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오직 성경>에 대한 이해 - 검색자료 | 카테고리 | 천주교 | ||
---|---|---|---|---|
이전글 | 이전 글이 없습니다. | |||
다음글 | 시댁 때문에 미사에 참석 못하게 되는데... |3| | |||
작성자이삼용 | 작성일2011-07-06 | 조회수718 | 추천수0 | 신고 |
"오직"에 대한 이해 :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예수 이성호 (칼빈신학교 박사과정)
개혁주의 구호 가운데 "오직"이라는 말이 많이 들어간다. 대표적인 것으로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 이러한 "오직"은 개혁주의가 무엇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지만 그것이 잘못 이해될 때는 전혀 비개혁주의적인 신앙 양태를 가져오게 된다. 특히 "오직"은 듣는 사람에 따라서 매우 편협하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분명한 뜻을 알고 사용하여야 한다. 특히 우리는 이 "오직"이 어떠한 역사적 배경하에서 무엇을 반대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1. 오직믿음.
오직 믿음이라는 말이 잘못 이해되면 믿음만 있으면 되고 다른 것은 필요없다는 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종교개혁자들은 결코 이런식으로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 오직 믿음은 "믿음으로만 의롭게 됨(Justification by faith alone)"의 준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오직 믿음"은 칭의와 관계된 말이다. 칭의에 관한한 우리의 선행이나 행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우리의 선한 행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종교개혁자들은 우리의 선행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선행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하나님께 감사를 나타내는 중요한 방편이고, 이웃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게 된다. 종교개혁자들은 선행을 결코 부차적인 것으로 다루지 않았다. 다만 선행을 칭의와 연결시키지 않았을 뿐이다.
많은 개신교인들이 믿음을 전부로 선행을 부차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구원 받는 것을 가장 최고의 선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 첫째, 구원 받는 것이 최고 선인가? 둘째, 칭의와 구원을 동일하게 볼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구원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적어도 개혁자들은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말하였지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오직 믿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다른 신앙 덕목들 사랑과 소망과 같은 신학적 덕목들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 뿐 아니라 지혜와 같은 덕목들은 아예 교회에서 들어설 자리가 없게 만들었다. 성경을 보라. 우리의 믿음을 다룬 책도 많지만 잠언, 전도서, 아가서와 같은 책은 지혜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많은 목사들이 목회에 실패하는 것이 믿음이 적어서 실패하는가? 내가 보기에는 아니다. 많은 목사들이 지혜와 사랑이 없어서 목회에서 실패하고 있다. 오직 믿음은 단지 제한적인 의미에서 "오직 믿음"이다.
2. 오직 성경
오직 성경 역시 잘못 이해되면, 성경 책만 있으면 되고 다른 책은 필요없다는 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오직 성경이란 우리의 믿음과 생활에 있어서 성경이 최종적인 기준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다른 책은 필요없다는 말을 결코 함의하지 않는다. 예를들면, 개혁자들이 킹제임스 성경을 내 놓았을 때, 그들은 소위 외경[위경과 구분할 것]도 항상 같이 붙여서 출판하였다. 우리들은 외경에 대해서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개혁가들은 그것들이 우리 신앙 생활에 상당히 도움을 준다고 보았다. 그들이 거부한 것은 그것들을 정경(최고의 권위)으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종교개혁가들이 카톨릭 신학자보다 초대 교부들과 공의회 전통에 대해서 훨씬 해박하였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들은 단지 성경만 읽은 것이 아니라 교회의 전통, 특히 교부들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과 카톨릭이 차이가 있었던 것은 성경과 그것들을 동일한 권위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안타깝게도, 종교개혁 시대와는 정 반대로, 개신교는 우리의 전통(진정으로 카톨릭한 전통)에 대해서 너무 무지하다. 이것은 아마도 오직 성경을 잘못 이해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오직 성경은 "성경만 있으면 된다"라는 말이 아니다.
앞에서 말한 것이 오직 성경과 전통에 관한 것이라면 두 번째는 이성과 관계된 것이다. 오직 성경은 "이성은 필요없다"는 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개혁가들이 반대한 것은 이성의 사용자체가 아니라 잘못된 이성의 사용을 반대한 것이다. 개혁가들은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사용하여 신학을 변증하였다. 개혁가들이 반대한 것은 성경이 이성에 의해서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었지 이성의 사용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특히 합리주의자였던 소시니언주의자들과 논쟁하면서 더욱 두드러진 특징으로 나타난다. "오직 성경"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 "무조건 믿으라"는 말이 아니다. 삼위일체론이나 기독론에 사용된 용어들은 세상의 철학과 문화를 잘 받아들여서 교회에 정착시킨 개념들이다.
