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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물]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자캐오의 진심이 이끈 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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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7-11-25 조회수7,116 추천수0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자캐오의 진심이 이끈 은총

 

 

세관장 자캐오는 예리코에 살았다

 

자캐오(루카 19,1-10 참조)는 ‘깨끗한’, ‘순수한’이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자카이’를 그리스어로 발음한 것이다. 그는 그 당시 유다인들에게 로마의 앞잡이 정도로 멸시받았던 세리들을 거느린 세관장이었다.

 

세관장은 권력과 부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이쯤 되면 그의 이름이 혹시 언어 유희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곧, ‘세리 자캐오가 순수하고 깨끗한가?’라고 말이다.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은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다. 로마는 세금 제도가 많이 발달한 나라였는데 자국뿐 아니라 속국까지도 세금 제도를 잘 이용하여 영토를 방어하며 사회의 공공질서를 유지하였다. 예수님께 올가미를 덮어씌울 구실로 ‘황제에게 세금을 내야 하는가?’ 하는 바리사이들의 질문에서도 세금 제도가 그들에게 미친 영향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마태 22,15-22).

 

로마는 식민지를 효율적으로 통치하려고 현지 유다인 세리를 선택하여 자신들이 정한 세금만 받고 그 이외에 세리들이 얼마를 걷는지에 대해서는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이런 점이 세리들의 착복을 더 유발했다.

 

세리들이 요한 세례자에게 세례를 받으러 왔을 때 그는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루카 3,13)하고 말했다. 세리가 해야 할 회개는 정해진 세금보다 더 받지 않는 것이었다. 세리의 부패는 그토록 일반화되어 있었다.

 

 

부자 자캐오가 돈으로 살 수 없던 것

 

자캐오가 살던 예리코는 오래된 도시였는데, 현대 고고학계에서는 만 년 전에 이미 그곳에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구약 성경에는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예리코성을 함락시킨 이야기가 있는데 성의 함락이 일반적인 전투를 통한 것이 아니기에 인상이 깊다(여호 2-6장 참조).

 

신명기에서는 이 도시를 “야자나무 성읍 예리코”(신명 34,3)라고 표현하는데, 야자나무가 많이 자랄 정도로 물이 많은 곳이다.

 

열왕기 하권에서는 수질이 안 좋아진 예리코 근처 샘을 엘리사가 정화한 일화를 상세히 전하고 있다(2,18-22).

 

신약 시대에 예리코는 무척 인기가 있었다. 로마의 안토니우스는 연인 클레오파트라에게 예리코를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헤로데 임금도 예리코에 아름다운 궁전을 지어 살다가 그곳에서 죽었다고 전해진다.

 

예리코의 지형적 표현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9-37)에서 잘 드러난다. 예수님께서는 비유의 첫마디를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고 하신다. 이는 높은 산 위에 세워진 예루살렘에서 내려가는 가장 낮은 지대에 예리코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예루살렘과 예리코를 잇는 좁은 도로는 강도들이 들끓었고, 또 예루살렘 성전에서 근무하던 사제와 레위인이 예리코에 많이 살았다고 한다. 예리코는 한마디로 부유한 도시였고, 그곳 세관장이 자캐오였다.

 

유다인들은 동족을 괴롭히는 이런 부패한 세리들을 아주 천대했다. 그들에게 세리들은 로마 제국의 하수인이며 나라의 배신자들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을 이방인이나 죄인들과 같은 부류로 취급하여 유다 사회에서 철저히 배척했다. 세관장 자캐오는 당연히 여느 세리보다 더했을 것이다.

 

종교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에서 그에게 돌아온 건 죄인이라는 ‘불명예’였다. 그는 돈과 권력을 가졌지만,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명예’를 잃었다.

 

그리고 공공연히 드러내어, 아니면 이른바 ‘은따’(은근히 따돌리는 것.)의 형태로 그는 소외당했을 것이다. 경멸의 대상이 된 자캐오는 심리적으로도 매우 위축되고 외롭게 살았을 것이다.

 

그가 축적한 돈은 부정한 돈으로 간주되어 유다 공동체를 위해서 쉽게 사용할 수도 없었다. 그러기에 그 누구보다 자신의 명예를 되찾고 유다 공동체에 다시 속하고 싶었을 것이다.

 

 

무화과나무 위에서 카이로스가 될 때

 

당시 예리코는 상업적 교류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는 길목이었기에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다. 그래서 각 지역의 사람들이 가져온 온갖 소문도 함께 들을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서 예리코를 지나가신다는 것이다. 소문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병든 사람들을 무료로 고쳐 주실 뿐만 아니라 이른바 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과도 접촉하신다는 것이다.

