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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공동구속자에 대한 오해 카테고리 |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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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삼용 쪽지 캡슐 작성일2011-07-06 조회수887 추천수0 신고
조규만 주교의 성모님 이야기
 
조규만 주교(서울대교구 서서울지역 교구장 대리)
 
 
(14) 교부들의 가르침에 나타난 성모님 : 마리아의 동정 출산은 하느님 기적
 
가르침과 성덕에 있어서 모범이 되고 교회 교리를 정립한 고대 그리스도교 저술가들을 교회는 ''교부'' 혹은 ''교회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교부학에서 교부는 8세기까지 교회에 가르침을 준 주교와 사제들을 주로 지칭한다. 그래서 토마스 데 아퀴노는 13세기 신학자이기에 교부라고 부르지 않는다. 또 교회 가르침을 올바르게 전해줬다는 정통성을 확보해야 하고, 교회에서 인준을 받아야 하며, 성덕이 출중하고 거룩해야 한다.
 
이 교부들을 교회는 지역적으로, 시대적으로 구분한다. 지역적으로는 로마를 중심으로 문헌을 라틴어권에서 남긴 이들을 라틴 교부라고 부르고, 그리스권역에서 활동한 교부들을 그리스 교부 혹은 동방 교부, 시리아어권 교부들은 시리아 교부라고 부른다. 시대적으로는 서기 100년께에서 300년 사이를 초창기, 300년에서 450년까지를 중기 혹은 전성시대 교부들, 450년에서 700년까지를 말기 혹은 쇠퇴기 교부라고 부른다.
 
당시 교부들 이름을 보면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이들이 많다. 유스티노, 이레네오, 이냐시오, 안아티오키아의 이냐시오, 클레멘스, 치프리아노, 요한 크리소스토모, 다마소, 레오 등이다. 또한 성인은 아니지만 오리게네스, 테르툴리아누스처럼 유명한 교부들도 있다.
 
저자는 모르지만 책으로만 교부들 가르침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디다케(Didache)」라는 책은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이라는 말이 있지만, 저자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바르나바의 편지(Letter of Barnabas)」라는 초기 그리스도교 그리스어 저술도 있고, 「솔로몬의 송가(Odae Salomonis)」 같은 찬미가도 있지만 이 역시 지은이를 알 수 없다.
 
당시 교부들은 초대 교회공동체에 문제가 생기거나 이단이 등장하면 답을 찾다가 신학을 발전시켰다. 교부들은 325년 니체아공의회에서 성부와 성자와 관계에 대해, 381년 콘스탄티노플공의회에서 성령과 삼위일체에 대해, 431년 에페소공의회에서 ''하느님의 모친'' 성모 마리아에 대해, 451년 칼체돈공의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어떻게 결합돼 있는지에 대한 문제를 놓고 논박하고 답변을 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교부는 「에페소교회에 보내는 편지」, 「스미르나교회에 보내는 편지」 등을 통해 성모에 관한 가르침을 남긴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교부는 특히 교부들 가운데 최초로 성모 마리아의 동정성을 주제로 내세우면서 하느님의 신적 모성과 성모의 동정성에 대해 언급했다. 예수 수난과 죽음이 신비인 것처럼 동정 탄생도 신비로서 사람들에게는 감춰져 있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외경인 「야고보복음」, 「토마스복음」 등에도 동정성에 관한 대목이 있다. 「야고보복음」은 특히 성모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야고보복음」의 내용을 정리하면, 마리아가 3살 때 성전에 봉헌된 이야기를 비롯해 요셉이 사제들로 말미암아 배필로 선출된 이야기, 대사제 즈카르야가 벙어리가 되고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이야기 등이 나타난다.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요셉이 두려워하면서 고민하자 천사가 꿈에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임을 알려주며 마리아를 보호하는 이야기, 사제가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알고 요셉을 문책하고 마리아에게 쓴 물을 먹이면서 결백을 시험하는 이야기, 베들레헴 방문, 동굴에서 출산, 동방박사들의 방문, 동방박사들 이름도 나온다. 어떤 부분은 성경과 겹치고, 어떤 부분은 너무 황당하게 꾸며져 성경에서 제외됐다.
 
「야고보복음」 같은 외경을 보고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마리아는 하느님 구원 계획에 의해 미리 선택됐고, 성모가 예수를 잉태한 것은 하느님 은총이며, 마리아 동정성은 하느님 섭리에 의해 요셉에 맡겨져 있다는 점이다. 또 마리아의 예수 잉태가 요셉과 관계없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점은 마태오복음이나 루카복음에서도 똑같이 언급한다. 또 출산 때도 동정이 보존됐다는 것은 동정 출산이 하느님의 기적이며 하느님의 행위라는 것을 의미한다.
 
