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이스라엘의 예언자, 오늘날의 예언자: 고대 근동 세계에서 독특했던 이스라엘의 예언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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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3-23 | 조회수4,965 | 추천수0 | |
[이스라엘의 예언자, 오늘날의 예언자] 고대 근동 세계에서 독특했던 이스라엘의 예언자
이번 호에서는 이스라엘의 예언자들만이 지닌 역사적 특이점을 살펴보려 한다. 오직 하느님께서 주재하셨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 예언자의 ‘역전의 역사’가 있다.
신전의 존경받는 종교인
벤호프에 따르면, 신전은 왕궁보다 훨씬 먼저 건설되었다. 일찍이 문명이 시작된 기원전 33세기부터 신전은 종교적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삶의 중심이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지식인과 정치인, 관리, 군인, 경제인 등이 신전과 얽힌 삶을 살았다. 그리고 신전에는 종교인이 존재했다.
히브리어로 예언자를 ‘나비’라고 하는데, 사실 이 용어는 비교적 후대에 정착된 것이다. 예언자를 가리키는 가장 오래된 이름은 ‘이쉬 엘로힘’ 곧 ‘하느님의 사람’이다. 이 말은 일찍이 모세와(신명 33,1; 여호 14,6 등) 사무엘의 칭호였고(1사무 9,6.8.10), 엘리야와 엘리사도 그렇게 불렸다(1열왕 17,18.24; 2열왕 4장, 7장 등). 또한 ‘선견자’라는 뜻의 ‘로에’(1사무 9,9 등)나 ‘환시가’로 볼 수 있는 ‘호제’(2사무 24,11 등) 등도 있다. 이들은 모두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신전과 관련을 맺었을 것이다.
신명기에 보면 ‘제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는 자’와, ‘점쟁이’와 ‘복술가’와 ‘요술사’와 ‘주술사’, 그리고 ‘주문을 외우는 자’와 ‘혼령이나 혼백을 불러 물어보는 자’와 ‘죽은 자들에게 문의하는 자’ 등을 금하는 규정이 있다(18,10-11). 구체적 정보가 없어서 우리는 이들의 정체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지는 못한다. 다만, 이들이 고대 근동 세계에서는 단순히 ‘미신’으로 치부되지 않았다는 점은 확실하다. 실제로 이들은 특별한 ‘전문 종교인’으로 통했고, 이들을 길러 내는 교육 과정과 교재 등도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고대 근동 세계에서 신전과 관련을 맺고 활동했다. 이렇게 신전은 다양한 종교인들의 무대였다.
특히 수도의 중앙 성전에서는 지배층의 종교인이 활약했다. 그들은 대부분 귀족 출신으로서 좋은 교육을 받았고 넉넉한 생활을 했다. 중앙 성전의 사제들은 국가적 차원의 화려한 번제를 주관했고, 중앙 성전의 예언자들은 다양한 신탁을 통해 왕국의 번영과 왕조의 안녕을 선포했다. 이들은 그 나라의 주류 종교인이었다. 이름만 전하는 ‘다윗의 환시가인 가드 예언자’(2사무 24,11) 같은 이는 아마 임금과 가까운 예언자로서 예루살렘 제1성전에서 활약했을 것이다.
비판적 예언만 남다
이스라엘의 예언자가 지닌 독특한 점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유일하신 하느님의 뜻을 선포하고 실천한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종교사학파의 눈으로 보면 새로운 점이 눈에 띈다. 이스라엘에는 거의 비판적 예언자의 기록만(!) 남아 있다는 점이다.
사실 이스라엘에 이웃한 나라들의 기록을 보면, 정권이나 체제에 비판적이었던 저항 예언자의 존재 자체를 확인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이들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다. 왕실과 가까웠던 궁정 예언자의 기록은 체계적으로 생산되고 보존되었다. 하지만 권력에 비판하고 저항했던 사람들의 기록은 당대에 체계적으로 생산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고대 근동의 작은 나라 이스라엘에서 역전이 일어났다. 오히려 왕권 예언자의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왕실에 저항했으며 왕실과 갈등을 빚었던 예언자의 기록이 훨씬 방대한 분량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두 부류의 비판적 예언자들
이스라엘의 비판적 예언자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티스베 사람 엘리야(1열왕 17,1)와 트코아의 목양업자 아모스(아모 1,1)와 모레셋 사람 미카(미카 1,1) 등 지방 출신들이다. 이들은 가난한 계층의 출신이거나 스스로 가난한 사람들과 가까이 살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권력자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 결과 엘리야는 목숨을 노리는 임금을 피해 도망가야 할 지경이었다(1열왕 19,1-2 참조). 이들은 때로 중앙 성전의 동료 예언자들도 거침없이 비판했다.
둘째는 이사야나 예레미야 등인데, 이들은 예루살렘 중앙 성전에서 활약했다. 이들은 임금이나 고위 관리들과 자주 접촉했다. 하지만 이사야나 예레미야가 현실을 비판하는 구절을 보면 아모스와 미카 못지않게 신랄하다. 곧 이들은 좋은 교육을 받고 중앙에서 활약했지만, 변방의 비판적 예언자들이 외치는 주장에 공감했고, 그들과 ‘코드’가 맞았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히즈키야나 요시야 등 ‘개혁 임금’을 뒷받침했을 것이다.
그 결과 이들은 중앙의 주류 종교인들에게 놀림과 조롱을 받았다(예레 20,7-9 참조). 중앙 성전 사제의 후손인 에제키엘도 이 부류에 들어갈 수 있다. 그는 전갈 떼 가운데에서나 가시가 둘러싸는 상황에서 살았다는 기억을 전한다(에제 2,6 참조).
