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근심 걱정을 벗어난 삶의 토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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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7-10-08 | 조회수4,588 | 추천수0 |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근심 걱정을 벗어난 삶의 토대
마태오 복음서의 산상 설교(5-7장) 가운데 예수님의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좀 길지만 인용하지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그리고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25-34)
스트레스 줄이기?
예수님의 이 말씀이 일단 친절하게 다가옵니다. 마치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한 삶의 자세처럼 들리지요. 긴장을 푸는 적당한 방법 말입니다. 끊임없이 근심하며 살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머릿속은 불안으로 터지고 마음은 두려움으로 가득한데, 밤에는 편히 잠들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말씀에서 특히 예수님이 자연을 얼마나 사랑스런 눈으로 관찰하시는지 감동적입니다. 하늘을 멀리 나는 새들, 겨울의 우기가 끝나고 갈릴래아 어디서나 하룻밤 사이면 금세 피어나 언덕과 들판을 수놓는 봄꽃들…!
편안한 마음으로 이렇게 감상에 젖다보면, 우리는 한없는 위로의 말씀처럼 들리는 이 복음이 그 안에 얼마나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하지만 한번 곰곰이 되짚어보면, 곧바로 문제들이 슬금슬금 기어 올라옵니다. 먼저, 이 말씀대로라면 우리는 일을 할 필요 없이 하루하루를 태평하게 지내야 하는 것일까요? 빈둥거리며 유유자적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 머리가 그렇지 않다고, 그런 의미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자신의 공동체들에게 써 보내길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2테살 3,10) 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이 산상 설교의 의미일 수는 없습니다.
이는 이 말씀에서 예수님이 사용하시는 비유의 대상과도 맞지 않습니다. 곧 새들은 하루 종일 일을 합니다. 둥지를 짓기 위해 얼마나 부지런히 움직이는지 보십시오. 새끼들이 부화하고 나면, 새들이 얼마나 열심히 쉬지도 않고 곤충과 벌레를 찾아 그것을 새끼 주둥이에 넣어주는지 모릅니다. 이게 결코 별일도 아닐까요? 꽃들도 땅에 뿌리를 내리고 물과 질소와 철분과 각종 미네랄을 흡수하기 위해 끊임없이 일을 합니다.
계획과 준비는 불필요?
아무튼 우리가 유유자적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결코 이 말씀의 의미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근심 걱정 속에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일까요? 먹을 것, 입을 것, 나아가 삶 자체에 대해 아무 걱정 없이 살라는 말씀일까요? 하느님께서 하늘의 새들과 들의 꽃들을 보살피시듯 우리도 보살피시기 때문에요.
그러니 미리 걱정하거나 미리 대비하거나 미리 계획하거나 오랜 기간 앞서 준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이 말씀의 의도일까요? 본문 끝에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라는 말씀도 있으니까요. 아무튼 여기서 예수님은 유비무환과는 반대의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그런 의미라면 우리는 냉장고에 여분의 것을 쌓아 두어도 안 되고 무엇을 대량구매해서도 안 됩니다. 저축, 노후 대비, 보험, 건강 검진을 해서도 안 되고, 어쩌면 사제가 미리 강론 준비를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불어넣어주시는 대로 말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그럴 경우 결과는 뻔합니다. 대개 안 좋은 강론이 되고 말지요.
아이들의 미래 삶을 위해 학교 교육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경제 활동, 산업 생산, 학문에도 준비가 필요합니다. 기업 활동, 학문적 기획, 정치적 행위 등, 이 모든 것에 사전 계획과 자주 오랜 시간이 걸리는 세밀한 준비가 없어서는 안 됩니다. 이 모든 일을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라는 말씀대로 다른 이들에게 맡겨야 할까요?