또 유스티노 교부는 당시 하와와 성모 마리아를 대조하면서 이방인 티폰과 성모에 관한 논쟁을 벌인다. 아담과 하와가 불순명함으로써 인류를 하느님과 등지게 했지만,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 말씀에 순명함으로써 하느님과 관계를 회복시켰다는 것이다. 유스티노 교부의 대조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새 아담, 혹은 둘째 아담이라고 표현하고, 성모를 새 하와, 혹은 둘째 하와로 표현하기도 한다. [평화신문, 2010년 8월 1일, 정리=오세택 기자]
 
 
(15) 초세기 교부들의 문헌에 나타난 성모님의 모습 : 인간이 하느님께로 돌아가도록 도와줘
 
교부들이 표현한 마리아
 
초세기 교부들 문헌에서 나타나는 성모님 모습을 보자.
 
사르디나의 멜리토 주교는 부활절 강론에서 예수님을 순수한 어린 양인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묵묵한 어린 양, 희생된 양으로 표현하고 있다. 마리아를 양으로 비유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관계를 시사하는 것이다.
 
멜리토는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를 강생, 수난과 죽음, 영광의 부활과 승천 세 가지 측면으로 구분한다. 마리아의 동정성은 강생, 즉 성령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한 모성에 있어서 본질적 신비를 잘 나타내고 있다. 비잔틴 전례와 동방교회 역시 이런 마리아를 십자가 아래 꿇어앉아 있는 어린 양으로 묘사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성부와 말씀과 성령은 한 분이며 어디에서도 동일시된다고 했다. 동정 어머니 역시 한분이라고 강조한 클레멘스는 마리아를 교회라고 부르면서 ''주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그는 ''교회는 동정인 동시에 어머니이며, 사랑이 충만하고 거룩한 말씀으로 자녀를 양육한다''고 전했다. 이는 훗날 교부들에게 마리아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밀접한 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중요한 주제가 된다.
 
로마의 히폴리토는 ''마리아는 순금으로 입혀진 궤입니다. 그 내부는 말씀으로 인해, 외부는 성령으로 말미암아…''라며 마리아의 완전함을 극찬했다. 마리아는 하느님 아들의 강생과 인간 구원의 신비에 본질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가 사용한 ''동정성의 첫째''라는 표현은 예수 탄생 이후 마리아의 동정성에 관한 첫 번째 언급으로 간주된다.
 
신앙고백인 신경에도 2세기부터 동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한 마리아를 나타내는 부분이 있다. 히폴리토가 전하는 초기신경에 나온 마리아의 동정성은 사도신경에도 나온다. 니체아-콘스탄티노플신경(381년)도 ''구원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오시어,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육화하셨고, 사람이 되셨고''라는 표현이 반복된다.
 
마리아와 하와의 비교
 
리옹 주교 이레네오는 마리아의 동정성을 교회 신앙에서 물려받은 유산으로 생각했다. 그는 예수님이 여느 인간처럼 정상적 출생과정을 거침과 동시에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을 특별한 사건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동정 탄생은 인간이 결코 생각할 수 없었던 사건으로서 마리아의 순결함이 예수 그리스도의 순결함과 유사한 것임을 강조한다.
 
그는 인간 역사는 창조에서 구원, 즉 하느님께로 계속 진행ㆍ발전한다는 이론을 자신의 신학으로 정립하고자 했다. 창조된 세상이 아담의 잘못으로 타락했는데, 그 잘못을 예수 그리스도가 단순히 처음으로 되돌린 것이 아니라 제2의 창조로 불릴 만큼 훨씬 뛰어넘는 관계로 성립시켰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담과 대조되듯 마리아는 하와와 대조된다. 그의 대조 이론은 후에 교부들에 의해 계속 발전되면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교회헌장」에도 수용되고 있다.
 
이레네오의 ''마리아-하와'' 대조 이론을 간략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하와와 마리아 모두 행위했던 순간 처녀였다 △천사(악마)에게 메시지(좋은 메시지와 나쁜 메시지)를 받았다 △마리아는 하느님께, 하와는 뱀에게 순종했다 △그들 행위는 그 후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등이다.
 
이레네오는 사도 바오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했던 ''구원의 원인''을 마리아에게 적용하고, 아담에게 적용했던 ''죽음의 원인''을 하와에게 사용한다. 또 마리아를 ''처녀 하와의 변호자''로 칭하며 모든 여성의 구원자로 묘사하고 있다. 한 인간이 하느님의 구원역사 계획, 다시 말해 인간이 하느님에게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데 마리아가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후에 이레네오가 마리아를 ''구원의 원인'', ''그리스도의 동반자'',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칭한 데 이어 ''공동 중재자ㆍ구속자'' 등으로 표현한 것은 많은 논란이 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결정적으로 중재할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하다. 그분이 하시는 일에 마리아가 도움을 준 것일 뿐, 예수 그리스도와 똑같은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어떤 선택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임에도 사람은 항상 남의 탓을 한다. 아담은 자신의 죄를 하느님 탓으로 돌리고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만약 아담과 하와가 핑계를 대지 않고 자신의 죄를 인정했으면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평화신문, 2010년 8월 15일, 정리=백영민 기자]
 
