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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물] 신약 성경의 인물: 마르타와 마리아 - 예수 그리스도의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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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3-24 조회수6,800 추천수0

[신약 성경의 인물 - 마르타와 마리아] 예수 그리스도의 벗

 

 

살아가면서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벗을 만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큰 축복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뿐 아니라 속마음까지도 함께 터놓을 친구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지요.

 

한평생 그런 벗을 몇 명이나 만날 수 있을까요?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만, 단 한 명의 진실한 벗만 있어도 감사드릴 일입니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5.13).

 

예수님께서는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사랑, 그 참사랑의 대상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당신의 친구요, 벗으로 생각하셨습니다.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루카 7,34).

 

예수님께서 죄인들의 친구라 불리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위로로 다가옵니다.

 

 

마르타와 마리아

 

예수님께서 사랑했던 이들, 예수님의 마음을 북받쳐 오르게 했던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기도 하셨지요(요한 11,5.33-35).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베타니아에 살던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입니다. 루카 복음 10,38-42에는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 두 자매에 관한 고유한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길을 가시던 예수님께서 한 마을에 들어서시는데, 이곳에 살던 마르타라는 여인이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모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홀로 그 집에 들어가신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는 외간 남자가 결혼하지 않은 여인의 집에 출입하는 것을 삼가던 시대입니다. 마르타의 초대에 응한 예수님도 놀랍지만 그분을 초대한 마르타의 행동도 당시로써는 파격적이었습니다.

 

귀한 손님이신 예수님을 모시는 일은 마르타에게 참으로 중요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중요한 일을 누군가 희생하여 오로지 혼자서 감내해야 한다면 어떨까요? 예수님을 모시고자 분주히 움직이는 마르타의 눈에 누군가 자꾸 거슬리기 시작합니다.

 

마르타는 동생 마리아가 바쁜 자신을 거들기를 바라는데, 그러기는커녕 예수님 곁에 앉아만 있으니 그런 동생이 얼마나 얄미웠을까요? 보다 못해 마음이 산란해진 마르타는 예수님께 청합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루카 10,40).

 

유다 전통에 따르면 여자들은 랍비들이 가르치는 자리에 참석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자로서 금기시되던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동생이 마르타에게는 여러모로 황당할 것입니다. 한편으로 마르타 또한 마리아처럼 내심 예수님의 말씀을 곁에서 듣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활동과 기도의 조화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10,41-42).

 

마르타의 마음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예수님의 답변은 참으로 매정하시기만 합니다. 오히려 마르타가 큰 잘못을 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이 불공정한 상황을 정리해 달라고 청했는데,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두둔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마르타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서러움에 찬 마르타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마르타의 행동이 정말 어리석었을까요? 당대의 예법을 따르며 예수님께 성심껏 봉사하려 했던 생각이 잘못된 것이었을까요?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그녀의 행동이 조금은 단순하고 서투를 수는 있어도 예수님을 향하는 마음은 순수하고 열정적이었을 터이니까요. 가톨릭 교회에서 기념일을 두며 마르타 성녀를 공경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이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요? 보통 이 부분에서 활동과 기도를 비교하며 이야기하곤 합니다. 활동과 기도의 조화가 중요합니다. 마르타의 경우 활동에만 너무 몰입하다 보니 시야가 좁아져서 어느 순간 조급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일을 염려하게 됩니다. 자꾸 누군가의 모습이 눈에 거슬리다 보니 마음의 평화가 깨져 버렸습니다. 봉사라 생각하고 충실한 마음으로 기쁘게 했는데 왜 그 일을 하는지 잊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어느 한쪽에만 치우치게 되면 고요하던 마음속에 파장이 일기 시작하더니 평화의 물결이 어느새 미움과 분노의 파도로 바뀌어 용솟음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를 통해서 우리도 이와 같은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다고 알려 주십니다.