그럴 수는 없겠지요. 그런 식의 해석은 황당무계합니다. 세계가 겪는 빈곤을 두고 그런 말을 할 수는 없겠지요. 수많은 재난 앞에서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재난 가운데 많은 것이 한편으로는 준비 부족으로 생겨납니다. 예를 들면 지진에 취약하게 건설된 학교 건물이 무너져 수백 명의 어린이가 죽음을 당하기도 합니다. 의학적인 예방 조치가 시급한 질병과 전염병들이 세상에 수없이 많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두 손을 놓은 채 무관심하게 병든 이들과 가난한 이들, 추방당한 이들과 절망하는 이들에게 이런 말을 할 수는 없겠지요.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이야말로 끔찍한 냉소주의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기라’는 복음 말씀을 이런 식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복음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무엇이 예수님이 정말로 의도하신 바일까요?
여유 있는 근심 걱정?
얼마 전에 저는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글을 읽었습니다. 여기에 또 다른 문제가 숨어 있지요.
“올바른 근심 걱정이 있고 그릇된 근심 걱정이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아버지 같은 호의 아래 산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근심 걱정은 전혀 다른 성격을 띤다. 물론 예수님은 준비하고 계획하는 일이 인간 삶에 필수적임을 아신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를 믿는 이의 근심은 이방인들의 근심이나 사전 대비와는 다른 것이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불행은 하나의 재앙이다. 모든 질병이 재앙이고, 마지막으로 죽음도 재앙이다. 때문에 믿음이 없는 이들은 끊임없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근심하고 걱정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크고 작은 재앙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한시도 중단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재앙에서 비껴가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은 다르다. 물론 그리스도인에게도 근심 걱정이 있다. 하지만 그 근심 걱정은 모든 것을 내려놓는 ‘여유’ 속에 ‘두려움이 없는’ 근심 걱정이다. 그리스도인은 ‘깊은 신뢰와 커다란 안정’ 가운데 모든 일에 임할 수 있다. 하느님의 아버지 같은 사랑과 보살핌이 자신을 감싸고 이끌어간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이 문제를 푸는 데 하나의 진지하고도 진심어린 해결책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도 근심 걱정을 한다고, 하지만 두려움 없이, 편안하게, 여유를 갖고, 침착하게, 성숙한 태도로 그렇게 한다고 말할 수 있지요.
하지만 저는 이러한 해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러한 해석이 그르지는 않습니다. 믿음에서 오는 커다란 신뢰와 여유야말로 진정 올바른 것이지요. 하지만 그러한 해석에는 결정적인 면이 부족합니다. 그리스도 공동체의 본질에 대한 체험이 빠져 있지요. 때문에 가장 중요한 면을 건드리지 못합니다.
근심 걱정하지 않는 삶의 토대
근심 걱정하지 말라는 복음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누구에게 하신 말씀인지를 살피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이 말씀의 본래 대상자는 누구였을까요? 두말할 필요도 없이 분명합니다. 그 대상은 불특정한 이방인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유다인 청중도 아니었지요. 계속해서 예수님 주위에 몰려드는 백성의 무리가 그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이 말씀은 분명 제자들의 작은 무리를 향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이스라엘 전역을 정처 없이 떠돌았지요(루카 12,22 참조). 그들의 이러한 상황이 이 말씀의 배경을 이룹니다.
제자들의 이 상황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봅시다.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집과 가족과 자신의 직업을 떠납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이스라엘을 돌며 정처 없는 유랑의 삶을 사십니다. 그들은 늘 길 위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다스림이 도래했다는 소식이 어디서나 들릴 수 있도록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지요. 하지만 매번 예수님과 제자들은 날이 저물면 오늘은 어디서 묵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루카 10,5-12). 저녁에 그들을 자신의 집에 맞아줄 사람을 그들은 만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예수님을 직접 따르는 제자들 외에도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요. 예수님과 함께 떠돌지는 않았지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 이를 받아들인 이들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 살면서 예수님의 추종자가 된 이들입니다. 자신의 ‘지역에 머물며’ 예수님의 동조자, 친구, 협조자, 후원자가 된 이들입니다. 최후 만찬을 위해 잘 준비된 이층 방을 내어준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마르 14,12-16 참조). 아니면 단순히 마리아와 마르타를 떠올려 보십시오(루카 10,38-42).