 
(16) 초세기 교부들 중 오리게네스 문헌에 나타난 성모님 모습 : ''믿음의 어둠'' 겪은 하느님의 어머니
 
오리게네스 교부는 초세기 200년께에 사셨던 대학자다. 그리스도교 신학이 발전하는 데 큰 공헌을 한 학자로 언어와 문화, 철학에 대해서도 해박했다. 그는 성경을 공부할 때 본문의 문자적 의미뿐 아니라 상징적ㆍ영성적 의미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은총이 가득하신 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도들이 불신앙을 겪는 동안 주님의 어머니는 그러한 불신앙으로부터 보호되었는가? 주님의 수난 동안 그분이 그러한 불신앙을 겪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그분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만일 ''모두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이 주셨던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잃어 버렸습니다'' ''만일 모두가 그분의 은총으로 의롭게 되었고 속죄되었다면''(로마 3,23) 마리아도 그 순간에 불신앙을 겪었다는 것이 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시므온이 그런 예언을 한 것입니다."(오리게네스의 ''루카복음에 관한 강론'' 중)
 
오리게네스 교부는 시므온이라는 예언자가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할 때 "이 아이 때문에 장차 가슴에 칼을 꽂는 아픔을 겪게 될 것"이라고 한 예언은 성모님이 신앙의 어둠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다시 말해 시므온은 어머니 아픔은 아들이 겪는 아픔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예언했다고 오리게네스는 해석한 것이다. 오리게네스는 이를 ''믿음의 어둠''으로 표현했다. 성모님은 완벽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수님조차도 믿음의 어둠을 겪었다. 성모님도 믿음의 어둠을 겪고 살아가신 분이다.
 
성모님을 완벽한 존재로 꾸미는 일에 조심해야 한다. 성경은 그 분을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라고 한다. 은총이란 말은 하느님의 사랑ㆍ총애를 의미한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총애를 잃지 않으신 분이지만, 우리와 똑같은 나약한 인간으로서 하느님을 향해 걸어가신 분이란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오리게네스 교부는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서슴없이 불렀다. 후에 에페소공의회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는 맞지 않다는 이견이 있었지만, 오리게네스 교부를 비롯한 많은 교부들은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말을 거침없이 사용했다. 이 명칭은 성모님이 여신이라는 뜻이 아니라, 성모가 낳은 예수님이 인간인 동시에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오리게네스 교부가 성모님에 대해 첫 번째로 주장하는 것은 성모 마리아의 모성과 동정성은 신앙에서 필수적 요소라는 점이다. 우리가 고백하는 신경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다''는 표현은 신앙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내용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고 믿지 않는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고 믿는다.
 
동정녀의 잉태라는 기적
 
당시 반대자들 중에는 예수를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로 생각했던 이들도 많았고, 심지어 로마 판테라라는 군인의 성폭행으로 낳은 사생아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었다. 오리게네스 교부는 이사야서 7장 14절에 나오는 이사야 예언으로 이를 반박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여기서 표징은 기적이다. 여성(여인)이 아이를 낳는 게 기적이 아니라, 동정녀가 아이를 낳는 게 기적이라는 의미에서 여성을 동정녀로 번역하는 게 타당하다. 오리게네스는 사람들은 남자 아버지에게서 여성을 통해 태어나지만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태어나는 것이라는 점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판테라라는 이름 자체는 파르테노스라는 희랍어인데, 이 말은 동정녀, 처녀라는 뜻이다. 오리게네스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을 잘못 알아들은 게 아니냐고 반박한다. 또 원죄 없는 예수님의 잉태를 보증하기 위해서도 동정녀이신 성모님에게서 태어나는 것이 타당하지 않느냐는 논리를 제시한다.
 
오리게네스 교부는 성모님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완벽한 제자라고 했다. 성모님이야말로 자신의 뜻이 아닌 하느님 뜻에 따라 하느님 말씀을 잉태하셨고, 그래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던 분이다. 오리게네스 교부는 성모님의 성덕을 많이 찾아냈다. 성모님의 노래 ''마니피캇''에는 구원에 대한 성모 마리아의 믿음, 희망이 잘 드러난다. [평화신문, 2010년 8월 22일, 정리=이지혜 기자]
 
 
(17) 초세기 4~5세기교부들 가르침 속에 나타난 성모님 모습 : 영광스러운 성모님, 영원한 동정녀로
 
교부들의 황금시대라고 할 수 있는 4~5세기 교부들의 성모님에 대한 생각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300년 께부터 450년 사이를 교부들의 황금시대라고 한다. 이 시기에는 중요한 성인들이 굉장히 많이 등장한다.
 
4개 공의회 잇따라 개최
 
그리스도교 초창기에 큰 공의회 4개가 열린 것을 주목해야 한다. 325년에 열린 니케아 공의회를 시작으로,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431년 에페소 공의회, 451년 칼체돈 공의회가 잇따라 열렸다.
 
일련의 공의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신성과 인성 모두를 지닌 존재로 논의됐다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가 배우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는 그간 많은 학자들의 논쟁, 이단들에 대한 단죄 등 아픔을 겪고 만들어진 것이다.
 
