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인물] 구약인물과 함께하는 치유여정: 아론의 변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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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7-11-16 | 조회수5,403 | 추천수0 | |
[구약인물과 함께하는 치유여정] 아론의 변명
- ‘아론의 설교’, The Phillip Medhurst에서 발행된 성경 삽화에서.
영성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가장 경계지수를 높여야 하는 순간은 사람들에게 칭송받을 때입니다. 칭송받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요 은총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약한 본성은 좋은 것을 자기 것으로 취하고 그것으로 자신을 크게 만들고자 합니다. 만약 이 본성의 부추김에 지게 되면, 그때부터 은총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아니라 받은 선물을 지키는 일에 급급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의 삶은 더 이상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섬기게 되기 십상입니다. 이 때문에 영성생활을 깊이 하려면 끊임없이 내면을 성찰해야 합니다. 내적인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는 일을 성실히 하지 않으면 길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이번 달 구약인물과 함께 떠나는 치유여정에는 우리 자신의 내적인 자세를 돌아보는 데 도움이 되는 사건과 인물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다룰 사건은 탈출기 32장에 소개된 금송아지 숭배에 관한 것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아주 복잡한 전승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여러 각도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의 전승 역사와는 무관하게 현재의 본문이 배치된 문학적, 역사적 맥락을 존중하며 그 안에서 본문을 읽고자 합니다.
사건의 개요를 간략히 소개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떠나 첫 번째 광야 여정을 거친 후 시나이산 산기슭에 당도합니다(탈출기 19장). 이곳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습니다. 이 계약은 조건이 달린 계약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온갖 축복을 누리려면 십계명과 계약 법전에 담긴 규정과 계명들을 지켜야 합니다. 백성들의 자발적인 동의로 계약은 체결되었고, 이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현존하시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현존은 그들에게 필요한 평화와 보호, 안전과 안정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이것이 시나이 계약의 혜택입니다. 그런데, 거룩하신 하느님을 그들 가운데 모시려면 그분의 현존을 모시기에 합당한 장소를 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 가운데 세워지게 될 성막입니다. 성막은 그 거룩함으로 인하여 인간이 정한 기준이 아니라 하느님의 기준에 따라, 곧 하느님이 보여주신 모형에 따라 지어져야 합니다. 모세가 산 위에 올라간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는 하느님이 손수 새겨주신 증언판과 성막과 성막에서 사용될 기물들의 모형을 받기 위하여 산에 올랐습니다(탈출 25-31장 참조).
성경은 그가 시나이산 위에서 사십 주야를 지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산 아래에서 기다리는 백성들로서는 그가 언제 내려올지 알 수 없었습니다. 모세의 부재로 백성들은 ‘약속의 땅에 이르는 구원 계획 전체’에 의심을 품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우리가 제대로 가고 있는가?’ ‘그간의 모든 고생들이 헛된 것은 아니었나?’ ‘하느님과의 계약은 그저 뜬구름 같은 것 아닌가?’ 백성들은 그들이 믿고 기대하는 바가 눈에 보이는 확실한 것이기를 원하였습니다. 미래에 대한 약속이나 보증만으로는 그것을 믿기에 충분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체험하였던 하느님의 기적과 돌보심도 그들이 확고한 믿음을 갖기에는 역부족이었나봅니다. 백성들은 모세를 대신하여 그들을 이끌고 있는 아론에게 이렇게 요구합니다. “일어나, 앞장서서 우리를 이끄실 신을 만들어 주십시오.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온 저 모세라는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탈출 32,1)
- ‘금송아지의 죄악’, 프리다 헤일, 네덜란드.