예수님과 제자들은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전역에 걸쳐 그물망처럼 얽힌 친구와 동조자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지요. 그리고 바로 여기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근심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의 맥락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녁이면 그들을 집에 맞아줄 사람이 늘 있을 테니까요. 서로 주고받는 것이지요. 저녁에 예수님과 제자들을 자신의 집에 맞아들인 이는 음식과 밤의 안전을 제공합니다. 반대로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들을 맞아들인 그 지역 추종자에게 생생한 만남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이로써 그 집에 새것이 들어옵니다. 하느님 나라의 조용한 혁명이!
양편 사이에 말하자면 주고받고 함께하는 유대가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제자들은 더 이상 자기 자신과 자신의 개인적인 관심사를 위해 살지 않습니다. 하느님 백성을 위해 삽니다. 지역의 추종자들은 더 이상 자신과 자신의 자녀들만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이스라엘 곳곳에, 예수님이 가시고 그분과 제자들을 맞아들이는 곳 어디에나 새것이 이루어집니다. 수많은 이들의 새로운 유대가, 옛 혈연관계를 넘어서는 새 가족이 형성됩니다.
그러니 분명, 산상 설교의 이 말씀이 말하는 신뢰는 “나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어. 하느님께서 다 해주실 거야!”라고 외치는 마법적인 신뢰와는 다릅니다. 또 세상을 모르는 순진한 신뢰와도 다릅니다. 그런 것은 비이성적일 뿐만 아니라 허공에 매달린 것과 같습니다. 더 나아가 낭만적인 유유자적의 삶과도 무관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근심 걱정하지 않는 삶은 매우 현실적인 토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맞아들이는 이들의 집, 곳곳에 있는 예수님의 추종자들의 집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집들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첫 공동체들이 형성되었지요. 이 집들에 모여 첫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고 성찬례를 거행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 공동체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는 근심 걱정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예수님의 본래 의도가 지닌 핵심까지 파고들었습니다. 제자들은 결코 혼자가 아니기 때문에 근심 걱정을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제자들은 예수님의 추종자와 동조자들이라는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다스림을 고대하던 이들이었지요.
다른 한편, 저녁에 제자들을 자신의 집에 맞아들인 이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다스림과 이 다스림이 지닌 급박성을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시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들은 이제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먼저 찾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에는 이제 새로운 형태의 사회가 형성됩니다. 모두가 서로 돕는 사회가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이렇게 함께하는 유대 가운데 서로 지지하며 도와주는 목적은 사도직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파견된 이들이 여기저기 떠돌며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게 하려는 데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복음을 만난 이들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관심을 다른 모든 것보다 위에 둘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렇게 그들도 돌보십니다. 그들에게 새로운 가족을 선사하시고, 평화를 주십니다. 이 평화는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제자들을 맞아들이는 이들에게 약속된 평화입니다(루카 10,6 참조).
바로 이 점에서 우리 모두는 이 복음 말씀이 던지는 도전적 질문들에 직면합니다. 우리의 공동체는 과연 그러한 모습인가? 많은 이들이 서로 돕고 함께하는 공동체인가?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형제자매의 유대로 묶인 공동체인가? 그런 공동체이어야 복음을 위한 투신이 가능할 테니까요.
우리는 그런 공동체이기를 원하는가? 우리 본당이 늘 변화할 수 있도록 서로 도우려 하는가? 서로를 격려하고 서로에게 모범을 보이고 서로를 위로하고 서로를 지지하고 서로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그런 본당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는가? 늘 새롭게 일어나는 공동의 회심이 있고, 그 안에서는 언제나 근심 걱정을 내려놓을 수 있는 그런 공동체이기를 정말 바라는가?
저는 그러한 공동체가 바로 마태오 복음 6장 25-34절의 말씀이 뿌리내린 토대라고 확신합니다. 이러한 토대 없이는 이 복음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경솔하고 위험하기까지 한 해석에 기울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의 토대인 ‘살아 있는 공동체’ 안에서만 많은 이들의 삶이 하나로 연결되고, 서로가 서로를 위해 존재합니다. ‘살아 있는 공동체’라야 복음이 기쁜 소식이 됩니다.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 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그리스도론을 가르치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저명한 성서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나아가 한국의 신앙인들에게 보내는 연재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7년 2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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