니케아 공의회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밀라노 칙령을 공포(313년)한 것을 계기로 시작됐다. 그동안 그리스도교는 박해를 받으며 지하에서 활동했으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칙령을 내림으로써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오게 되는 중요한 전환점을 맞게 된다. 교리 문제로 나라가 반쪽이 되는 걸 원치 않던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주교들에게 한데 모여 교리에 대한 의견을 하나로 모을 것을 주문했다. 이에 따라 열린 것이 니케아 공의회다.
 
당시 알렉산드리아 주교였던 알렉산드리아노를 수행한 부제로 공의회에 참가했던 아타나시오 성인은 아리우스파에 대항해 끝까지 싸움을 펼친다. 반대파에 의해 7번이나 귀향을 떠나는 고난에도 불구, 아리우스파와 투쟁하면서 얻어낸 결론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에 있어서 아버지 하느님과 동일한 본질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는 아리우스라는 사제가 "하느님은 오직 한 분이기 때문에 예수를 하느님 아들로 주장하는 것은 모순된다"고 말한 것과 대치되는 것이다.
 
당시 교회 주류는 니케아 공의회 결정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 아들이고, 아버지 하느님과 동일한 본질을 지닌 분이라는 견해를 따르기 시작했다. 이러한 논의는 콘스탄니노플 공의회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아타나시오 교부는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이시면서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시고, 악마의 세력에게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다"고 언급했다. 그는 성모님에게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서슴없이 사용했다.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됐기 때문이다. 인간이 소중한 이유는 하느님 자녀들이기 때문인 것이다. 당시 교부들은 이런 부분에서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는 행위가 성모님을 통해 이뤄졌음에 주목했다. 성모님이 그리스도와 한 쌍을 이루는 신부로 묘사되기도 했다는 것이 이에 대한 방증이다.
 
성모 승천
 
디디모라는 교부는 "누구보다도 영광스러운 성모 마리아는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았으며, 아기 예수를 낳은 후 영원히 손상되지 않는 동정녀로 남았다"고 표현했다.
 
이처럼 이 시대 교부들은 동정성에 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 당시만 해도 동정을 생물학적 차원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많았지만 디디모는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 동정녀, 예언의 은사 등으로 강조하며 다른 시각으로 접근했다.
 
에피파니오라고 하는 교부는 성모님 죽음에 대해 많이 언급했다. 그는 요한 묵시록에 나타난 것처럼 성모님 육신이 하늘에 올라가는 영광을 누렸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입게 될 영광을 미리 보여주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한편으로 그 당시에는 여성 사제직에 관한 논쟁이 많이 오고갔음을 알 수 있다. 성모님께 사제직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으로 말미암아 여성 사제직에 대한 논란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 공헌을 한 카파도치아 교부인 바실리오, 니싸의 그레고리오,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는 성모님이 예수님을 잉태한 것에 대해 단순히 파이프에 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중간 도구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셨다고 강조했다.
 
성모님은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고난을 극복하고 신앙의 모범이 되신 분이다. [평화신문, 2010년 8월 29일, 정리=이서연 기자]
 
 
(18) 암브로시오 주교 가르침 속에 나타난 성모님: 영적으로도 동정이신 성모님
 
초대교회 교부들이 성모 마리아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살펴보는 작업이 지루하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초창기 교회 학자들의 성모 공경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이번에는 암브로시오 주교와 그의 제자 아우구스티노 성인, 그리고 에페소공의회가 이해한 성모님을 살펴볼 차례다.
 
334년에 태어나 374년 이탈리아 밀라노교구장이 된 암브로시오 주교는 성모님의 믿음이 사제 즈카르야보다 뛰어남을 찬양했다. 그는 하느님 구원 계획이 성모님에게서 시작됐으며, 성모님은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했다. 성모님이 여신이어서가 아니라 성모님께서 낳은 예수님이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흠숭과 성모 공경 구분
 
암브로시오 주교는 또 성모님의 동정성을 강조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고,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는 데 가장 적합한 방법이 동정을 통한 잉태라고 봤다. 당시 동정으로 사는 수도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성모님이 동정이라는 사실은 동정 수도자들의 모범이 되고, 그들의 수도생활을 격려하는 데도 큰 의미가 있었다.
 
그에 따르면 성모님은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동정이다. 많은 이들이 육체적 동정만을 생각하기 쉬운데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 자기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는 영적 동정이다.
 
암브로시오 주교는 하느님을 흠숭하는 것과 성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구분돼야 한다고 말했다. 흠숭은 오직 하느님만이 받으실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회와 동정녀들의 모범인 성모님을 공경해야 한다.
 
354년에 태어나 387년 34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세례를 받은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저서 「고백록」에서 "늦게야 님을 사랑하게 됐습니다"고 고백했다. 이는 세례 받을 때 체험을 반영한 것이다. 보통 죽을 때가 돼서야 절실하게 다가오는 하느님을 34살에 사랑하게 된 것은 결코 늦은 것이 아니다. 그런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성모님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성모님은 평생 동정이셨다고 말했다. 성모님이 동정인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잠긴 문을 통과해 제자들을 만난 것과 같은 기적이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에게 성모님은 교회의 한 구성원이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신비체인 교회에서 성모님도 구성원인 동시에 다른 구성원들의 모범이 되는 분이다.
 