 

 

슬픔에 찬 신앙 고백

 

요한 복음에 드러나는 두 자매의 모습도 루카 복음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오빠 라자로가 죽을 만큼 몹시 아픕니다. 두 자매는 사람을 보내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몹시 앓고 있다며 예수님께서 어서 오시기를 청합니다. 시급한 상황인데도 이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께서는 무슨 이유에서이신지 바로 움직이시지 않으십니다.

 

한편 제자들은 그곳에 가기를 두려워합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고 하였으니까요. 결국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베타니아로 가십니다.

 

하지만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라자로가 죽어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나 지난 뒤였습니다. 많은 유다인이 두 자매를 위로하러 그곳에 와 있었지요.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분을 맞이하러 나갑니다. 마리아는 그냥 집에 있었지요.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식에 몸부터 움직이는 마르타와 그럼에도 여전히 슬픔과 실의에 빠진 마리아가 보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11,21-22).

 

마르타의 이 말이 슬픔에 찬 원망의 소리로 들립니다. 그럼에도 이내 주님께 청하는 마르타의 고백은 예수님을 향한 그녀의 변치 않는 믿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과의 대화 안에서 이루어진 신앙 고백은 모범 답안과도 같습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11,27).

 

그녀는 분명 활동가였지만, 예수님과 함께 머무르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분을 알아보고 고백했던 대표적인 신앙인이었던 것이지요.

 

마리아는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에도 그분께 다가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신다는 말을 듣고서야 그분께 갑니다. 마리아도 울고 또 그녀와 함께 온 유다인들의 우는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도 마음이 북받치시고 산란해지셨습니다(11,33 참조). 예수님의 마음을 울린 이, 그녀가 바로 마리아였지요. 마리아를 위로하러 온 많은 유다인이 있었다는 대목은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드러내는 또 다른 표지입니다(요한 11,31.45 참조).

 

 

예수님의 마지막을 준비한 여인

 

마리아의 특별함은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졌을 때, 곧 예수님의 수난 직전의 잔치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르타는 여전히 시중들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립니다.

 

언뜻 쉽게 이해되지 않는 장면입니다. 마리아는 왜 그 비싼 향유를 가져와서 수건이 아닌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을까요? 이 장면을 지켜보던 유다 이스카리옷은 안타까워하며 이야기합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요한 12,5)

 

히말라야와 같은 고산 지대가 원산지인 나르드 향유는 해발 3,000-4,000미터 정도에서 채취되는데, 향기가 좋고 제조상의 어려움이 많아 값비싼 사치품이었습니다.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의 가격인 삼백 데나리온은 지금의 가치로 얼마일까요?

 

한 데나리온은 당시 하루 임금 정도였다고 합니다. 단순히 비교할 수는 없지만, 올해의 최저 시급으로 계산해 보면 대략 1,800만 원이란 금액이 나옵니다. 이런 큰 금액을 발을 씻는 데 한 번에 써버리다니…. 이런 마리아를 지켜보던 유다는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겠지요. 돈을 갖고자 예수님마저 팔아넘길 심산이었으니까요. 그런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요한 12,7).

 

그러고 보면 어느 제자도 알아들을 수 없었던 예수님의 지속적인 수난 예고를 마리아가 알아들었고, 그 참뜻과 함께 그 시기를 정확히 예감한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했을 마리아는 슬픔을 머금고 이를 행동으로 옮겨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신앙 고백을 한 것이지요.

 

마르타와 마리아는 자매이지만 너무 다른 성향을 지녔습니다. 누구의 성향이든 서로 조화를 이루면 좋겠지만, 어떤 성향이든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예수님을 따르려는 행동과 마음가짐이 더 중요하겠지요.

 

예수님의 참벗이며 예수님을 사랑하던 이들. 그들처럼 예수님을 바라보고 고백하며 그분을 따를 수 있기를 청해 봅니다. 더불어 누군가에게 그런 벗이 되려는 마음으로 한 걸음 다가가 봅니다. 여러분도 함께하시겠습니까?

 

* 최광희 마태오 - 서울대교구 신부. 가톨릭 청년성서모임을 담당하고 있다.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학교 대학원에서 성서신학을 전공하였다.

 

[경향잡지, 2018년 3월호, 최광희 마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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