이집트의 저항 예언자들과 비교
조금 더 들여다보면, 이스라엘의 비판적 예언자들은 그 자체로 독특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이집트 역사를 공부하면 ‘저항 예언자’라는 사람들이 나온다. 그런데 이들은 이스라엘의 저항 예언자들과는 다른 사람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한 왕조가 쇠락기로 접어들면 지방의 호족이나 일부 귀족이 연합하여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일이 잦았다. 그런 왕조의 교체기에 흔히 발흥하는 사람들이 이른바 저항 예언자들이다.
이들은 쇠락기로 접어든 왕조가 이미 운명을 다했고, 새로운 왕조가 도래한다는 신탁을 퍼뜨리는 역할을 맡았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일종의 민심을 조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새로운 왕조가 들어섰을 때, 새 임금과 함께 새로운 종교적 지배자가 되었다.
결국 고대 이집트의 저항 예언자는 ‘새로운 종교적 지배’를 지향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왕권을 노리는 정치적 세력과 은밀하게 또는 공공연히 결탁한 종교인들이다. 이들은 소외된 귀족의 친구라고 할 수 있지만, 가난한 사람의 편에서 정의와 공정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엘리야, 미카, 호세아, 이사야, 예레미야 등은 현재 왕조를 끝내고 새 왕조를 준비하고자 민심을 조종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정권에서 소외된 귀족의 편이 아니라, 새롭게 등장한 변방의 가난한 사람의 시각에서 주님의 정의와 공정을 외치는 사람들이었다.
고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의 활동 양식
이런 독특한 점은 고대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언어와 활동 양식에서도 볼 수 있다. 고대 이집트의 저항 예언자들은 정권의 찬탈을 위해 때로 전쟁이나 쿠데타를 불사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하느님 백성을 깨우치는 일에 전심전력했다. 이들은 때로는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비유나 시적 언어도 다양하게 사용했다. 때로 과감한 상징적 행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들은 이런 노력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정의와 공정을 불러일으키려고 시도했다.
이런 식의 언어와 행동은 중앙의 종교인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중앙의 예언자와 사제는 국가적 차원의 성대한 의례에 어울리는 언어와 행동을 했다. 이들은 크고 화려한 번제나 신탁에서 왕실과 나라의 안녕을 장엄하게 선포하는 일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언어가 우리에게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대체로 형식적이고 체제 친화적이었으며 종교 혼합주의적이었고 당대의 기준으로 보수적인 언어를 사용했다는 점은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한마디로 중앙의 주류 종교인들의 언어는 이웃한 다른 나라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남 왕국이나 북 왕국이나 이런 중앙의 사제와 예언자들은 망국 직전까지 활약하며 중앙 성전을 주물렀을 것이다. 비판적 예언자들은, 가난한 사람이 늘어나고 나라가 망하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형식적으로 나라의 안녕이나 선포하는 그런 예언자들을 ‘거짓 예언자’라 불렀다(예레 28장 참조).
저항 예언자들의 기록만 남은 이유
그런데 어떻게 하여 유독 이스라엘에만 중앙의 주류 예언자들의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비판적 예언자들의 기록만 남게 되었을까? 가장 큰 이유는 망국이었다. 나라가 망한 뒤에, 백성들은 중앙의 주류 종교인들이 설파한 메시지가 거짓이고, 비판적 예언자들의 메시지가 참된 하느님의 가르침임을 깨달은 것이다.
더욱이 중앙의 주류 예언자들은 유배라는 환경에서 스스로 버티지 못했던 듯하다. 저항하던 비판적 예언자들은 가난한 백성들 사이에서 사는 것이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그들은 본디 중앙 권력이 나눠 주는 혜택을 별로 받아 보지 못했고, 일부는 권력과 재력에서 소외되었다. 평소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살고, 가난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유배는 그래도 견딜 수 있는 환경이었다. 하지만 중앙의 화려한 번제나 부유한 삶에 익숙한 사람들은 유배에서 활동할 수 없었다.
또한 백성들이 망국의 원인이었던 주류 종교인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비판적 예언자들의 입에 참된 가르침을 주셨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결국 백성은 비판적 예언자들의 기록을 읽은 뒤 자신들의 죄를 반성했고, 그런 깨달음에 따라 역사를 재편찬하여 성경을 다듬었다. 그렇게 그들은 유배를 견뎠다. 이 과정에서 중앙의 주류 예언자들의 기억이 소멸했다. 하지만 소외되었던 비판적 예언자들의 후계자들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이런 대역전의 드라마는 결국 하느님께서 역사하신 것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고대 근동 수천 년의 역사 가운데 오직 이스라엘에서만 이런 역전이 일어났다. 결과적으로 주류 종교인의 역사가 거의 삭제되었고, 가난한 사람의 편을 들었던 비판적 예언자들의 기록이 우리 성경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인간적 눈으로 보면, 정말로 역사적 우연이 겹치고 겹쳐야 이런 일이 간신히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가르치시려고 정말 절묘한 방법을 쓰신 것이 아닐까? 결과적으로 이런 기적과 같은 역사를 통해서 비판적 예언자들의 말과 행동만이 우리에게 전해졌다.
다음 호에서는 예언자들의 내면에 조금 더 가까이 가 보자.
*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 -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으로 고대 근동과 구약 성경을 연구하는 평신도 신학자이다. 주교회의 복음선교위원회 위원이자 의정부교구 사목평의회 위원이다. 저서로 「구약 성경과 신들」과 「신명기 주해」 등이 있다.
[경향잡지, 2018년 3월호,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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