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구약 성경의 물신: 오직 주님만 섬겨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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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7-10-16 | 조회수4,373 | 추천수0 | |
[구약 성경의 물신] 오직 주님만 섬겨라
바알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예언자 엘리야와 호세아는 큰 역할을 했다. 이번 호에서는 바알 숭배에 맞서 하느님 백성의 신학을 한 단계 도약시킨 엘리야 예언자의 활약을 자세히 보자.
예로보암의 죄
지난 호에서 보았듯이, 바알 숭배는 이스라엘에 널리 퍼졌다. 특히 북왕국은 시조 예로보암부터 후대의 임금들까지 모두 바알 숭배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성경은 그들이 ‘예로보암의 죄’에 빠졌다고 기록했다(1열왕 16,31; 2열왕 10,29.31; 13,2; 15,9 등). 그런데 북왕국의 임금들이 왜 바알 숭배에 빠졌을까? 북왕국의 종교 정책을 조금 깊이 들여다보자.
북왕국의 이원적 정책
가장 풍부한 자료를 전하는 임금은 아합이다. 흔히 그는 왕비 이제벨과 함께 하느님 신앙을 탄압하고 바알 숭배를 지원한 임금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는 하느님 신앙을 일방적으로 탄압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 안에서 ‘주님과 함께 바알을 섬기자.’는 종교 정책을 편 인물이다. 일찍이 독일의 성서학자 알트(A. Alt)는 이를 ‘이원적(dualistic)종교 정책’이라고 불렀다.
아합이 하느님 신앙을 일방적으로 탄압한 것이 아니라는 대표적인 근거를 보자. 먼저 왕자들의 이름이다. 아합의 왕자들은 왕위를 이은 아하즈야(1열왕 22,40.50.52)나 요람(2열왕 1,17; 3,1)은 물론, 왕위에 앉지 못한 요아스(1열왕 22,26)까지 모두 ‘야훼’(주님)의 이름이 들어 있다. 그의 신하인 오바드야(18,3)나 치드키야(22,24)도 마찬가지다. 주님의 신앙인들을 박해하며 바알 숭배를 지원했다면 이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전쟁이 닥치면 아합은 하느님의 뜻을 물었다. 아람 임금 벤 하닷이 침략하였을 때(1열왕 20,1-12), 아합은 주님의 말씀에 충실했다(20,13-21). 라못 길앗을 되찾으려 전쟁을 할 때도 그는 주님의 뜻을 물었다(22,16-19). 나봇의 포도밭 이야기에서도 아합이 주님의 예언자를 존중했음을 알 수 있다(21장). 물론 그가 언제나 주님께 순종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바알에게도 문의하고 바알도 숭배했다. 그의 아들 아하즈야도 다쳤을 때, 바알에게 치유를 문의했다(2열왕 1,2).
이원적 종교 정책의 배경과 노림수
이원적 정책은 땅에 정착한 백성이 다신교의 유혹에 넘어간 결과로 생겨났다. 정착한 백성은 풍요와 권력의 신 바알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게다가 나라를 이끌어 가는 북왕국의 지도자들은 현실적인 정책을 따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고대 근동의 국제적 표준은 모두 다신교적이었다. 경제와 교역을 일으키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려면 세계적 흐름과 시대정신에 어느 정도 순응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식의 정책은 이미 솔로몬 임금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1열왕 11,1-13). 그가 예루살렘에서 이방 신들을 섬길 수 있도록 허용한 것도 외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여 부국강병을 도모하였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솔로몬이 부강한 나라를 세우는 데 성공했던 기억도 이원적 종교 정책을 뒷받침하는 훌륭한 명분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아합과 이제벨 등은 하느님 신앙과 바알 숭배의 두 축으로 나라를 운영하려고 시도했다. 왕국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이스라엘의 양대 종교 세력이 서로 양보하며 화합하라고 주문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왕국의 세력 균형도 도모했을 것이다. 어쩌면 아합의 정책은 현실과 이상을 조화시키는 묘책으로 받아들여졌을 수 있다. 한편으로는 세계적 흐름을 무시할 수 없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라의 정체성도 지켜야 했으니 말이다.
다신교 체제였던 바알 신앙에 이런 주문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여러 신이 각자의 기능을 담당한다고 생각하는 다신교에서는 이런 생각을 수용하기 쉽다. 아합과 바알 숭배자들 사이에는 아무런 갈등도 찾아볼 수 없다.
혼합 주의의 기능화
아합의 종교 정책은 명백한 혼합 주의다. 이 혼합 주의가 특히 나쁜 점은 하느님 신앙과 바알 숭배를 기능화(functionalisation)하여 공존시키려고 했다는 것이다. 외적이 침략하여 이스라엘에 위기가 닥쳤을 때는 ‘만군의 주님’이자 승리의 신인 하느님을 찾았다. 하느님 신앙인들은 이런 영역에서만 자신의 역할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일상의 풍요와 치유를 위해서는 바알을 찾았다.
