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예수님 이야기56: 회개와 기쁨(루카 15,1-3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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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3-26 | 조회수5,125 | 추천수0 | |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 루카복음 중심으로] (56) 회개와 기쁨(루카 15,1-31) 되찾은 양을 시기할 것인가, 목자의 사랑 깨달을 것인가
- 되찾은 양의 비유, 되찾은 은전의 비유,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모두 하느님의 크나큰 자비와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2014년 1월 로마의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본당을 방문했을 때 전통복장을 한 여성 신자가 어깨에 어린양을 올려주자 환하게 웃는 모습. [CNS 자료사진]
루카복음 15장은 예수님의 세 가지 비유 말씀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되찾은 양, 되찾은 은전, 그리고 되찾은 아들의 비유입니다. 이 부분을 살펴봅니다.
비유의 상황(15,1-2)
세 비유는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시는 상황을 먼저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 묘사에서는 두 가지가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지만, 그 모습을 본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이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음식까지 함께 나눈다고 투덜거리지요.(15,1-2)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15,2) 이들이 투덜거리는 내용에 비춰봤을 때 예수님께서는 길거리에서 그냥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함께 나누는 자리에서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음식을 나눈다는 것은 친교를 나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15,3-7)
비유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었는데,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놔둔 채 잃은 양을 찾아 뒤쫓아가고 마침내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돌아와 친구들과 이웃에게 잃었던 양을 찾았으니 함께 기뻐해 달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혹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으려다가 다른 아흔아홉 마리를 잃게 되면? 하고 말입니다.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15,4)라는 표현은 그런 걱정을 더 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비유의 핵심은 잃은 한 마리를 찾을 때까지 헤매는 목자의 마음에 있습니다. 마침내 양을 되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돌아오는데, 양을 어깨에 멘다는 것 자체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목자는 단지 혼자만 기뻐하지 않습니다.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함께 기뻐하자고 초대합니다. 그만큼 기쁨이 크다는 것입니다. 되새겨야 할 부분은 비유의 결론인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15,7)이라는 말씀입니다.
되찾은 은전의 비유(15,8-10)
이 비유 역시 간단합니다.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갖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 등불을 켜고 온 집 안을 쓸면서 샅샅이 뒤집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은전을 찾게 되면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잃었던 은전을 찾았으니 함께 기뻐해 달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에서도 이렇게 결론을 맺으십니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15,10)
되찾은 아들의 비유(15,11-32)
이 비유는 성경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사람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대단히 잘 알려져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이 자기 몫을 달라고 해서 다 챙겨서는 집을 떠납니다. 먼 고장에서 흥청망청 탕진하다가 알거지가 되고 할 수 없이 돼지치기가 됩니다. 돼지는 유다인들에게 부정한 동물이어서 돼지치기가 된다는 것은 인생의 밑바닥까지 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지요.
굶주림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던 둘째 아들은 그제야 제정신이 들어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주십시오.’”(15,11-19)
아들은 일어나서 아버지에게 갑니다. 멀리서 아들이 오는 것을 본 아버지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고 고백하는 아들의 말을 일축하고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겨준 후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풉니다. 반지는 권위의 표상이고 신발은 노예와 반대되는 자유인임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아버지가 둘째 아들에게 아들로서의 완전한 권위와 자유를 회복시켜 주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15,20-24)
들에 나가 있던 큰아들이 돌아오면서 노래하고 춤추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 노래와 춤 소리가 동생이 돌아왔다고 해서 벌이는 잔치인 것을 안 큰아들은 들어가지 않으려 하지요. 아버지가 나와서 달래자 큰아들은 속에 든 불만을 토로합니다. 죽도록 일한 자기에게는 친구와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도 잡아주지 않다가 창녀에게 놀아난 둘째가 돌아오자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푼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말합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15,25-32)
이 비유를 방탕한 작은아들의 회개와 아버지의 용서라는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비유는 본래가 작은아들이나 큰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의 한없는 사랑과 자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이는 아버지께 돌아가기로 한 아들의 결심이 잘못에 대한 참회보다는 굶어 죽을 것 같은 두려움에서 비롯했다는 데서 알 수 있습니다.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고 고백하는 것은 말하자면 일종의 면피용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1. 되찾은 양의 비유, 되찾은 은전의 비유,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모두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 메시지는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가는 목자의 모습에서, 잃은 은전을 찾아 온 집 안을 쓸며 샅샅이 뒤지는 모습에서, 멀리서 아들을 보고 달려가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 비유에서는 길 잃은 양이 목자를 찾아서 헤맨다는 내용이나 은전이 주인이 찾아와 주기를 기다린다거나 아들이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용은 없습니다. 찾아 나서는 주체는 목자이고 부인입니다. 그렇다면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찾아 나서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들의 의사를 존중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비록 아들을 찾아 나서지는 않았지만 마음은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나 은전을 찾아 샅샅이 뒤지는 부인의 마음과 전혀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작은아들이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춘 것입니다.
이제 사순시기가 막바지에 이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우선 요청되는 것은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참으로 깊이 깨닫는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회개와 참회로 거듭날 수 있게 됩니다.
2. 동생을 위해 잔치를 베풀어주는 아버지를 못마땅해 하는 큰아들의 태도는 우리네 여느 사람의 태도와 다를 바가 없어 보입니다. 그것은 또한 세 가지 비유 말씀을 시작할 때에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보인 태도와도 같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15,32) 우리가 큰아들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처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면, 이제는 아버지가 한 이 마지막 말씀을 곰곰이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3월 25일, 이창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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