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예수님 이야기52: 구원과 멸망(루카 13,22-3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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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2-25 | 조회수4,876 | 추천수0 | |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 루카복음 중심으로] (52) 구원과 멸망(루카 13,22-30) 말씀을 듣고 고개만 끄덕이면 미래는 없다
- 구원을 얻으려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말씀을 듣기만 하지 말고 실천해야 한다. 그러나 문이 닫히기 전에 들어가야 한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때다. 회개의 때요, 결단의 때다. 사진은 이집트 시나이산에 있는 천국의 문. 가톨릭평화신문 DB.
그런데 어떤 사람이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묻습니다.(13,23)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숫자에 관심이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질문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답변을 하십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13,24) 예수님의 관심은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구원받도록 노력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는 말씀은 구원받도록 열심히 노력하라고 촉구하시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고는 계속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13,24) 많은 사람이 구원받으려고 하겠지만 구원받지 못하리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는 구원받도록 힘써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곧 구원받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은 본문을 계속 살펴보면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그 다음 말씀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3,25) 이 말씀은 집주인이 문을 닫기 전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노력해야겠지만 그 노력 또한 늦기 전에 해야 합니다. 문이 닫히면 소용이 없습니다. 문은 구원의 문을, 집주인은 바로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문이 닫히고 나면 밖에서 사람들이 문을 열어 달라고 갖은 청을 할 것입니다. 집 주인이신 예수님과의 친분을 들먹이면서 말입니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시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13,26)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단호합니다.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인지 모른다.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13,27)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이, 비록 예수님 앞에서 먹고 마시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자리에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곧 구원의 조건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문이 닫히기 전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그 답은 다시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하시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곧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요? 앞에서 예수님 앞에서 먹고 마셨다는 것,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 예수님께서 문을 열어주시는 조건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과 한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구원의 보증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루카 8,21) 사람이어야 구원의 문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만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13,28) 여기서 ‘너희’는 문맥으로 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군중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루카 복음사가가 복음서를 집필했을 때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너희’는 예수님을 배척하고 오히려 십자가형에 처하게 했거나 이를 방조한 이스라엘 백성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성조로 받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된 민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언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이 그릇된 길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오라고 끊임없이 촉구하셨습니다. 마침내 마지막에는 당신의 아들 예수님까지 보내주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님마저 배척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너희만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라는 말씀은,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을 배척한 결과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13,29)이라는 예수님 말씀은 “울며 이를 갈 것”이라는 바로 앞 말씀과 대조됩니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배척해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참여하지 못하는 반면에 이스라엘이 이민족이라고 멸시하던 이방인들, 곧 다른 나라 백성들이 말씀을 듣고 구원의 잔치에 참여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13,30) 자신이 선택된 민족, 하느님께 뽑힌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이스라엘 사람이라도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꼴찌가 되겠지만, 이스라엘이 이방인이라고 천시해 꼴찌에 속하는 이들도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한다면 첫째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구원과 멸망에 관해 루카 복음사가가 전하는 이 대목에서 세 가지 핵심 내용을 뽑을 수 있습니다. 우선 ‘문이 닫히기 전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늦기 전에 회개하고 하느님 말씀을 실천하여 구원을 받도록 하라고 촉구하시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모른다. 물러가라. 악을 일삼는 자들아.’ 이 말씀은 예수님을 안다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들으면서도 실천은 하지 않고 오히려 악을 일삼는다면, 결코 구원받지 못할 것이고 참행복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자인 우리는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됨으로써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이 됐습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 구원의 보증이 되지는 못합니다. 세례를 받아 새로 태어난 만큼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끊임없이 우리 자신의 삶을 성찰하며 회개와 쇄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야고보 서간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 1,22)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될 것’이라는 말씀은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일깨워 줍니다. 제아무리 잘난 사람이라 해도 현재의 자리가 끝까지 보전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뒤떨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현재의 삶에 안주할 때, 우리에게 미래는 없을 것입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2월 25일, 이창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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