3. 오직 그리스도.
"오직 그리스도"라는 말 역시 잘못 이해될 때 지나치게 기독론 중심적인 신학과 신앙 양태가 교회 안에 두드러지게 된다. "예수만 잘 믿으면 된다"라는 사고 방식은 신자로 하여금 균형잡힌 신앙생활을 하는데 방해를 준다. 또한 신학을 함에 있어서도 성령님의 사역에 대한 현저한 무시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
오직 그리스도는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라는 말이다. 따라서 신부나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될 수 없고, 마리아가 중보녀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오직 그리스도를 "예수만 잘 믿으면 된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개혁주의를 현저하게 오해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예수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님도 필요하고 교회의 보살핌도 필요하고 피조물도 우리에게 필요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중보자이기 때문이다.
이것과 관련하여 "만인 제사장설"을 들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내용을 오해하여 모든 성도가 다 평등하고 목사나 장로와 같은 직분자가 궁극적으로 필요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만인 제사장설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개혁자 어느누구도 직분의 필요성을 평가절하 한 적이 없다. 오히려 그들은 직분을 더욱 고귀하게 만든 장본인들이다. 그들이 반대한 것은 성직자와 평신도를 나누는 성직주의였다. 그들은 성직자들이 그리스도와 평신도사이의 중보자가 된다는 생각을 거부하고, 모두가 동일하게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으로 직접 기도할 수 있고 성경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직분자나 평신도의 구분 자체를 폐지한 것은 아니었다. 개혁가들은 만인 제사장설에 충실하면서도 말씀을 가르치는 목사를 제일 중요한 직분으로 생각하였다. 이것을 두고 개혁가들이 만인 제사장 설에 충실하지 못하였다고 비판하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엉뚱한 개념을 가지고 개혁가들을 비판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오직"이라는 단어를 너무 개혁주의자들이 의도한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사용하는 모습을 많이 본다. 이제는 그 원래의 의미를 살려야 할 때이다.
[성경유일주의]의 근거에 대한 논리적 분석 김일준 (아우구스티노)
1. 문제제기
가톨릭과 개신교의 오랜 논쟁은 다양한 주제에 걸쳐 지금도 계속 나타난다. 하나이신 하느님, 삼위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부활 그리고 인류구원이라는 가장 중요한 공통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신교 측은 성모공경, 연옥이나 교황, 제2경전, 고백성사나 성체성사 등 많은 가톨릭교리를 비판해왔다.
하지만, 그 모든 논쟁의 시각차이는 근본적으로 개신교의 ''''오직 성경만''''이 구원이라거나, 절대진리라거나, 혹은 신앙의 근거라는 [성경유일주의]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가장 핵심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이상 위에 예시된 주제들에 대한 토론은 피상적이고 또 평행선을 달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신학과 교리는 분명 신앙생활에 많은 도움을 준다. 하지만 신학과 교리가 신앙 그 자체는 아님이 분명하다. 그러한 측면에서 가톨릭과 개신교의 신학적, 교리적 논쟁은 신앙생활에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에 머물러야 한다. 적절한 자제와 분별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차이에 대한 논쟁은 올바른 신앙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본 글은 위에 언급한 ''''오직 성경뿐''''이라는 개신교 측의 주장을 제한된 범위 안에서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그 타당성을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논증의 기준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오직 성경뿐’ 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일체의 근거는 [성경유일주의]에 입각하여 성경으로 제한한다.
둘째, 근거로 제시된 성경구절이 과연 ‘오직 성경뿐’이라는 주장을 뒷받침 하는지 논리적으로 분석한다.
셋째, [성경유일주의] 의 결정적 근거가 된다고 알려진 고린토전서 4장 6절, 요한 계시록 22장 18절,19절 그리고 그 외에 추가로 제시된 성경구절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분석한다.
넷째, 본 논증의 범위는 개신교에서 주장하는 ‘오로지 성경뿐’ 이라는 주장으로 제한한다.