이렇게 기능화가 된 하느님 신앙은 결국 ‘하느님 백성의 절반’ 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모든 것이 아니라, 특정한 영역을 관장하는 신으로 추락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주님의 백성’이 아니라 ‘주님과 바알의 백성’이 된 것이다. 아합 측에서 보자면 바알 숭배자들은 왕국의 운영과 발전에 협조하는 세력으로서 ‘왕국의 절반’에 만족하는 자들이다. 하느님 신앙인들은 달랐다. 그래서 이제벨은 주님의 예언자 등을 압박하고 길들여 국가에 협조하라고 강요한 것 같다(1열왕 18,13 참조). 그런데 엘리야에게는 이런 시도가 전혀 통하지 않았다.
엘리야는 이원적 종교 정책의 문제점을 정확히 보고 최초로 반기를 든 인물이다. 그는 하느님께서는 하느님 백성의 절반만으로 절대 축소될 수 없는 분이시라고 주장했다. ‘반(半)주님은 반(反)주님’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하느님은 전부이셨고, 그것은 하느님 백성에게 너무도 당연했다. 현실을 고려하여 주님을 절반만 섬기는 데 만족하고 양보하자는 주장은 주님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과 동의어였다.
주님은 특권적 존재이시다
엘리야의 주장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하느님께서는 이집트 탈출 사건과 시나이 계약을 통하여 이스라엘 안에서 유일하시고 독특하시며 배타적 관계를 맺으셨다. 하느님 백성에게는 주님과 비슷한 신도 없고, 주님과 비교할 수 있는 신도 없다. 주님은 유일하신 하느님이시기에, 당신 백성에게 오직 당신만 따르라고 요구하실 특권이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은 이런 독특한 인연 속에서 살아야 하므로 다른 신을 따르는 것도, 다른 신을 허용하는 것도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하느님의 ‘특권 주장’(Privileganspruch)을 우리말로 ‘전권 주장’이라고도 옮기는데, 필자는 둘 다 괜찮은 번역어라고 느낀다. 이집트 탈출과 시나이 계약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당당히 특권을 요구하실 수 있는 분이시요, 그분은 백성 안에서 전권을 지니신 분이시다.
그분의 전권은 하느님 백성 안에서 절대 희석될 수 없다. 그러므로 왕국의 절반만으로 만족하라는 아합의 요구를 엘리야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합 측에서 보면, 엘리야는 세계적 흐름이나 시대정신을 무시하는 이상주의자처럼 비쳤을 것이다. 왕국의 안녕과 질서를 위협하는 엘리야를 아합은 그냥 둘 수가 없었다. 엘리야는 모진 고난을 받았다.
아합의 두 번째 주장은 하느님 백성은 오직 주님만 섬기라는 ‘유일 섬김’(monolatry)이다. 이 주장은 하느님의 특권 주장과 긴밀히 연관된 것이다. 하느님은 백성에 전권을 지니신 분이시기에 우리가 섬길 분은 오직 그분밖에 없다.
여기서 잠시 유일신론과 유일 섬김에 대해 알아보자. 사실 유일신론(monotheism)이라는 말은 17세기에 처음 고안된 말이다. 이 말은 상당히 발전된 신학과 철학을 전제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고, 구약 성경에서도 유배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개념이다.
유일신론은 오직 하나의 신만 존재한다는 주장으로, 자칫 하느님 존재의 유일무이성에 대한 철학적 논쟁으로 발전하기 쉽다. 우리는 유일신론을 배우면서, 실천적으로 한 분을 모시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빼먹지 말아야 한다고 주의를 받곤 한다. 그런데 엘리야가 말한 유일 섬김은, ‘오직 한 분만(mono-) 섬긴다(-latry).’는 뜻으로서, 유일신론의 핵심을 함축적으로 드러낸다. 유일 섬김은 그 자체로 섬기는 실천과 헌신에 초점을 맞춘 말이며, 뒷날 유일신론으로 발전하는 훌륭한 초석이 된다. 일부에서 이 말을 ‘일신 경배’ 등으로 옮기는데, 그렇게 하면 이 낱말이 지닌 신학적 느낌과 중요성을 올바로 살리지 못하는 것 같다.
예언자와 우리
‘주님과 함께 바알을 섬기자.’는 임금에 맞서 ‘오직 주님만 섬겨라.’는 주장을 편 엘리야는 고난을 받았다. 하느님 백성 안에서 하느님의 예언자가 소외되고 탄압받는 현상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임금과 지배층의 믿음과는 다른 ‘예언자의 고독한 내면’이 탄생했다(1열왕 19,10).
나약한 인간은 지금도 현실과 이상의 갈등 속에서 살며 약점을 드러낸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014년 한국을 방문하시어 124위 시복식을 직접 거행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식으로, 우리의 신앙을 양보해 타협하고, 복음의 근원적 요구를 희석시키며, 시대정신에 순응하라는 요구를 받게 됩니다.”
교황님의 가르침과 엘리야 예언자의 주장과 순교자의 삶과 죽음은 일맥상통한다.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특권과 전권이 있는 분이시요, 우리는 오직 그분만 섬겨야 한다는 엘리야의 외침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뚜렷하다.
*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 -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으로 고대 근동과 구약 성경을 연구하는 평신도 신학자이다. 주교회의 복음화위원회 위원이자 의정부교구 사목평의회 위원이다. 저서로 「구약 성경과 신들」과 「신명기 주해」 등이 있다.
[경향잡지, 2017년 10월호,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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