''하느님의 어머니''로 불려
 
그는 성모님이 하느님의 어머니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여신을 숭배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어서였다. 대신 그리스도의 모친이자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점을 강조했다. 하느님 구원 사업에 적극 협력한 분이 바로 성모님이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자신을 회개로 이끈 어머니 모니카 성녀를 생각하면서 성모님을 더욱 친근하게 여겼을 것이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에게 성모님은 하느님 구원 섭리로 예정된 분이다. 하느님이 성모님을 택하셨다. 오늘날 사제가 지니는 권위도 하느님이 사제를 선택하셨다는 데서 나온다. 사제 개인이 똑똑하고 잘나서가 아니다. 하느님 섭리는 그런 것이다.
 
431년 열린 에페소공의회에서는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에 대한 문제가 논의됐다. 네스토리우스는 "피조물인 거룩한 동정녀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아닌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불러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치릴로는 이 주장을 반박했고, 갑론을박 끝에 공의회는 치릴로 주장을 받아들여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로 불러도 무방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논쟁은 451년 칼케톤공의회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라고 결론지으면서 일단락된다.
 
성모님이 하느님의 어머니냐 아니냐는 논의는 사실 예수님이 하느님이냐 아니냐는 논의의 연장에서 나온 것이다. 초세기 교부들은 이단과 맞서 싸우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를 확립해나갔다. 성모님에 대한 교리 또한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정립됐다. [평화신문, 2010년 9월 5일, 정리=남정률 기자]
 
 
(19) 교부들의 후기 문헌에 나타난 성모님의 모습: 인간을 위한 중개자이신 어머니
 
교부들은 하느님의 어머니, 즉 성모의 신적 모성과 동정성에 대해 논의했고, 드디어 교회는 553년 콘스탄티노플공의회를 통해 공식 교의로 선포한다. 교부시대 후기에 들어서 교부들은 성모의 무죄한 잉태, 무죄성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성모께 드리는 찬미가 ''아카티스토스(Akathistos)''도 이 시기에 쓰였다.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에서 나온 「올바른 성모신심」 부록으로 아카티스토스를 수록했는데, 이 찬미가를 누가 지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콘스탄티노플의 젤마노 주교, 세르지오 주교 등이 성모 찬미가를 지은 후보자로 꼽힌다. 특히 마리아에 대한 강론을 많이 남긴 젤마노 주교는 성모신심이 탁월했고, 그의 글은 마리아 공경 혹은 마리아에 관한 회칙에 많이 인용됐다.
 
8세기께 기록에 보면, 비잔틴 전례 사순 제5주 토요일을 ''아카티스토스 토요일''이라고 불렀는데, ''아카티스토스''라는 말은 ''앉지 않는다''는 뜻이다. 존경하는 마음으로 서서 불렀다는 의미로 ''아카티스토스''라고 불렀다.
 
이 시기 뚜르의 주교 그레고리오는 특별히 성모의 중재기도로 이뤄진 기적들에 대한 이야기를 서방 교부로는 최초로 알렸다. 그는 성모께서 돌아가시자 제자들이 모였고, 성모를 무덤에 안장하자 성모의 영혼과 육신이 분리돼 영혼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성모 승천에 대해 말한다.
 
리비아 주교였던 테오테크노 역시 성모승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부활하고 승천한 예수의 육신은 성모에게서 왔기에 성모 승천은 당연하다고 강조한다.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위해 하늘나라에 가서 자리를 마련해 주신다고 했다면, 성모를 위해 자리를 마련해 주신다는 것은 더 당연하다는 것이다.
 
성모 승천
 
또 구약성경에 에녹이나 엘리야 승천 이야기가 나오는데 성모는 에녹이나 엘리야보다 더 순수하고 오점 없는 영혼을 지니신 분이기에 더 그러하다는 입장이다.
 
처음으로 자신을 일러 ''종들의 종(Servus Serviorum)''이라는 표현을 쓴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성모 마리아는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진 위대한 산"이라 표현하며(이사 2,2 참조) 성모의 발현과 성모 중재기도의 효과에 대해 언급한다.
 
스페인 시빌리아 주교 이시도로는 처음으로 성모를 성령과 관련시킨다. 성모를 "성령의 물이 흘러넘치는 새로운 땅"에 비유한 그는 "시메온의 칼은 성모님의 순결을 의미한다"고 강조한다.
 
크레타 주교였던 안드레아는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죄인들의 피난처라는 부분을 강조했다. 성화 파괴자들에게 많은 박해를 받은 안드레아 주교는 성모의 인격과 성덕, 중재 역할에 대한 좋은 강론을 많이 남겼고, "성모 마리아는 원죄로부터 자유롭게 된, 오점 없이 깨끗하신 분"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여기서 성모의 거룩함은 그분의 내적 풍요로움과 덕성, 하느님과 관계 안에서 이뤄지는 특별한 사랑에서 비롯된다고 언급한다.
 
