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인물] 성경 속 사람들의 이야기: 카인과 아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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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2-05 | 조회수9,746 | 추천수1 | |
[성경 속 사람들의 이야기] 카인과 아벨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인류의 이야기는 카인과 아벨 이야기(창세 4,1-16), 곧 형제살해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형제를 죽이고 자리를 차지한다는 주제는 고대 영웅들의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 중의 하나입니다. 고대 로마를 건설했다는 로물루스도 자신의 형제인 레무스를 죽이고 도시를 세웠다고 합니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도 이러한 과정으로 이해해야 할까요? 권력을 위한 싸움 또는 하느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한 경쟁 과정에서 발생한 폭력의 문제일까요?
이 이야기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누가 이야기의 중심인물인가 이해해야 합니다.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이끄는 인물은 카인과 하느님입니다. 아벨(헛됨, 미풍, 가느다란 숨)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지나가는 조연일 뿐입니다. 카인(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얻은 아들)이야말로 하느님과 대화하고 부딪히고 행동하는 중심인물입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카인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이야기는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는 데서 시작합니다. 카인은 땅의 소출을, 아벨은 양떼 가운데서 맏배들과 굳기름을 바쳤다고 합니다. 아벨은 좋은 것을 바치고 카인은 나쁜 것을 바쳤다고 쉽게 생각하지만, 성경은 그들이 바친 제물의 질(質)에 대해 어떤 비교나 판단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단지 하느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아들이시고(‘굽어보시고’) 카인 쪽은 받아들이지 않으셨다고 할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제물을 받아들이고 마는 것은 하느님의 자유에 속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의 정성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유로운 선택이 우선된다는 것입니다.
카인의 잘못이 여기서 생겨납니다. 카인은 하느님의 자유로운 선택이 자신의 의지와 뜻과 맞지 않는다고 화를 냅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자로서 주(主)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나를 따라오는 하느님, 내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하느님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런 카인에게 경고하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창세 4,7) ‘옳게 행동하라!’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에 따르는 자가 되라는 충고입니다. 이는 또한 카인을 지키고자 하는 하느님의 의지를 드러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카인은 하느님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뜻대로 합니다. 아벨을 들로 나가자고 불러냅니다. 그리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 카인이 자기 아우 아벨에게 달려들어 그를 죽였다.”(4,8) 간단하게 묘사되었지만, 너무나도 참혹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무도 없는 곳, 오직 둘만 있는 곳, 그래서 형제로서 서로 더 의지해야 할 그 들판 한 가운데서 살인의 폭력이 행해졌습니다.
하느님께서 다시 개입하십니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4,9ㄱ) 이 질문은 에덴동산에서 금단의 열매를 먹고 숨은 아담을 찾을 때 하신 말씀, “너 어디 있느냐?”(3,9)의 다른 표현입니다. 죄를 지은 이를 찾는 말이며, 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 말이며, 또한 회개로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곧 당신께로 나아오라는 초대의 말입니다.
그러나 카인은 아버지를 그대로 닮았습니다. 책임지지 않고 뉘우치지 않던 아담처럼 그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4,9ㄴ) 거짓과 무책임의 말입니다. 이제 에덴의 남자와 여자와 같은 길을 카인도 걷습니다. 아담이 자신의 출발점인 땅과의 관계가 끊어졌듯이, ‘땅을 부치던 농부’(4,3) 카인도 ‘땅에서 쫓겨나’(4,11)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4,12.14)가 됩니다. 더 나아가 카인은 이제 하느님 앞에서도 살지 못합니다. 그는 ‘하느님 앞에서 물러나’(4,16) 다른 곳으로 옮겨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끝까지 그와의 관계를 끊지 않으십니다. 형제를 죽이고 책임마저 회피하는 그를 찾아와 대화하시며, 그의 죄를 깨우쳐주십니다. 그때에 카인은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 지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목숨이 위험함을 하느님께 호소합니다. “만나는 자마다 저를 죽이려 할 것입니다.”(4,14). 하느님은 비록 카인을 땅에서 쫓아내는 형벌을 내리시지만, 그를 보호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그를 해치지 못하게 하는 ‘표’(4,15)까지 찍어주십니다. 하느님의 카인을 향한 관심은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표’을 받은 카인에게도 자녀의 축복이 계속 이어집니다. 뒤따르는 ‘카인의 자손’(4,17-22)은 하느님께서 카인과의 관계를 계속 이어가심을 보여주는 단서입니다.
성경은 십계명에서 말하듯이 모든 살인에 분명하게 반대합니다. 어떤 형태로든 다른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모든 행위를 단죄합니다. 예수님은 아예 모욕조차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1-28).
살인, 상해, 사형제도만이 아니라 형제-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말과 행동은 생명의 원천에서 스스로 자신을 떼어놓는 행위입니다. ‘저런 놈들은 죽어 마땅하다.’는 말조차도 하느님의 뜻과는 맞지 않습니다.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4,7) 카인에게 하시는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주어지는 말씀입니다. 내 마음에 드는 대로가 아니라 하느님 보시기에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 그것이 하느님 앞에 똑바로 서는 길입니다.
[2018년 2월 4일 연중 제5주일 의정부주보 5-6면, 이용권 안드레아 신부(선교사목국 성서사도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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