자신의 고유한 규범들을 지키는 나라가 세상에는 꼭 있어야 합니다. 그런 나라가 없는 곳에서는 곧바로 혼돈이 지배할 테니까요. 하지만 민주주의적 법치국가조차도 힘에 의해 유지됩니다. 경찰력과 검찰권, 사법권 등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질서를 바로 세울 수가 없습니다. 더 나아가 비상시에 적에 맞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군대도 필요로 합니다. 그러니까 ‘합법적인’ 국가 권력의 힘이란 게 존재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불행하게도 질서 유지를 위한 힘을 좋은 의도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나라들조차도 마지막에는 너무나 자주 파렴치한 압제 권력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폭력으로 기우는 경향이 인간 안에 깊이 내재한다고나 할까요.

 

 

상반되는 역사

 

또 하나의 동굴이 말하는 이야기, 곧 루카 복음사가가 전하는 이야기 역시 이 모든 것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루카는 로마와 그 제국의 힘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알고 있지요. 그는 자신이 전하는 이야기에서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등장시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사람들이 자신을 평화를 가져오는 자, 인류의 ‘구원자’요 ‘주권자’로까지 숭배하게 했던 인물입니다. 

 

루카는 자신의 복음서 이야기에서 로마의 세금 징수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이 세금 징수는 로마가 점령한 나라들을 착취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편이었지요. 아무튼 우리는 성탄 이야기에서 그 배경이 되는 맥락에 감추어진 의미를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바로 거기 자신을 신적인 ‘구원자’로 숭배하게 했던 황제가 있지요. 그는 힘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는 권력자입니다. 다른 민족들은 착취하고 도탄에 떨어지게 하는 세금 징수자입니다.

 

이런 역사를 배경으로 루카는 이제 그와 상반되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바로 진짜 구원자요 주권자이신 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분만이 세상이 고대하는 평화를 가져다주십니다. “땅을 흔들며 저벅거리는 군화”와 “피 속에 뒹군 군복”(이사 9,4) 위에 세워진 거짓 평화와는 전혀 다른 참된 평화를 가져다주십니다. 이 평화는 인간들을 통해서도 권력을 통해서도 오지 않습니다.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이 평화에 대한 표지가 구유에 뉘인 힘없는 갓난아기입니다. 이 평화를 천사들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이 노래의 뜻은 이렇습니다. 모든 민족이 그토록 고대하던 이 참된 평화는 바로 하느님에게서 온다는 것, 오로지 절대적인 비폭력을 통해 온다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이 평화는 삼십여 년 후에, 폭력으로 대응하기보다는 자신이 선포한 것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신 분, 참으로 평화를 가져다주시는 분에 의해서 옵니다. 그런 다음 이 참된 평화는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 서로 평화를 이루기 시작하는 이들을 통해서 옵니다. 한마음으로 구유를 향해 달려간 목동들이야말로 예수님을 따르는 그 수많은 이들의 첫 시작이지요.

 

 

성탄과 우리의 평화

 

아십니까? 구유의 갓난아기와 베들레헴 들판의 천사들과 목동들 이야기가 결코 낭만적인 목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 이야기는 성탄 시기에 우리를 그저 감상에 젖게 만드는 옛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전부냐 아니냐 하는 문제, 곧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어떻게 평화를 이룰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걸린 이야기입니다.

 

로마 군대의 무기는 창과 칼이었습니다. 그 사이 세상에는 더욱 효과적인 무기들이 개발되었지요. 단추 하나 누르면 온 민족을 말살하고도 남습니다. 파렴치한 독재자들의 권력욕과 테러로 이어지는 극단주의에 맞서 이 세상에 과연 평화를 이룰 수 있을지 여부는 우리와 우리 후손들에게 모든 것을 판가름하는 절체절명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인간성이 증대되고 대화를 수없이 많이 하고 좋은 뜻이 아무리 많이 모인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참된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는 인간이 권력에 너무 취약합니다. 그러기에는 인간 안에 너무 많은 늑대의 피가 흐릅니다. 로물루스는 자신의 형제인 레무스를 때려죽였지요. 이것이 보통 일입니다. 우리 모두 안에 그런 피가 흐르지요. 우리는 다만 대부분 시민 사회의 도덕적인 테두리 안에서 아주 섬세하게 그런 일을 행하고 있을 뿐입니다.

 

성탄의 복음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세상의 평화를 위한 ‘유일한’ 길이 있다고요. 우리의 가족과 우리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참된 평화를 위한 단 하나의 길이 있다고요. 그 길은 바로 구유에 누운 아기에게로 가는 길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모두가 고대하는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베들레헴의 목동들과 함께함으로써 그 평화가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들레헴의 목동들에게서 우리는 이미 후대에 이루어질 공동체의 모습을 봅니다.

 

천사들이 선포한 이 평화는 그저 전쟁을 멈추는 것, 서로 물어뜯고 할퀴는 것을 그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서로 죽도록 두들겨 패고 공중에 날려버리는 것을 그만두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평화는 서로 화해하고, 타인에게 자신의 마음을 열며, 다른 이에게 아픔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채고, 상처들을 감싸주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서로 형제자매가 되는 일에서 그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산상설교에서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이처럼 두 동굴을 비교해 보면, 서로 다른 의미가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는 권력욕과 형제 살해의 상징이고, 다른 하나는 힘에 대한 포기와 형제애의 상징입니다. 물론 힘에 대한 포기와 형제애는 우리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가능하지 않겠지요. 어디 우리가 한번이라도 스스로 그런 의지를 가져본 적이 있을까요?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 안에서, 베들레헴의 그 갓난아기 안에서 우리에게 참된 평화를 주시려 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의 기쁜 소식이지요.

 

그러니 성탄과 그 이후 이어지는 시기에 구유 앞에 나아가 이렇게 기도해도 좋을 것입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저와 제 주위 모든 이에게 이 성탄의 평화를 주소서. 제 마음이 넓고 고요하고 성실한 마음이 되게 해주소서. 저를 당신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믿음 안에서 형제자매들을 새롭게 보는 법을 제게 가르쳐주시고, 그들과 함께 당신의 길을 가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그 길은 복음의 길, 당신을 따르는 길입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에게 진정한 성탄이 될 수 있겠지요.

 

바로 그런 의미로 저는 한국의 형제자매들에게 성탄의 평화를 기원합니다. 우리의 유일한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를…!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 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그리스도론을 가르치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저명한 성서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나아가 한국의 신앙인들에게 보내는 연재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6년 12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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