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성경 속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 하까이서, 즈카르야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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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7-11-06 | 조회수4,994 | 추천수0 | |
[성경 속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 하까이서, 즈카르야서
예언자 하까이는?
하까이의 출신지가 어디인지 또 어떻게 예언자로 뽑혔는지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가 바빌론으로 유배가지 않고 계속 유다 땅에 머물러 있던 인물인지 아니면 유배지에서 돌아온 인물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확실한 바는 하까이가 즈카르야 예언자와 더불어 새 성전을 짓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하까이와 즈카르야에 대한 정보는?
에즈라기에 나타납니다. “그때에 하까이 예언자와 이또의 아들 즈카르야 예언자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있는 유다인들에게, 그들 위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느님 이름으로 예언하였다. 그러자 스알티엘의 아들 즈루빠벨과 여호차닥의 아들 예수아가 나서서, 예루살렘에 있는 하느님의 집을 다시 짓기 시작하였다. 그들 곁에서는 하느님의 예언자들이 그들을 도왔다.”(에즈 5,1-2)
하까이의 활동 시기는?
그의 소명 시기뿐 아니라 어떤 동기로 예루살렘 성전 재건축 예언자로 우뚝 서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예언 활동 시기만은 명확합니다. 앞에서 인용한 에즈라기뿐 아니라 하까이 자신이 예언서 첫 구절에서 밝혀주기 때문입니다. “다리우스 임금 제이년 여섯째 달 초하룻날, 주님의 말씀이 하까이 예언자를 통하여 스알티엘의 아들 즈루빠벨 유다 총독과 여호차닥의 아들 예수아 대사제에게 내렸다.”(하까 1,1)
여기서 말하는 ‘다리우스 임금 제이년 여섯째 달 초하룻날’은 기원전 520년 8월29일을 가리킵니다. 그 해는 바빌론의 끌려간 유다인들 중에 일부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지 이미 16~17년이 흘러간 때입니다.
왕국의 멸망과 바빌론으로 유배 간 유다인들의 귀향?
기원전 587년 남부 유다 왕국의 멸망은 선택된 유다민족에게는 가장 치욕적이고 절망적인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유배로 정치지도층의 부재, 종교의 몰락 등으로 사회와 공동체 기반이 무너져버린 것입니다. 그 절망의 정점은 삶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였습니다. 선택된 민족의 바탕인 경신예배의 중심축이 주저앉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때?
신바빌론 제국을 무너뜨리고 고대 근동의 새로운 패권자가 된 페르시아의 키로스 임금의 등장으로 이스라엘민족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희망의 빛을 보게 됩니다. 때는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던 기원전 587년으로부터 50년째가 되는 기원전 538년의 일이었습니다. 키로스 칙령을 통하여 바빌론으로 유배 온 유다백성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이렇게 선포한다. 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다. 그리고 유다의 예루살렘에 당신을 위한 집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맡기셨다.”(1,2; 5,14 참조)
하까이의 선포는?
다음 구절이 압축해줍니다. “주님의 집이 무너져 있는데 너희가 지금 판벽으로 된 집에서 살 때냐?”(1,4) 그런데도 백성은 하느님 일은 뒤로 미루고 자신들의 일에만 집중합니다. 복을 내려주시는 하느님, 세상에 복을 내려주시는 주님을 뒷전에 둡니다. 그때 총독 즈루빠벨과 대사제 예수아가 등장합니다. “스알티알의 아들 즈루빠벨과 여호차닥의 아들 예수아 대사제와 나머지 모든 백성은, 주 저희 하느님의 말씀과 주 저희 하느님께서 보내신 하까이 예언자의 말을 잘 들었다. 그리고 백성은 주님을 경외하게 되었다.”(1,12)
주님을 경외하기 시작한 이스라엘은?
하까이의 선포에 힘입어 백성이 주님께 마음을 돌립니다. 이어서 하까이는 백성을 격려합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 주님의 말씀이다.”(1,13ㄴ) 이제 온 백성이 하나 되어 성전 재건을 시작합니다. “주님께서 스알티알의 아들 즈루빠벨 유다 총독의 영과 여호차닥의 아들 예수아 대사제의 영과 나머지 모든 백성의 영을 일으키셨다. 그래서 그들은 가서 저희 하느님, 만군의 주님의 집을 짓는 일을 하였다. 그날은 여섯째 달 스무나흗날이었다.”(1,14-15ㄱ)
예언자는 주님 이름으로 피로에 젖은 백성을 격려합니다. “나의 영이 너희 가운데에 머무를 터이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마라.”(2,5ㄴ) 하까이는 그들에게 주님 말씀을 전하며 용기를 줍니다. “이 집의 새 영광이 이전의 영광보다 더 크리라.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2,9)
예루살렘 성전 재건에 모든 열정을 쏟는 하까이?
