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인물] 성경의 세계: 므나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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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7-11-28 | 조회수5,465 | 추천수0 | |
[성경의 세계] 므나쎄 (1)
므나쎄(Manasseh)는 유다 14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BC 696~642년. 북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를 통틀어 가장 오랫동안 임금으로 있었다(55년). 열왕기와 역대기는 악한 왕으로 평가한다. 그의 범죄로 유다와 예루살렘이 망하게 되었다고 했을 정도다(2열왕 21,11). 하지만 역사적 평가는 다르다. 현실의 흐름에 냉철하게 적응했던 왕으로 판단한다. 그의 치세 동안 아시리아의 침략은 없었다. 철저히 순응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피폐했던 유다는 일어설 수 있었다.
구약성경 편집은 바빌론 유배 때 시작된다. 민족의 정체성을 다시 찾자는 작업이었다. 주축은 제관 계급으로 전승 사료(史料)와 구전(口傳)이 자료다. 그들의 역사관은 왕의 평가에서 드러난다. 치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다. 전통신앙 옹호로 판단했다. 업적이 뛰어나도 우상숭배를 허락했다면 악한 왕이었다. 공적이 약해도 주님께 충실했다면 선한 왕이었다. 북이스라엘 최전성기를 구현했던 아합은 그런 이유로 사악한 왕으로 기록되었다.
므나쎄의 할아버지는 아하즈다. 당시 아시리아는 가나안 땅을 무력으로 눌렀다. 아하즈는 왕궁의 보물을 바치며 속국을 자청한다(2열왕 16,7). 안정을 위해서였다. 군사력으론 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나라는 평온했다. 매년 조공을 바쳐도 아시리아 그늘에서 국력을 키울 수 있었다. 아하즈 아들 히즈키야 때 북쪽은 멸망한다. 수도 사마리아엔 이방인이 들어왔다. 그들과 어울리길 거부했던 주민들은 남쪽으로 이주했다. 숫자가 만만치 않았다. 유다는 서서히 강해졌다. 북쪽 땅을 회복해 예전 영화를 찾자는 민족주의가 득세했다. 히즈키야는 편승한다. 산당 제사를 금지시키고 예루살렘에서만 제사 지내게 했다. 제관 계급은 힘을 실어줬다.
히즈키야는 서서히 아시리아에 반발한다(2열왕 18,7). 이집트와 손잡고 속국에서 벗어나려 했다. 아시리아는 보복에 나선다. 유다 땅을 초토화하며 예루살렘을 포위한 것이다. 히즈키야가 엄청난 배상금을 바치자 겨우 풀어줬다(2열왕 18,14). 이후 왕의 권위는 추락했고 병으로 죽었다. 후임자가 므나쎄다. 그는 즉시 속국을 인정하며 철저한 순종을 약속했다. 출토된 아시리아 기록엔 공물을 바친 군주로 이름이 올라있다. 이집트 정벌에 종군했다는 기록도 있다. 확실하게 아시리아 정책을 수행한 것이다. 그 보답으로 조공은 줄었고 안전은 보장되었다. 이렇게 해서 므나쎄는 55년이란 긴 세월 동안 전쟁 없이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왕국 재건과 평화라는 두 토끼를 잡은 셈이다. 하지만 역대기는 악한 왕으로 평가했다. [2017년 11월 26일 그리스도왕 대축일(연중 제34주일 · 성서 주간) 가톨릭마산 12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의령본당 주임)]
[성경의 세계] 므나쎄 (2)
열왕기는 므나쎄 왕이 산당을 복구하고 바알 제단과 아세라 목상을 세웠다고 전한다. 놀라운 변신이다. 앞선 임금 히즈키야는 산당을 없앴고 모세의 구리 뱀까지 버렸다. 기적의 상징으로 보존해 왔던 물건인데도 없앴다. 민중이 그 앞에서 절하기에 우상숭배로 간주한 것이다. 제관들은 히즈키야에 적극 동조했다. 그리고 마침내 아시리아에 맞서 자주권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즉각 보복 당한다(2열왕 18,14). 유다왕국은 순금 30탈렌트를 바치며 화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1탈렌트는 대략 30kg. 금 1돈(3.75g)을 17만 원으로 치면 400억이 넘는 돈이다. 허리가 휘는 지출이었을 것이다. 임금의 자존심은 무너졌고 병을 얻은 히즈키야는 그 여파로 죽었다.
므나쎄는 반대의 길을 택했다. 그러자 제관들은 멀어졌고 민중과 토속신앙이 다가왔다. 왕은 하늘 군대를 경배하고 그들을 위한 제단까지 성전 뜰에 지었다고 했다(2열왕 21,5). 하늘 군대는 아시리아가 섬기던 일월성신(日月星辰)을 가리킨다. 이방신을 예루살렘 성전에 들여온 것이다. 철저하게 아시리아 편에 섰다는 기록이다. 제관들에겐 우상숭배요, 성전 모독이었다. 북쪽 땅을 되찾자는 이들에겐 치욕이요, 분노였다. 이들은 반발했을 것이다. 그들을 진압하며 숙청했다는 암시가 열왕기에 있다. 무죄한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예루살렘 끝에서 끝까지 채워졌다는 기록이다(2열왕 21,16). 히즈키야 때부터 재야세력 지주였던 이사야 예언자도 이때 살해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므나쎄는 아시리아를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그들의 강한 힘을 인정하며 실익을 챙기는 게 현실적이라 판단했다. 아시리아 종교를 받아들이고 성전 뜰에 제단을 세운 이유다. 그러자 민중의 산당 제사도 살아났다. 므나쎄는 모른체했다. 결국 그의 손자 요시야 때 유다는 속국에서 벗어난다. 므나쎄가 일으킨 경제적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가 죽자 아들 아몬이 왕이 된다. 22세였다(2열왕 21,19). 므나쎄는 55년간 왕으로 있었다. 왕자들이 많았을 것이다. 누군가 쿠데타를 일으켰고 아몬은 2년 만에 살해된다. 하지만 쿠데타 세력은 집권에 실패했고 아몬의 8세 아들 요시야가 뒤를 이었다. 유다 16대 임금이다. 아시리아가 섬겼던 일월성신은 해와 달과 별이다. 고대 근동에선 하늘에 일곱 천체가 있다고 여겼다. 태양과 달 그리고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으로 불리는 다섯 별이다. 이곳에 신이 살면서 인간세계를 지배한다고 믿었다. 그런 이유로 칠 일을 돌아가며 제사 지냈다. 오늘은 해신의 날, 내일은 별신의 날 이런 식이었다. 이 관습이 훗날 일주일 체제의 출발이 된다. [2017년 12월 3일 대림 제1주일 가톨릭마산 12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의령본당 주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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