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구약 성경 다시 읽기: 구약 성경 다시 읽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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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1-10 | 조회수13,640 | 추천수0 | |
[구약 성경 다시 읽기] 구약 성경 다시 읽기
성경을 주제로 한 원고를 청탁받고, 한동안 이런저런 고민을 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교우분들에게 도움이 될까?’ 성경을 펼쳐 목차를 천천히 훑어보다가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어라. 구약 성경이 신약 성경보다 딱 네 배가 기네.’
딱딱하고 어려운 구약 성경
구약 성경은 성경 전체 분량의 무려 8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단순히 구약이 신약보다 더 중요하다거나, 구약 성경을 신약 성경보다 더 많이 읽고 묵상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신약 성경보다 네 배나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구약 성경을 우리가 신약 성경을 대하는 것과 적어도 ‘비슷한 정도’의 애정과 관심으로 대하고 있는지는 한 번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미사를 마치고 교우들과 대화하다보면 그날 복음은 기억해도 제1독서는 아예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왜일까요? 예수님에 대해 전해주는 복음말씀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날의 독서가 내겐 그다지 와 닿지 않는 이스라엘의 한 토막 과거사였기 때문일까요? 한편 성경 필사를 창세기부터 잘 하시다가 탈출기의 법 규정들 대목에 와서 힘들어하는 분도 종종 봅니다. “너는 아카시아 나무로 상을 만들어라. 그 길이는 두 암마, 너비는 한 암마 ….” 이런 생각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지금 이걸 왜 쓰고 있는 거지?’
구약 성경은 기본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신앙 체험을 담고 있습니다. 지금 내게 예수님께서 직접 하시는 말씀으로 들려오는 친근한 복음서에 비하면, 구약 성경은 좀 멀게 느껴지고 때로는 딱딱하고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지요.
이해하기 힘든 ‘구약의 하느님’?
“내가 창조한 사람들을 이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 … 내가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스럽구나!”(창세 6,7)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남자와 여자, 아이와 젖먹이, 소 떼와 양 떼, 낙타와 나귀를 다 죽여야 한다.’”(1사무 15,2-3)
모든 인간과 피조물을 잔인하게 수장시켜 전멸시키려 하신 하느님, 정복한 도시의 부녀자와 어린 젖먹이들까지 모두 죽여 없애라 하신 하느님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 시대 직후, 마르치온(Marcion, A.D. 85-160)은 구약 성경이 말하는 ‘정의를 내세우고 벌하는 하느님’은 도저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알려주신 ‘자비로운 하느님’일 수가 없음을 주장하는 이단 종파를 이끌었습니다. 그렇게 신·구약을 분리하고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부정했던 마르치온은 결국 왜곡된 그리스도론에 빠져 교회를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20세기 들어 소위 ‘신(新)마르치온주의’ 학자들은 구약을 평가절하하고 그리스도교와 성경에서 구약을 지워버리자고 주장했고, 신약 성경으로부터 유대교적 색채를 지우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신약과 구약에 있어서 하느님 계획의 단일성을 단 한순간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구약 성경은 하느님께 대한 숭고한 가르침과 인간의 삶에 대한 유익한 지혜와 기도의 탁월한 보화를 간직하고 있으며, 우리 구원의 신비가 감추어져 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22항) “구약은 신약을 준비하며 신약은 구약을 완성한다. 둘은 서로를 밝혀주며 모두 다 참된 하느님의 말씀이다.”(같은 책 140항)
구약 성경의 어떤 구절들이 하느님의 불의함과 무자비함을 보여준다고 여겨진다면, 그런 하느님의 모습에 실망하기 이전에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과연 내가 이 성경 본문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는가?’라는 객관적이고도 신중한 물음입니다. 사실 누군가가 그렇게 쉽게 걸려 넘어질 ‘위험한’ 내용이었다면, 깊은 신앙을 갖고 있던 성경 저자들은 그 이야기들을 아예 빼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이 이 이야기들을 단순히 실제로 있었던 사실의 기술이라고만 보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다음 호에서 다루고자 하는 내용입니다만, 역사에 대한 고대인들과 현대인들의 견해는 전혀 다릅니다. 현대인들은 객관적인 사실(fact)을 무척 중시하지만 고대인들은 역사를 기술할 때 사실보다는 진리(truth)를, 즉 그들이 조상들로부터 전해들은 신앙의 유산과 자신들이 믿고 있는 신념에 더 큰 관심을 두었습니다. 단순히 말장난이 아닙니다. 성경 저자들은 세월이 지나 이제는 ‘사실’이라고 증명할 방법조차 없는 과거의 일을 억지로 그대로 전달하려 집착하기보다는, 자신들의 믿음과 신학적 성찰을 통해 ‘자신들이 체험했고 알고 있는 하느님’을, 그분에 관한 ‘진실과 진리’를 다양한 문학양식을 빌려 후대에 전달하길 열망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상식과 윤리 기준으로는 도저히 긍정하기 힘든 부분들 때문에 우리가 성급하게 걸려 넘어질 필요가 없습니다. 지혜롭게 성경을 읽는 이들은 성경을 글자 그대로만 이해하고서 내 지식과 기준에 끼워 맞춰 의미를 쉽게 한정지어 버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성령 안에서의 ‘묵상’과 더불어 형제자매들과 독서의 내용을 ‘함께 나누고’ 말씀을 ‘공부’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집트 신부가 준 교훈
예전에 같은 수업을 듣던 이집트 콥트 교회 신부와의 대화가 생각납니다. 은연중에 탈출기 이야기가 대화에 오르자 저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탈출기에서 이집트는 박해와 불신의 표상이고, 하느님은 파라오와 이집트 군대를 바다에 처넣으셨으니까요. 제 표정을 읽었는지 그 친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괜찮아, 우리 신자들은 출애굽 때 하느님께서 하셨던 일들 때문에 우리 조상들이 하느님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해.(탈출 14,4.18 참조) 사실 이스라엘이 하느님 계획에 응답할 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곳도 이집트였고, 이스라엘 왕국이 위험할 때 많이 도와준 것도 이집트였어. 무엇보다 예수님의 성가정이 박해 때 피신했던 곳도 이집트였으니까.” 참 많은 걸 배운 순간이었습니다. 신학생 때부터 부활 성야에 제3독서 후 갈대 바다의 승전가를 화답송으로 부를 때마다 ‘이집트 신자들은 도대체 이걸 어떻게 노래할까?’ 싶었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상상이었는지 깨닫게 된 때였습니다. 내게는 늘 분심들던 한 대목이 누군가에게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된 때였지요.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지만 이집트 콥트 교회 부모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손목에 십자가 문신을 새겨준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신분을 잊지 말라는 뜻이겠지요. 대다수를 차지하는 무슬림들의 차별과 박해는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지만, 이집트 신자들은 목숨을 위협하는 그 박해를 이겨내면서 오늘도 치열하게 신앙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 본문의 의미는 늘 즉각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고대 근동의 어법, 문화와 사고방식에 대한 어느 정도의 친숙함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모르고서 구약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적절한 이해를 위해 필요한 노력 없이는 그 안에 담긴 소중한 의미들이 때로는 오롯이 드러나지 못하는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다음 호부터 우리는 함께 구약 성경으로 대화하려 합니다. 구약의 하느님은 신약의 하느님이시며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그대로 자비로우신 아버지이십니다.
* 이번 호부터 새로 연재되는 ‘구약 성경 다시 읽기’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강수원 신부님은 로마 교황청 성서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월간빛, 2018년 1월호, 강수원 베드로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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