2. 고린토전서 4장 6절 분석
[성경유일주의]의 가장 중요한 근거 중 하나인 고린토전서 4장 6절을 한글개역 성경에서 찾아보자.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를 살펴보자. 개신교 측은 이 문구를 ‘기록된 말씀인 성경 외에는 어떠한 추가적인 가르침도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라는 주장의 근거로 제시한다. 하지만 실제 의미도 과연 그러한지 살펴보도록 하자. 본문에서 바오로 사도는 분명 무언가를 인용하고 있다. 누구의 말인지, 어떤 의미인지 여러 버전의 성경을 살펴보자. “Now, brothers, I have applied these things to myself and Apollos for your benefit, so that you may learn from us the meaning of the saying, “Do not go beyond what is written.” Then you will not take pride in one man over against another“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위는 가장 널리 읽히는 NIV 번역의 해당 구절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Do not go beyond what is written.” 의 바로 앞에 있는 “the saying” 이다. 인용된 문구가 바오로 사도 이전부터 존재하는 일종의 교훈, 가르침 이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And these things, brethren, I have in a figure transferred to myself and to Apllos for your sake; that ye might learn in us not to think of men above that which is written, that no one of you be puffed up for one against another.” (KJV, King James Version) 일부 침례교파에서 유일한 성경이라 주장하는 KJV (킹 제임스 성경)을 살펴보면, 해당 문구가 인용되었다는 두드러진 표시는 없다. 하지만 다른 번역본들을 살펴본 결과 해당 문구는 분명히 어디에선가 인용되었다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또 한가지 KJV 번역에는 주목할 만한 특이점이 있다. “not to think of men above that which is written” 는 한국어로 직역하면, “기록된 것을 넘어서는 인간이 있다 생각하지 말라” 이다. 다시 말하면, 본문에서 바오로 사도는 “기록된 것” 과 인간을 비교하며, “기록된 것”의 절대우위를 강조한다. 흥미롭게도 이 말은 “기록된 것”을 넘어서려는 인간에 관한 것이라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이제, 고린토전서의 4장 6절을 전체적인 배경과 함께 살펴보자. 고린토전서는 당시 고린토 교회안에 존재했던 교우들간의 분열과 반목을 타이르는 바오로 사도의 편지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구약성경의 여러 구절을 인용하면서, 하느님 앞에서 인간의 지혜란 극히 작은 것임을 누차 강조한다. 어떤 구절을 인용했는지 고린토전서의 앞 부분을 잠시 살펴보자.
“내가 지혜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의 총명을 폐하리라” (고전1:19)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고전1:31)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고전3:19)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고전3:20)
위 구절들은 각각 이사야서 29장14절, 예레미아서 9장 23절, 욥기 5장 13절 등을 인용하거나 차용한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과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가르친 예수님의 말씀 외에 인간의 오만함이 교회 내부에 팽배함을 질타하고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기록한 말씀”은 곧 ‘예수님의 말씀’을 뜻하는 것으로도 읽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성경은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라는 식으로 그 출처를 분명히 밝히는 기술원칙을 가지고 있다. 또 전체적인 맥락을 살펴보면 “기록한 말씀”이란 문구는 앞서 인용한 구약의 경고와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기록한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을 연결 짓는 해석은 곧 ‘예수님께서 구약의 말씀들을 기록했다’는 의미가 되어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기록된 말씀”이란 최소한 예수님과는 상관이 없어야 논리적으로 맞다.
올바른 해석이 되려면, 해당 문구가 전체적인 서신의 내용과 일관되게 구약의 말씀과 연관되어야 한다. 그러한 이유로4장 6절에 나타난 “기록한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 이라는 뜻이 아니라, ‘구약에 나타난 하느님의 경고’가 되어야 한다.‘ 또 그 의미는 ‘인간의 오만함에 대한 하느님의 경고’와는 다르게 예수님의 말씀에 기초한 사도들의 가르침을 넘어서고 있는 교우들의 인간적 오만함을 경고하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는 문구가 개신교 측의 주장대로 ‘성경의 말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추가되어서는 안 된다’ 라는 의미라면, 고린토 서신 이 후에는 어떠한 새로운 기록이나 가르침도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기록된 시기가 가장 이르다는 마르코 복음서는 고린토 서신보다 약간 앞선 또는 약간 후대인 AD 60년 전후에 쓰여졌다. 마태오 복음서와 루가 복음서 역시 고린토 서신보다 후대인 AD 70년대에 쓰여졌고, 요한 복음서는 학설에 따라서는 AD 1세기 말부터 AD 2세기 이 후로까지 주장된다. 마찬가지로 다른 많은 신약성경 역시 고린토 서신 이후에 쓰여졌다.
