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 히브리어 산책: 네페쉬, 나발, 나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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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7-11-16 | 조회수8,829 | 추천수0 | |
[주원준의 히브리어 산책] 네페쉬, 나발, 나훔 제 깊은 영혼이 하느님을 갈망하나이다
오늘은 히브리어 알파벳 눈으로 시작하는 단어 세 개를 배우며, 히브리어의 독특한 뉘앙스 몇 가지를 맛보기로 하자.
- 네페쉬. 시편에 특히 자주 나오는 말로, 7개 이상의 다양한 뜻으로 옮긴다. 함축적이면서 직관적인 낱말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다.
네페쉬의 일곱 가지 뜻
‘네페쉬’는 본디 목구멍이란 뜻이다.(하바 2,5) 그런데 구약성경은 이 낱말을 적어도 일곱 가지 이상으로 옮긴다.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는 물이 ‘네페쉬까지 차올랐다’고 했는데(요나 2,6) 이때 네페쉬는 ‘목’이다. 아마도 목구멍과 목은 가깝기 때문에 네페쉬가 목을 의미했을 것이다.
목구멍은 숨결이 지나가는 통로이므로 네페쉬는 ‘생명’으로 옮길 때도 있다.(신명 12,24) 하느님이 세상을 지으실 때, “땅은 살아있는 네페쉬를 제 종류대로” 내어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창세 1,24) 이때 네페쉬는 숨 쉬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사람의 숨결은 가슴 깊은 곳에서 흘러나와 말이나 한숨이나 외침을 이룬다. 그래서 네페쉬는 사람의 속, 곧 ‘내면’ 또는 ‘인격’을 의미한다. ‘여자의 맹세’의 유효성을 다루는 민수기 30장을 보면, 한 여자가 스스로 곧 자신의 의지로 한 맹세인지를 제일 먼저 따진다. 이때 ‘그녀의 네페쉬에 따른’ 맹세란 그녀 ‘스스로’ 한 서약이다. 네페쉬에 따라 한 것은 내면의 의지에 따른 것이다.
네페쉬는 그냥 ‘사람’으로도 옮긴다. 창세기를 보면, “야곱에게서 태어난 자식들로 라헬의 자손들”을 언급하는데, “모든 네페쉬는 열네 명이다”(창세 46,22; 또한 46,15.25.27)고 말한다. 사람이란 고유한 내면과 의지를 지닌 존재이니 네페쉬로 사람을 지칭한 것이다.
결국 네페쉬는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영혼’을 의미한다. 오늘 화답송을 보면 ‘저의 네페쉬(영혼)가 당신을 목말라합니다’라는 애원이 후렴구를 이룬다.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서 고통과 갈증을 느낀 한 영혼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경 히브리어는 무척 고대의 언어이기에, 다양하고 전문화된 현대인을 위해서는 이렇게 여러 가지 단어로 옮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와 반대로 히브리어 원문으로 성경을 읽으면 한 단어 한 단어에 의미가 응축되어 있어, 함축적이고 직관적인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그런 언어로 우리 인간에게 말씀하신 하느님의 뜻을 성찰하는 데로 이끈다.
- 나발. 아비가일의 남편(1사무 25장)의 이름이다. ‘어리석은 자’라는 뜻으로 지혜로운 아비가일과 대조되는 인물의 이름이다.
어리석은 나발
나발은 ‘어리석다’는 의미다. 어리석음이란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하느님께 보답하지 못하는 삶을 가리킨다. 그래서 모세는 주님을 경외하는 길에서 일탈한 백성을 ‘나발한(어리석은) 백성’이라고 꾸짖었던 것이다.(신명 32,6.21) 예레미야 예언자는 “올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은 자”도 역시 “끝내는 나발한(어리석은) 자”로 드러나리라고 외쳤다.(예레 17,11)
구약성경에는 지혜롭고 용기 있는 여성이 많이 등장한다. 그 가운데 아비가일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그녀의 남편 이름이 나발이었다. 나발과 아비가일은 여러모로 대조적인 인물이다. “그 여인은 슬기롭고 용모도 아름다웠으나, 남편은 거칠고 행실이 악하였다.”(1사무 25,3) 나발은 아예 그 이름부터 어리석은 자였다. 하지만 아비가일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슬기로운 처녀’ 같은 인물이다.
동정과 용기
- 나훔. 예언자 나훔의 이름을 히브리어로 이렇게 쓴다. ‘위로하는 자’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이 이름은 예언자의 소명을 잘 드러낸다.
나함은 목마른 영혼을 ‘위로한다’는 뜻의 동사다. 그런데 주로 강화형(피엘형)으로 쓰이는 나함은 우리말의 ‘위로하다’와 조금 다르다. 나함은 ‘동정하다’보다는 ‘용기를 북돋다’는 의미가 강하다. 참된 위로는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슬픔을 달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결국 새롭게 삶의 용기를 얻고 일어서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나함의 뜻은 위로의 본질과 목적을 꿰뚫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사야서 40장에 유명한 ‘나함하여라’(위로하여라)로 시작하는 노래가 있다. 유배의 시간이 다하자, 하느님은 그동안 유배에 고생하던 백성에게 새롭게 용기를 북돋고 싶으셨던 것이다. 그래서 이 노래는 단순한 동정과 달램의 노래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미래의 용기를 북돋는 기쁨과 희망의 노래인 것이다. 나함 동사는 소예언자에 속하는 나훔의 이름에도 쓰였다. 나훔은 ‘나함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예언자의 소명이란 백성을 불쌍히 여기면서도 백성에게 참된 용기를 북돋는 것임을 잘 드러내는 이름이다.
* 주원준(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 독일에서 구약학과 고대 근동 언어를 공부한 평신도 신학자다.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주교회의 복음화위원회 위원, 의정부교구 사목평의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7년 11월 12일, 주원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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