예언자는 이와 같이 새 예루살렘 성전 건립에 회의적인 이들, 지쳐있거나 실의에 빠진 이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줌으로써 성전 건립에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왜 하까이는 오로지 하느님 집을 지어야만 복을 받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성전을 건립하는데 몰두하느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하느님을 만나는 곳, 하느님 현존을 체험하는 장소였습니다. 제사와 경신례로써 이스라엘이 그분을 만나는 유일한 곳이 성전이었다고 보면 하까이의 열정을 보다 쉽게 이해하게 됩니다.
예언자 즈카르야?
즈카르야는 하까이와 더불어 성전을 서둘러 짓도록 촉구한 예언자입니다.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유다인들이 폐허가 된 성전을 재건할 엄두도 못 내고 있을 즈음 두 예언자의 독려에 힘입어 기원전 520년 9월21일 성전 재건을 시작합니다(하까 1,14-15ㄱ).
즈카르야서 1-8장까지의 내용은 일관성이 있지만 9장부터는 아주 내용이 다르기 때문에 흔히 제1즈카르야서와 제2즈카르야서로 나눕니다. 9장부터는 예언자의 이름 즈카르야가 등장하지 않으며 예루살렘 성전 건립이 벌써 다 끝났음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성전 건립은 사실 기원전 515년에 가서야 완성됩니다. “나는 내 집 앞에 보초처럼 진을 치고 아무도 오가지 못하게 하리라. 압제자가 다시는 그들을 침범하지 못하리니 내가 직접 지켜 볼 것이기 때문이다.”(9,8)
즈카르야 1-8장은?
여덟 번에 걸쳐 나오는 환시를 중심으로 엮어져있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환시는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마치 허깨비를 보듯, 그렇게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환시는 하느님의 계시를 육신의 눈으로가 아니라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환시는 곧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사실을 영의 눈으로 깨닫는 것입니다.
따라서 환시를 체험하는 이는 무의식 상태에서가 아니라 영적으로 깨어있는 상태에서 그분의 말씀, 그분의 뜻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히브리어에서 환시는 본다는 동사의 명사형 곧 ‘바라봄’을 가리킵니다.
즈카르야의 환시는?
어느 날 하룻밤에 여덟 차례에 걸쳐서 하느님께서 계시해주시는 환시를 체험합니다. 때는 기원전 519년 2~3월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다리우스 제이년 열한째 달, 곧 스밧달 스무나흗날에 주님의 말씀이 이또의 손자이며 베레크야의 아들인 즈카르야 예언자에게 내렸다. 여기서 즈카르야는 이또의 손자이며 베레크야의 아들로 나옵니다. 그런데 에즈라기와 느헤미야기에서는 즈카르야가 이또의 아들로 나옵니다(에즈 5,1; 6,14; 느헤 12,16). 사실 히브리말에서는 ‘아들, 손자’를 같은 용어로 표기합니다.
등잔대와 두 올리브 나무?
다섯 번째 환시(4,1-6ㄱ.11-14)에는 두 올리브 나무가 나옵니다. “나는 그 천사에게 물었다. ‘등잔대 오른쪽과 왼쪽에 있는 올리브 나무 두 그루는 무엇입니까?”(4,11) 대사제 예수아와 총독 즈루빠벨을 칭합니다. 예수아 대사제는 최고의 종교 지도자로서 또 즈루빠벨은 최고의 정치 지도자로서 이들 둘이 손을 맞잡고 이상적인 종교국가를 건설하여 온 백성이 주님 안에 행복을 누리도록 할 책임을 지닌 이들로 이해됩니다. “천사가 ‘이것들은 온 세상의 주님 곁에 서 있는 성별된 두 사람을 뜻한다.’ 하고 말하였다.”(4,14) 그러나 아쉽게도 즈카르야가 꿈꾸던 이상적 ‘종교와 정치’의 이원(二元)지도체제는 훗날 더 이상 성서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7년 11월호,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용현5동성당 주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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