따라서, 4장 6절의 “기록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는 고린토전서의 문구는 “기록된 성경 외에는 어떠한 추가적 가르침도 허용되어서는 안된다’ 는 개신교의 해석과는 상황적으로 또 논리적으로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면, 문제의 고린토전서 4장 6절을 가톨릭과 개신교가 공동으로 번역한 [공동번역 성서]는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살펴보자.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지금까지 이 모든 일을 아폴로와 나의 경우를 들어서 설명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우리를 본받아 ‘한계를 넘지 말라”는 교훈을 배워 남을 깔보고 주제넘게 자기 편을 추켜 올리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공동번역)
공동번역의 특징은 현대한국어 번역이라는 점 외에도 본문을 최대한 원래의 의미에 가깝도록 의역했다는 것이다. 참고로 2005년 11월부터 한국 가톨릭교회는 [새 번역 성경]을 공식전례에 사용하는데, [새 번역 성경]에는 개신교 성경과 같이 “기록된 것에서 벗어나지 말라” 라고 직역한다. 하지만 그 의미는 공동번역에서 나타난 것처럼"한계를 넘지말라", 또는 앞서 논증한 바와 같이 “‘하느님 앞에 자만하지 말라’는 구약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것이다.
정리해서 이야기 하면,
첫째, 고린토전서는 인간의 오만함을 꾸짖는 일관된 주제의 구약성경을 인용하고 있다.
둘째,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말씀은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기술 원칙을 따르고 있다.
셋째, 따라서 해당 문구는 인간의 오만함을 꾸짖는 구약의 가르침이다.
넷째, 신약성경의 상당수는 고린토전서 이 후에 쓰여졌다.
결국, “기록 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는 본문의 의미는 ‘기록된 말씀 외에는 어떠한 추가적 가르침도 허용 되어서는 안 된다’ 고 해석해야 한다는 개신교 측의 주장과는 상황적 논리적으로 연관이 없다.
3. 요한 계시록 22장 18절, 19절 분석
앞서 살펴본 고린토전서 4장 6절과 더불어 [성서유일주의]의 가장 결정적인 근거로 제시되는 요한계시록 22장 18절, 19절을 개역한글 성경에서 찾아보자.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위의 구절은 앞서 살펴본 고린토전서 4장 6절 보다 더욱 직접적으로 ‘이 책에 첨삭하는 것’을 강력한 어조로 금하고 있다. 개신교 측은 이 구절을 ''''성경에 첨삭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라 해석하여 [성서유일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근거로 제시한다. 기타 번역본과의 주목할만한 차이점이 없으므로 위의 번역을 가지고 분석하도록 한다.
질문은 다음과 같다.
첫째,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의 “이것”은 무엇인가?
둘째, “이 책에 기록된”, ‘이 책의 예언의 말씀” 에 등장하는 “이 책”은 무엇인가?
요한 계시록의 저자는 요한 사도라는 학설이 일반적이지만, 그 외에도 요한 사도는 AD 50년 경에 이미 순교했고 AD 2세기 경의 또 다른 요한이라는 학설도 있다. 따라서 편찬연대 또한 편찬자가 어떤 요한이었는가에 따라 AD 1세기 후반에서 AD 2세기까지 차이가 생기게 된다. 그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요한 계시록, 요한 복음서, 요한 서신들은 한 사람에 의해 쓰여졌다는 것에는 대부분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또한 문제의 요한 계시록은 신약성경 각 권의 편찬연대에서 비교적 후대에 쓰여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가톨릭 교회는 AD 397년 카르타고 회의에서 현재와 같은 신약성경27권을 정경으로 확정 짓는다. 그 이전에는 수천 권의 성경사본이 존재했지만, 이때부터 현재와 같은 27권의 신약성경이 나타난 것이다. 또한 AD 405년 가톨릭 교회의 공식성경인 라틴어 불가타 번역이 완성되었다.
문제는 요한 계시록이 AD 397년 이 후에 쓰여지지 않은 이상, 저자가 27권의 신약성경을 두고 “이 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개연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첫 번째 질문인 “이것”의 정체는 개신교 측에서 주장하는 성경이 될 수가 없다. 이 점은 두 번째 질문의 “이 책”에도 똑같이 해당된다.