성모의 자비는 물론 하느님의 자비에는 비교할 바는 없지만, 성모께서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점은 틀림없다. 예수의 자비를 보면 어머니의 자비를 충분히 알 수 있다. 성모는 예수를 잉태하면서 하느님과 인간을 연결시킨 중개자라는 것이다. 그분의 중개는 율법과 은총 사이에서도 이뤄지고, 구약과 신약 사이에서도 이뤄진다. 성모의 또 하나의 역할은 이 세상 사람들을 하느님과 연결시키는 중재자로서 어머니의 역할로 나타난다.
 
은총 가득한 성모님
 
또 교부시대 막바지를 살아간 다마스쿠스 요한 주교는 성모는 하느님께 선택되셨고, 구약성경에 예언돼 있던 분이며, 그분의 탄생은 하느님 은총으로 이뤄졌고, 그분은 영적으로 충만한 분이라고 강조한다. 성모 승천의 특권을 출산 시 동정성의 신비와 연결시키고, 성모는 인간을 위한 중재자라는 점을 강조하며, 하느님에 대한 흠숭과 성모에 대한 공경을 구별한다.
 
교부들의 마리아론에 대해 학자들은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신적 모성이 그 핵심이라고 평가하면서 교부들의 마리아론은 늘 성경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마리아론은 항상 그리스도론과 관련해 언급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평화신문, 2010년 9월 12일, 정리=오세택 기자]
 
 
(20) 교부들의 중세기 문헌에 나타난 성모님 모습: 성모 승천과 무죄한 잉태 논쟁 활발
 
8세기 중엽부터 루터 종교개혁 이전까지인 중세기 교부들의 문헌에 나타난 성모님의 모습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이 시대는 이미 성모님이 하느님의 어머니요, 동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했다는 것이 제2차 니케아공의회(787년)에서 확정된 시기라서 이와 관련된 내용은 더는 언급되지 않는다.
 
중세기는 베르나르도, 알베르토, 토마스 데 아퀴노, 보나벤투라, 둔스 스코투스 등 대 신학자들이 대거 등장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 성모님에 관한 논의는 주로 원죄에서 자유로운 성모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와 마지막 생애, 즉 승천에 관한 것이었다. 또 하느님과 인간의 중재자로서 성모 마리아의 역할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던 때이기도 하다.
 
베네딕도회 베다 주교는 성모가 천사와 많은 사람에게 찬양을 받았다는 점을 주목하고 그분은 어느 여인보다 고귀한 분이라고 찬양한다. 성모를 하느님의 어머니, 예수 그리스도 인류 구원사업의 첫 번째 협력자라고 말하지만 결코 여신은 아님을 강조한다.
 
베다 주교는 비잔틴교회가 성모를 여왕으로 찬양했던 것과 달리 지상에서의 그분 삶의 겸손을 찬양하고 있다. 하느님의 어머니로 특별한 권한을 지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해 많은 이들에게 축복과 찬양을 받았지만 결코 지상의 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하느님 뜻에 마음을 쏟았던 겸손과 사랑을 찬양하는 것이다. 베다 주교는 하와에게서 교만을 보고 성모에게서 순종을 본다고 비교해 설명한다.
 
성모, 우리의 어머니
 
그는 더 나아가 성경에 근거해 성모와 교회의 유사점을 끌어낸다. 성모와 교회 모두 동정이요, 어머니라고 강조한다. 또한 성경(루카 1,41)에 근거해 성모가 엘리사벳을 방문할 때, 요한 세례자가 모태에서 성화됐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는 성모가 주님의 어머니로 당연히 원죄로부터 성화됐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뛰어난 마리아론 학자이며 서방교회 마리아론에 많은 영향을 준 암브로시오 아우트페르트는 마리아의 승천 축일, 봉헌 축일 등에 관한 많은 글을 남겼다. 당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축일보다 성모승천, 정결례 축일 등이 더 강조됐다. 그는 성모를 순교자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 더 나아가 예수를 사랑하는 데 멈추지 않고 모든 이들을 사랑한 우리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중세 후기 성모의 승천과 무죄한 잉태에 관한 논쟁은 더 활기를 띈다. 이 시대 대부분 신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원죄없이 태어나신 분으로, 이 세상 어떤 이도 원죄를 면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성모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았으며, 원죄없이 태어나신 분이라는 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반면 프란치스코회 둔스 스코투스는 성모가 원죄없이 잉태됐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쟁은 둔스 스코투스를 지지하는 프란치스코회와 토마스 데 아퀴노를 지지하는 도미니코회 간 대결로 치닫게 했다.
 
한편 이 시대 대중들의 마리아 신심은 하느님을 엄격한 아버지로, 성모를 자애로운 대왕대비로 간주하는 외경에 바탕을 둔 허황된 성모 신심이 횡행했다.
 