백성들의 요구는 모세와 모세를 통하여 그들을 인도하고 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명백한 불신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아론은 백성을 책망하지도 않았고,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려고 애쓰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백성들에게 금 귀고리들을 거두어 녹인 후 모형 틀에 부어 수송아지 상을 만듭니다. 백성들은 이 수송아지 상을 보고 “이스라엘아, 이분이 너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너의 신이시다.”라고 외칩니다(32,4). 백성들의 이 외침을 주의깊게 살펴봅시다. 그들이 만든 수송아지 상은 다름이 아니라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주신 야훼 하느님의 신상입니다. 전승의 역사를 고려하면 물론 이 수송아지 상은 신의 발판으로 만들어진 것이지 신상 자체는 아닙니다만 현재의 문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행위가 명백한 계약 위반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십계명의 규정을 위반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막 체결한 하느님과의 계약을 파기하게 될 수도 있는 이 위험한 시도를 왜 아론은 막지 않았을까요? 아론은 백성들의 반응을 보고 이 신상 앞에 제단을 쌓은 뒤, 주님(야훼)을 위한 축제를 지내자고 백성들을 초대합니다. 새날이 밝자 그들은 아침 일찍부터 그 제단 위에 번제물과 친교 제물을 바치고, 음식을 나누며 축제를 지냈습니다. 모든 것이 좋아 보였고, 다 잘 되어 가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만 그러하였습니다. 수송아지 상도, 제단도 하느님을 위하여 만들었지만 어느 것 하나도 하느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좋아하는 것이었고, 아무도 그들이 만든 것을 하느님께서 인준해주시기를 청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무엇을 원하고 바라시는지 관심도 갖지 않았습니다.
산 아래로 내려와 상황을 목격한 모세는 하느님이 손수 새겨 주신 증언판을 깨트려버립니다. 백성들의 계약 파기 행위로 증언판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심각한 계약위반 상황을 되돌리기 위하여 모세는 분투노력합니다. 먼저 수송아지 상을 제거하고, 이어서 아론을 문책합니다. “이 백성이 형님에게 어떻게 하였기에, 그들에게 이렇게 큰 죄악을 끌어들였습니까?”(탈출 32,21) 이 질문에 대한 아론의 대답은 우리 자신을 성찰해볼 수 있는 훌륭한 거울이 됩니다. 아론은 먼저, 이 상황의 모든 탓을 자신이 아니라 ‘악으로 기울어져 있는 백성’에게 돌립니다. 물론 지도자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백성들이 타락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백성들의 타락에 협력하는 자가 아니라 그들을 끝까지 주님의 길로 이끌어야 하는 자입니다. 하느님께서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하신 말씀처럼, 백성이 그를 따르게 해야지 그가 백성을 따라서는 안 됩니다(예레 15,19 참조).
우리로서는 아론의 진짜 동기를 알아낼 수 없습니다. 다만 짐작해볼 수 있을 따름입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권위의 근거를 하느님께 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보내는 찬사와 호의에 두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될 때 그의 판단을 움직이는 주된 동기는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백성들의 인기가 되며, 따라서 그의 에너지의 대부분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미지를 관리하는 데 쓰이게 될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가 너무나 중요하게 여겨져서 자신의 본모습을 받아들일 수도 사랑할 수도 없게 됩니다. 그는 더 이상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라 자기가 만든 이미지의 노예가 되어, 이 이미지가 요구하는 대로 행동하는 연극배우처럼 살아갈 것입니다. 이런 지경에 이르면 잘못을 시인하기도 어렵고, 자신이 원인이 된 문제의 책임도 지려 하지 않습니다. 자기 이미지를 손상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론은 수송아지 상을 주조하여 만든 일에 대하여 어떤 책임도 지려 하지 않습니다. 백성들이 신을 만들어 달라고 하기에 금을 거두어 불속에 던졌더니 수송아지가 나왔다고 변명합니다(32,23-24). 모든 책임은 백성에게 있고, 수송아지 상을 만든 것도 불의 탓으로 돌립니다.
지도자에게는 의사결정권이나 인사명령권과 같은 권한이 보장됩니다. 이것은 권위에 따라 주어지는 일종의 혜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권위에는 혜택만이 아니라 책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도자는 그 권위로 인하여 공동체 내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에 대외적인 책임을 집니다. 아론은 올바른 권위를 행사할 수 있을 만큼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미지를 손상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선택을 할 수 없었습니다. 잘못을 시인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훨씬 더 성숙한 지도자의 모습일 텐데 그는 그 길을 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의 거울 앞으로 돌아오고자 합니다. 허상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본모습을 보려고 합니다. 거기 허약하고 소심하며 비겁하고 속기 쉬우며 게으르고 무심한 나를 마주합니다. 동시에 진리로 자유롭게 되어 춤추는 나, 주님의 눈길로 빛나는 나를 그 거울 앞에서 다시 만납니다. 이로써 참된 나를 만나는 여정은 조금씩 더 깊어집니다.
* 김영선 -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소속 수도자로, 현재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월간 생활성서, 2017년 11월호, 김영선 수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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