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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예수님 이야기35: 예수님의 신원과 길(루카 9,3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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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7-11-04 조회수4,196 추천수0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 루카복음 중심으로] (35) 예수님의 신원과 길(루카 9,37-50)

 

예수님을 섬기듯 사람을 섬겨야

 

 

거룩한 변모의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은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아이를 고쳐주십니다.(9,37-43) 그리고 다시 한 번 자신이 가는 길이 수난과 죽음의 길임을 예고하십니다.(9,43-45) 별도의 기사이지만, 흐름으로 보면 두 이야기가 하나로 연결돼 있습니다. 그 다음에 루카는 두 가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누가 큰 사람인지를 놓고 제자들이 벌이는 논쟁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관한 내용입니다.(9,46-50) 이 두 이야기 또한 흐름상 연결되는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러운 영을 내쫓으시다(9,37-43)

 

루카는 거룩한 변모 사건 다음 날 예수님과 제자들이 산에서 내려왔다고 전합니다.(9,37) 예수님의 소문은 이미 널리 퍼져 있었기에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만나러 옵니다. 그중에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외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예수님을 “스승님”이라고 부르면서 자기 아들을 봐 달라고 청합니다. 루카는 그 청을 “부르짖었다”(9,38)고 표현합니다. 그만큼 절박하고 간절하다는 표시입니다. 아이 아버지는 “영이 아이를 사로잡기만 하면 아이가 갑자기 소리를 지릅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온통 상처를 입히면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습니다”라고 증세를 설명하고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영을 쫓아내 달라고 했지만 쫓아내지 못했다는 얘기까지 곁들입니다.(9,39-40)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 곁에 있으면서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하시고는 아이를 데려오라고 이르시지요. 아이가 다가오자 그 더러운 영을 꾸짖어 아이를 고쳐 주신 후 아버지에게 돌려주십니다.(9,41-42) 문맥으로 보면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는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 곧 아이 아버지와 제자들과 많은 군중을 다 가리키는 듯합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이 고치지 못한 아이를 고쳐 주신 것으로 보면 더러운 영을 꾸짖어 아이를 고치지 못하는 제자들의 무능을 탓하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루카는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의 위대하심에 몹시 놀랐다”(9,43)는 문장으로 이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주목할 것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의 위대하심에 놀란다고 표현한 점입니다. 앞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는데(9,20) 이제는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을 하느님의 힘을 지니신 분으로 보고 놀란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루카는 이 말씀을 바로 이어오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두 번째 예고와 연결시킵니다.

 

 

두 번째 수난 예고(9,43-45)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9,43)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 수난 예고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9,44) 하지만 제자들은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귀담아들어라” 하고 당부하셨지만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라는 말씀을 제자들이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저 말씀이 무슨 뜻일까?’ 하고 궁금하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나아가 그 말씀에 관해 묻는 것도 두려워했다고 루카는 전합니다.(9,45) 어쩌면 “이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 곁에 있으면서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가장 큰 사람(9,46-48)

 

이제 장면이 바뀝니다. 제자들이 서로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인가 하고 다툽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속마음을 헤아리시고는 어린이 하나를 불러 곁에 세우십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9,46-48)

 

제자들의 자리다툼과는 무관한 듯한 예수님의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중요한 것은 자리가 아니라 예수님을 받아들이듯이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또한 예수님을 보내신 분 곧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달리 말해서,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를 만나느냐가 아니라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서 예수님을 보는 것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예수님을 보듯이 그렇게 사람을 섬기라는 말씀으로 이해하면 어떨까요?

 

이 말씀에 이어 비로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9,48) 제자들은 머쓱했을 것입니다.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9,49-50)

 

그런데 요한이 나섭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봤는데, 자기들과 함께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어서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아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십니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9,50)

 

이 짧은 이야기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깊이 생각하기를 요구합니다. 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낸다면 그 사람은 좋은 일을 하는 걸까요, 나쁜 일을 하는 걸까요? 당연히 좋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누가 좋은 일을 하는데 나와 같은 편이 되어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을 좋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라고요? 아니라고 자신 있게 대답하시는 분은 정말 존경할 만한 분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그 사람이 하는 일, 그 사람의 행동 자체를 보고 판단하기보다는 나와 상관이 있느냐 혹은 우리 편이냐 아니냐를 두고 판단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어떤 사람이 하는 일 자체가 아니라 편을 갈라놓고 사람을 평하는 태도에 대해 일침을 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를 반대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섣부른 생각입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라는 넓은 마음을 때때로 지닐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생각해 봅시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 곁에 있으면서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9,41)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아이를 고쳐 주지 못했다면서 예수님께 아들을 고쳐 달라고 부르짖었을 때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은 어쩌면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요 참 하느님의 아들이시라고 믿고 고백해서 그리스도 신자가 되었지만, 실제 삶에서는 그 믿음을 드러내기보다는 믿음의 표징을 보여 달라고 청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아, 믿음이 없고 …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이 곁에 계시지 않아도 곁에 계시는 것과 다름없이 믿는 자세가 우리에게 요청된다는 것을 일깨우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참된 믿음, 행복한 믿음은 표징을 보여 주지 않아도 한결같이 믿는 믿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토마스 사도에게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고 하신 그런 믿음 말입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10월 22일,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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