토마스 데 아퀴노의 스승인 알베르토는 당시 예수와 성모를 동격으로 이해하는 분위기에 경종을 울린다. 하느님과 인간인 성모 사이에는 무한한 차이가 있음을 역설하며, 성모가 하느님 은총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통해 은총이 전해지는 것임을 인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성모의 동정
 
가장 모범적 신학자인 토마스 데 아퀴노 역시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 그는 「신학대전」에서 성모의 원죄없는 잉태에 반대 의견을 보이고 있다. 성모가 구원자의 모친이 됐을 때 원죄가 사해졌다는 것이다.
 
성경은 지극히 거룩한 성모가 출산 전은 물론 출산 후에도 동정이라고 말한다. 이는 성자의 권위를 위해, 그 어머니의 영예를 위해서도 합당한 일이다. 동정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하느님으로서, 인간으로서 완벽성을 지닌 예수 그리스도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다. 또 혼인한 동정녀에게서 아이가 태어나야 혼인도, 동정도 중요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평화신문, 2010년 9월 19일, 정리=백영민 기자]
 
 
(21) 르네상스 시기 교회 문헌에 나타난 성모님의 모습 : 개신교가 바라보는 성모공경과 연옥
 
마틴 루터를 비롯한 종교 개혁자들의 성모님에 대한 생각을 살펴본다. 근대는 유럽이 새로운 국면을 맞은 시기로, 인문주의와 인본주의라는 새로운 문화의 꽃을 피웠다.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은 성모님을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모상으로 그렸다. 중세 모든 철학이 신에 대해 집중했다면 인본주의는 사람에 대해 집중했다. 인본주의자들은 마리아 신심과 성인 공경을 미신행위로 여겼다. 여기에 마틴 루터와 칼빈 등 종교 개혁자들이 가세했다.
 
영국 존 헨리 뉴먼 추기경을 중심으로 하는 옥스퍼드 운동은 성모 신심에 큰 영향을 줬다. 옥스퍼드 운동(1833~1845)은 옥스퍼드대학교 젊은 교수들이 가톨릭 전통을 회복함으로써 영국 국교회를 쇄신하고자 한 운동으로, 이 운동을 통해 교회 내부적으로 수도원 부활 등 가톨릭 전통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가시적 변화가 일어났다. 이는 1854년 ''원죄 없으신 마리아 잉태'' 교의가 선포되고, 1950년 마리아 승천에 대한 교의가 선포되는 배경이 됐다.
 
에라스무스라는 학자는 성모 신심이 미신에 가까운 행위라고 비판했다. 진정한 종교 신심도 아니고 윤리적 내용도 결여된 겉치레식 신심이라는 것이다.
 
마틴 루터에 대한 평가는 양극단으로 나뉜다. 정신적 병약자라고 하는 이도 있고, 경건한 신앙인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그는 기도하고 고행하는 수도자 모습을 보여줬다. 그에게 하느님은 무서운 하느님이다. 루터가 세운 교회의 핵심 슬로건은 ''믿음만으로, 은총만으로, 성경만으로''다. 가톨릭교회 믿음은 행실로 보여주는 것이다.
 
개신교는 성모 공경을 반대하지만 루터가 처음부터 성모 공경을 반대한 것은 아니다. 일본인이 쓴 「루터와 마리아」를 보면 루터가 성모님 찬미가(마니피캇)에 대해 해설한 부분도 있고, 그가 가톨릭을 떠나기 전 성모님에 대해 강론한 것도 찾을 수 있다.
 
마틴 루터의 성모 공경
 
그는 성모 마리아의 완전한 동정성을 받아들였고, 마리아가 충만한 은총을 지녔다는 것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전적으로 성모 마리아의 덕성이 아닌 하느님 은총이라고 생각했다. 개신교 신자들은 우리도 은총을 받으면 성모님처럼 될 수 있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다. 루터는 자신을 추종하는 이들에게 마리아에게 중재기도를 할 것을 권유했고, 자신의 교회에서 예수 탄생 예고 축일을 지내길 원했다. 루터는 에페소공의회가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다''라고 결정한 것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이 공의회는 신앙에 어떤 새로운 것을 정한 것이 아니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신앙은 이미 처음부터 교회 안에 있었다. 복음과 성경에 포함돼 있는 것이다."
 
그는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 교리에도 상당히 접근해 있었다. "마리아는 출산 전, 출산 중, 출산 후에도 온전히 정결한 동정녀였다. 마리아는 원죄로부터 구원된 정결하고도 거룩한 처녀다. 하느님의 선물로 꾸며진 그의 영혼은 원죄로부터 정결하다."
 
그는 성모승천대축일 강론에서 "마리아는 교회 어머니요, 교회 원형이다. 교회 구성원일 뿐 아니라 구원 사명을 부여받은 교회 대표다. 마리아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다"라고 했다.
 
개신교가 가톨릭과 다른 점은 연옥에 관한 관념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루터의 95개 조항에는 대사(大赦) 논쟁이 있는데, 이는 개신교에서 ''면죄부''로 잘못 알려져 있다. 대사는 고해성사의 사죄 교리와 연옥에 대한 교리, 통공의 교리가 서로 맞물린 상태에서 베풀어지는 것이다.
 