그러면 과연 해당 본문에 등장하는 “이 것” 또는 “이 책”은 무엇인가?
정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바로 요한 계시록 일 수 밖에 없다. 본문의 내용을 잘 살펴보면, 저자는 ‘자신이 기록한 예언들’이 왜곡되고, 첨가되고, 삭제되는 것을 경고한다. 즉, 본문에 등장하는 “이것” 그리고 “이 책”은 요한 계시록 자체를 가리키는 단어이지, 신약성경 전체 혹은 성경 전체와는 상황적으로 또 논리적으로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정리하면,
첫째, 요한 계시록은 가장 후대로 추정해도 최소한 AD 2세기에 이미 쓰여졌다. 둘째, 신약성서 27권은 AD 397년에 확정되었으며 그 이전에는 수 천 권의 사본만이 존재했다.
셋째, 요한계시록의 저자가 두 세기 후에나 확정되는 신약성경을 두고 “이 것” 또는 “이 책”이라 지칭할 개연성은 없다.
넷째, 본문의 “이것” 그리고 “이 책”은 요한 계시록을 가리키는 것이다.
결국, 요한 계시록 22장 18절, 19절을 ‘성경에 무엇이든 첨삭하는 것을 금지한다’ 라고 해석하는 개신교 측의 주장은 상황적 그리고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아이러니한 것은 요한 계시록을 지칭하는 “어 것” 그리고 “이 책”을 성경 전체라고 확대 왜곡하는 주장이야말로 그 구절이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는 행위라는 것이다.
4. 그 외에 제시된 성경구절들
[성경유일주의]를 뒷받침 한다고 주장되는 그 외의 성경구절을 아래에 첨부한다. 물론 제시된 성경구절은 더 많았지만, 주제와 너무 동떨어진 구절들은 본 글에서는 제외하였다. 참고로 다른 번역본에서도 주목할만한 차이점은 없다.
간단한 원칙을 먼저 살펴보자.
‘A는 B이다’ 가 반드시 참이어도, ‘오직 A만이 B이다’ 는 반드시 참일 수는 없다. ‘A는 B이다’ 가 반드시 참이어도, ‘A와 B는 동일한 것’ 이 반드시 참일 수는 없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참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서 살펴보자.
‘독수리는 새이다’ 가 진실이어도, ‘오직 독수리만이 새이다’ 는 거짓이다. 마찬가지로, ‘독수리와 새는 동일하다’ 역시 거짓이다.
즉, ‘A는 B이다’ 라는 명제는 ‘오직 A만이 B이다’ 또는 ‘A와 B는 동일한 것’ 이라는 명제와는 논리적으로 다르다.
[성경유일주의]의 근거로 제시된 성경구절은 공통적으로 ‘성경은 절대진리이신 하느님의 말씀’ 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 명제는 어떤 경우에도 ‘오직 성경만이 절대진리이신 하느님의 말씀’ 이라는 명제와는 논리적으로 연관되지 않는다.
-이하 제시된 성경구절 (개역한글판)
(시편 33:6)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시편 33:9)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시편 119:89) 여호와여 주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잠언 30:5)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마가 1:3)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마가 13:31)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누가 10:20)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누가 18:31)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누가 21:22)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니라. (누가 24:44)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요한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요한 12:16)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 인줄 생각났더라. (사도행전 24:14)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사도행전 55: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로마 4:23)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로마 15:4)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고전 9:10)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고전 15:54)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베전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베전 1: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베후 1:20)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베후 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다니엘 10:21)오직 내가 먼저 "진리의 글"에 기록된 것으로 네게 보이리라 나를 도와서 그들을 대적하는 자는 너희 군 미가엘 뿐이니라. (다니엘 12:1)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히브리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유다 1:4)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요한계시록 21:27)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 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이 외에도 무수한 성경구절이 ‘성경은 절대진리이신 하느님의 말씀’ 임을 직접적으로 또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다. 하지만 앞서 밝힌 것과 같이 ‘오로지 성경만이 절대진리이신 하느님의 말씀’ 이라는 뜻으로 해석되는 구절은 단 한 군데도 없다.