 

그중 자캐오를 가장 놀라게 한 소식은 세리 가운데 하나인 마태오(마태 9,9)를 그분의 제자로 발탁했다는 사실이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그토록 천대하는 세리를 제자로 삼다니! 실로 일상을 넘어선 행동이었다. 자캐오는 그같이 대범하고 넓은 사고를 지니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꼭 보고 싶었다.

 

예수님을 보고 싶은 자캐오의 열망은 그를 거리에 나오게 했다. 세관장인 자신도 혹시 받아 주실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수많은 사람이 이미 길거리에 나와 있었다.

 

그런데 기회가 왔건만 키가 작아 그분을 온전히 볼 수가 없었다. 그분을 보고 싶은 열망이 체면보다 앞섰던 그는 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갔다. 그곳에서는 다른 사람의 눈치도 보지 않고 편히 그분을 바라볼 수 있으니까.

 

나무 위의 세상에서는 자캐오가 가장 컸다. 그분을 중심으로 수많은 사람이 걸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갑자기 자캐오는 자신을 바라보는 어떤 시선을 느꼈다.

 

아뿔싸! 이를 어쩌나? 예수님께서 자신을 바라보고 계셨다. 그런데 자캐오를 더 당황스럽게 한 것은 그가 마주친 눈이 예수님의 눈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을 따라오던 사람들의 눈도 일제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태껏 자신을 경멸해 왔던 사람들을 피해 왔는데 이렇게 한순간 그들의 시선 앞에 자신이 노출되어 있었다. 마치 둥근 원 가운데 있는 점처럼 말이다. 순간 긴 정적이 흘렀다.

 

그런데 자캐오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눈빛은 아침 호수처럼 고요한 정적을 담고 있었다. 그 눈빛엔 경멸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예수님과 눈이 마주친 순간은 자캐오의 시간을 ‘크로노스’에서 ‘카이로스’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시간을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로 구분하여 사용하였다. 크로노스는 일상적인 시간을 의미하지만, 카이로스는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시간, 곧 기회이다.

 

자캐오에게도 기회가 왔다. 예수님께서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19,5)며 기회를 주셨다. 카이로스는 기회이지만 놓치면 다시는 붙잡을 수 없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는 이 카이로스를 잽싸게 붙잡았다. 사람들의 이목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게 해 준 그 생명의 무화과나무에서 얼른 내려왔다.

 

 

청렴결백한 세관장, 못 대신 심은 꽃

 

한국 사람은 관계를 더 발전시키고자 자주 식사를 함께하자고 제의한다. ‘함께 식사하자.’는 말은 ‘우리 서로 좀 친해 보자.’라는 말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도 소외당한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심으로써 친교의 교제를 하셨다.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루카 7,34)라는 표현은 그 당시 예수님의 행적을 잘 드러내 준다.

 

예수님이 혹시 메시아이실지 모른다는 기대를 안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던 군중에게 죄인 자캐오의 집에 들어가는 것은 이른바 부정을 탈 수 있는 행위이다. 그러기에 ‘죄인의 집’에 들어가신다는 사람들의 투덜거림은 당연한 반응일 수도 있다.

 

아마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 주신 예수님과 함께한 식탁은 자캐오의 생애에서 가장 고맙고 은혜로운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분은 많은 유다인에게 미움을 받던 세리를 제자로 삼을 정도로 열려 있는 분이셨기 때문이다. 그날 그 시간 자캐오는 한 시인의 말처럼 ‘마음속에 박힌 못을 뽑아 그 자리에 꽃을 심었다’(정호승의 시 ‘꽃’ 참조).

 

자캐오는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라고 했다(루카 19,8).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신 예수님께 그는 아무것도 아깝지 않았다.

 

사실 아무리 부자라도 재산의 반을 내놓기는 쉽지 않다. 그는 실로 복음 말씀처럼 ‘바늘귀를 빠져나간 부자’이다.

 

예수님의 현존 속에 은총으로 충만해진 그는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19,9)라고 했다. 율법에 따르면, 다른 사람의 재산에 손해를 끼쳤다면 5분의 1만 배상하면 된다.

 

그런데 네 곱절이라니! 왜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가? 자캐오는 ‘횡령하였다면’이라고 했다. 이 말은 자캐오가 그동안 정직하게 살아왔음을 말한다. 믿든지 말든지 간에 그는 남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횡령에 대해 청렴결백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도 “아브라함의 자손”(루카 19,9)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가 그 공동체에 속한 사람임을 상기시켜 주신다.

 

이 자캐오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하며, 무엇보다 타인을 판단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살피는 것이 인생의 지혜라고 말해 준다.

 

* 허귀희 클라라 -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전교 수녀회 수녀. 예수회 영성 센터에서 ‘성경과 영성’을 가르치며, 성경의 학문적이고 영성적 의미를 통합하고자 연구하고 있다. 미국 엘름스대학교에서 종교학과 신학을 전공하고, 가톨릭대학교에서 성서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7년 11월호, 허귀희 클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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