고해성사로 죄의 사함을 받지만 죄에 대한 대가는 보속을 통해 치른다. 그러나 보속의 효력은 전적으로 보속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죄가 고해성사를 통해 사해져도 남은 보속은 연옥에 가서 치르게 된다.
 
개신교, 연옥 인정하지 않아
 
우리는 연옥에서 고통을 받는 사람을 위해 기도한다. 다른 사람을 위한 희생과 기도의 공로를 다른 영혼을 위해 돌릴 수 있다는 교리 때문에 가톨릭교회는 교회가 전ㆍ한대사를 베풀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개신교는 연옥을 인정하지 않기에 죽은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일이 없다. 연옥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아픔의 과정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을 기쁘게 만나기 위한 정화 과정이기도 하다. 지옥이 하느님과 결별을 의미한다면, 연옥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사랑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다. [평화신문, 2010년 10월 3일, 정리=이지혜 기자]
 
 
(22) 르네상스 시기 종교개혁 주장론자들의 성모 신심 : 올바른 성모신심 세우기 노력
 
18세기 유럽은 인간 지성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지성주의와 계몽주의의 지배 아래 있었다. 이 당시에도 다른 시대와 마찬가지로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을 지나치게 강조한 이들이 있었고, 이를 우상 숭배라 여기는 이들도 있었다.
 
대다수 계몽주의자들은 성모 신심을 이성적 균형이 결여된 행위라고 규정하고, 그리스도교 본질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시기에 마리아론은 철저하게 무시됐다. 많은 지역의 기도서들에서 마리아 축제들은 예수 탄생 예고 축일, 주님봉헌 축일, 방문 축일, 승천 축일 정도만 남고 삭제됐다. 또 계몽주의자들은 성모송을 경시하고, 묵주기도는 쓸데없는 반복기도라고 혹평했다.
 
이뿐 아니라 일부 주교들은 스카풀라와 묵주를 제거하도록 명하고, 성모 신심 서적 발행을 금지시켰다. 당시 스카풀라와 묵주를 자신을 악에서 구해주는 부적처럼 여기는 이가 많았다는 것을 고려할 때, 성모 신심에서 미신적 요소가 제거되는 것까지는 긍정적 비판으로 볼 수 있지만 신심 자체가 전부 무시되는 일은 온당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 시대 성모 신심을 주도했던 몇몇 인물들을 살펴보도록 한다. 먼저 성모 신심의 대가인 성 루이 몽포르는 레지오 마리애의 수호성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계몽주의자들이 성모 신심을 반대하는 것에 저항하며 올바른 성모 신심을 전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특히 레지오 마리애가 창설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가 펴낸 「성모님에 대한 참된 신심」이라는 책은 현재 레지오 단원 필독서로 읽히고 있을 정도다.
 
항구한 신앙과 신뢰 필요
 
그는 △ 성모 공경이 그리스도께 대한 공경을 감소시키거나 △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공경심 없이 형식적 신심행위 자체에 빠져 하느님 은총을 간구하고 △ 자신의 유익을 구하거나 재난을 피하기 위해 마리아에게 의지하고 기도하는 행위 등이 잘못된 신심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올바른 신심은 어린 아기가 어머니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하듯 성모에게 완전하게 의지하는 자세, 역경이 닥쳐도 변하지 않는 항구한 신앙과 신뢰를 가질 때 가능하다고 말했다.
 
성 알폰소 로드리게즈도 성모 신심을 옹호했던 이다. 그는 「마리아의 영광」이라는 책을 통해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모든 은총이 거쳐 나오는 중개자라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 구원을 위해서는 성모 마리아의 전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하느님 나라는 정의의 나라요, 성모 마리아의 나라는 자비의 왕국이라는 중세기 개념을 반복해 말했다.
 
더 나아가 그는 본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은총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성모 마리아에게 전지전능의 지위를 부여하기도 했다. 심지어 하느님께서 성모 마리아를 자신과 같게 만들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는 모두 하나요, 같은 희생으로 봉헌됐다고 주장해 반발을 샀다. 이와 같은 과장은 당시 이성 지상주의에 대한 반발로 간주된다.
 
요한 밥티스 반 케트비흐는 1720년 중세 많은 작가들을 인용, 성모 신심을 옹호하는 방대한 책을 펴냈다. 그는 성모 마리아는 예수와 함께 ''공동 구속자''라고 주장했다. 성모 마리아가 구세주를 낳았고, 우리 구원을 위해 구세주를 십자가에 바쳤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따라서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은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성모 마리아의 전구를 통해서만 죄인들에게 회개하는 새로운 마음이 주어진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우리 위해 기도하는 분
 
이런 주장에 대해 학자이자 도서관 직원이었던 무라토리는 성모 마리아는 여신(女神)이 아니며 죄를 사할 권한은 없다고 반박했다. 그는 성모 마리아가 변호자로 불리고, 공경받아야 함은 마땅하지만 죄를 사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했다. 또 성모 마리아의 역할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지 하느님께 명령하는 것은 아니며, 우리를 위해 전구할 수는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전구를 앞지르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평화신문, 2010년 10월 10일, 정리=이서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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