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 히브리어 산책: 라하마, 레헴, 밀하마(싸우다, 빵, 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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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7-10-14 | 조회수8,030 | 추천수0 | |
[주원준의 히브리어 산책] 라하마, 레헴, 밀하마 주님은 나의 방패, 나를 살리시는 분
군인주일을 맞아 ‘싸움’과 ‘전쟁’에 관한 히브리어 단어를 살펴보자. 흥미롭게도 이 말은 ‘빵’과 깊은 관련이 있다. 탈출기를 성경 원문으로 읽을 때 느끼는 독특한 느낌도 알아보자.
- 라하마. 본디 ‘싸우다’를 의미했지만, 후대에 ‘함께 먹다’는 의미도 추가된 것 같다. 동사어근을 쓸 때는 대문자로 옮기고, 관습적으로 ‘아’(-a)를 넣어 읽는다.
싸우다, 함께 먹다
히브리어 라하마 동사는 뜻이 두 개다. ‘싸우다’가 첫째 뜻인데, 인간들이 싸우는 것이나 하느님이 싸우시는 것을 라하마라고 한다. 구약성경에는 주님이 라하마하신다는 표현이 많다. 시편에서 다윗은 주님께 “저와 라하마하는(싸우는) 자와 라하마해(싸워) 주소서”(시편 35,1)라고 기도한다. “사람들이 저를 짓밟고 온종일 라하마하며(몰아치며) 억누릅니다”(시편 56,2)고 주님께 외치는 기도도 있다.
특이하게도 라하마라는 동사는 수동형(니팔형)으로 자주 쓰이는데, 우리말로는 능동으로 옮겨야 자연스럽다. 여호수아는 광야 시절부터 크고 작은 전투로 잔뼈가 굵은 인물이다. 그는 승리의 요체란 무기나 군사의 수가 아니라 주님을 신뢰함에서 나오는 용기임을 확신하였다. 기브온을 구할 때 그는 “두려워하지도 말고 겁내지도 마라. 힘과 용기를 내어라. 너희가 맞서 라하마하는(싸우는, 니팔형) 모든 원수에게 주님께서 이렇게 하실 것이다”고 말하며 백성을 독려하였다.
‘함께 먹다’가 라하마의 두 번째 뜻이다. 비교적 후대의 본문에서 발견되는 이 용법은 아마도 다음에서 말할 ‘빵’(레헴)이라는 명사에서 파생된 것 같다. 잠언을 보면 “군주와 라하마하는(식사하는) 자리에 앉게 되면 네 앞에 무엇이 있는지 잘 살펴라”(잠언 23,1)라는 말씀이 있다.
고대근동의 지혜는 본디 일상의 소박한 깨달음에서 시작된 것으로 매우 실용적인 지혜였다. 우리말에도 ‘밥상머리 교육’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라하마하는(식사하는) 자리에서 서둘지 말고 음식과 주위 사람들을 찬찬히 배려하는 것이야말로 기본적 소양에 속할 것이다.
- 레헴. ‘빵’ 또는 ‘양식’을 의미한다. 무척 자주 사용되는 기초 단어에 속한다. 멤(m)이 단어 끝에서 사용되는 형태에 주의하라(미형).
빵
라하마와 어근의 형태가 같은 레헴은 ‘빵’이란 뜻이다. 구약성경에서 빵은 일용할 양식일 뿐만 아니라 주님께 바치는 제물이기도 하다. 우리네 차례상처럼, 평소 먹고 마시는 것을 거룩한 존재에게 바치는 것은 인간적 의례의 보편적 특징이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였던 멜키체덱은 일찍이 레헴(빵)과 포도주를 하느님께 바쳤다.(창세 14,18) 마므레의 참나무 곁에서 주님의 천사 세 분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났을 때, 아브라함이 그들을 지극정성으로 맞으면서 맨처음 준비한 것도 물과 레헴(빵)이었다.(창세 18,1-6)
이스라엘에서 빵은 가장 기본 먹거리였으므로 레헴은 ‘양식’이란 뜻도 있다. 인간이 태초의 동산에서 죄를 지었을 때, 자비의 하느님은 결국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면서 삶의 조건을 하나 덧붙이셨다. 남편인 아담에게 하느님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레헴(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창세 3,19)고 말씀하셨다.
전쟁
라하마에서 파생된 명사 밀하마는 ‘전쟁’이란 뜻이다. 밀하마는 작은 ‘전투’와 큰 ‘전쟁’을 모두 지칭하는데 쓰이며, 다양한 표현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앞에서 ‘클리’가 ‘그릇’ 또는 ‘도구’임을 보았다. 그러므로 “밀하마의 클리”는 “전쟁 무기”란 뜻이고(시편 76,4), “밀하마의 사람”은 “전사”란 뜻이다.(여호 17,1; 판관 20,17; 1사무 16,19)
- 밀하마.‘전쟁’을 의미한다. 멤(m)의 형태가 기본형이다. 검은색 윗첨자 e는 거의 발음되지 않는다. 히브리어에는 이처럼 어두에 멤(m-)을 붙여서 만드는 명사가 많다. 여성형 어미(-a)는 추상적인 뜻에 흔히 쓰인다.
전쟁과 빵
이렇게 전쟁과 빵의 히브리어 형태가 비슷하기 때문에, 탈출기를 히브리어 원문으로 읽으면 독특한 성찰로 빠져든다. 탈출기의 첫 장면을 보자. 히브리 백성이 불어나자 이집트인들은 “밀하마(전쟁)라도 일어나면, 그들은 우리 원수들 편에 붙어 우리에게 맞서 라하마하다가(싸우다) 이 땅에서 떠나가 버릴 것”을 두려워한다.(탈출 1,10) 하지만 결국 주님께서 백성을 위하여 라하마(싸워)해주셨고(탈출 14,14), 바다를 가르는 기적의 현장에서 모세는 “주님은 밀하마의 사람(전쟁의 용사) 그 이름 주님이시다”(탈출 15,3)고 노래한다. 히브리 후손들은 이 사건을 기념하여 “정해진 때에 이레 동안 누룩 없는 레헴(빵)을 먹어야 한다.”(탈출 23,15; 12,8.15 등) 모세는 누룩 없는 레헴(빵)이란 고난의 레헴(빵)임을 밝혔다.(신명 16,3) 원문으로 읽는 탈출기는 라하마와 밀하마와 레헴이 교차하는 책이다.
만군(萬軍)의 주님은 백성을 위해 싸워주시면서 동시에 백성을 살리시는 분이시다. 이집트 탈출을 생각하며 참된 군인의 길을 묵상한다.
* 주원준(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 독일에서 구약학과 고대 근동 언어를 공부한 평신도 신학자다.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주교회의 복음화위원회 위원, 의정부교구 사목평의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7년 10월 15일, 주원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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