‘성경은 절대진리이신 하느님의 말씀’ 이라는 명제는 기독교 신앙의 절대적이고 근본적인 전제이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은 성령강림과 더불어 탄생한 성교회 역사 속에서 확고하게 지켜져 왔다. 반면에 위의 명제와 전혀 논리적으로 연관되지 않는 ‘오직 성경뿐’ 이란 주장은 16세기 마틴 루터에 의해 비로소 등장한다. 그러나 제시된 성경구절 중 어느 한 구절도 ‘오직 성경뿐’이란 주장을 뒷받침하지 않는다.
정리하자면,
첫째, 제시된 구절은 공통적으로 ‘성경은 절대진리이신 하느님의 말씀’임을 밝히고 있다.
둘째, 하지만 그것은 “오직 성경만이 절대진리’ 또는 ‘오직 성경만이 하느님의 말씀’ 이란 명제와는 논리적으로 다르다.
결국, 제시된 구절을 ‘오직 성경만이 절대진리’ 또는 ‘오직 성경만이 하느님의 말씀’ 이라 해석하는 것은 성경을 왜곡하는 것이다.
5. 결론
[성경유일주의]는 그 자체가 지닌 원칙에 의해서 ''''오직 성경안에서'''' 그 근거를 제시해야한다. 하지만 근거로 제시된 고린토전서 4장 6절, 요한 계시록 22장 18절, 19절 그리고 그 외의 성경구절 중 어느 것도 ''''오직 성경만이 하느님의 말씀'''' 또는 ''''오직 성경만이 진리'''' 라는 주장을 뒷받침 하지 못한다. 고린토전서의 본문은 단순히 인간적인 오만을 경고하고 있고, 요한 계시록은 기록된 예언에 제한되어 있다. 그 외의 구절들 역시 ‘성경은 절대진리이신 하느님의 말씀’ 라는 뜻을 가질 뿐 ''''오직 성경뿐'''' 이라는 의미는 포함하지 않는다. 특히, 요한 계시록의 확대 왜곡해석은 요한 계시록 스스로가 강력하고 경고하고 있는 행위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종합하자면, 제시된 근거들에 제한했을 때, 개신교 측의 [성경유일주의]는 근거가 없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6. 참고
1) 본 글의 성경구절은 몇 분의 도움의 결과이나 개인정보 보호원칙에 따라 밝히지 않음 2) 본 글의 모든 내용은 성경구절을 제외하고는 외부자료의 인용을 포함하지 않음 3) 본 글의 모든 내용은 한국 가톨릭 교회의 공식 지침과 아무런 연관이 없음 4) 본 글의 모든 내용은 적절한 법의 보호를 받음 5) 본 글의 모든 내용에 대한 문의사항은 xiungnu@hotmail.com으로 보내주시길 바람
(출처 : ''''<오직성경> 구호는 어떻게 해서 탄생했는가'''' - 네이버 지식iN)
사도들이 위반한 오직성경논리 평점 : - 1 (1 명) 나도 평가하기 dkekqxj 조회 :119 답변 : 3
답변이 완료된 질문입니다. (2006-03-31 17:46 작성) 신고
오직성경뿐이다
성경 어디에 그런 내용이 나왓냐? 성경이 모든것을 담고 있다. 성경만이 무오류하다. 이말들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틀린말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그 복음을 믿고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것, 그 믿음을 통해 구원받는다는것. 참으로 아름다운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런데 오직성경은 왜이리 뚱딴지 같이 들릴까요?
성경 스스로 오직성경, 성경에 모든것이 담겻다라는것을 증언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마지막구절 " 이밖에도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책으로 남긴다면 이세상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것이다"
또한 "우리가 전한 또 다른 편지" 라고 언급하는 그 또다른 편지는 아직까지도 발견되지 못하여 성경이 되지 못햇습니다. 그런데도 현제 66권 성경만이 모든것을 담고 있을까요?
다음 역사는 어떻게 설명됩니까?
초기 기독교 신자들에게 무자비하게 탄압을 가하던 로마박해시절, 순교자들의 지하은둔지 카타콤에서는 죽은자들을 위한 기도와 비석이 수두룩하게 출품됩니다.
성경 어디에 죽은자들을 위한 기도가 나왓냐면서요?? 성경에 정확히 안나왓으니 천주교의 연옥교리와 죽은자들을 위한 기도는 거짓이라면서요??
그런데 로마박해시절 초기기독교 순교자들과 신자들은 왜 죽은자들을 위한 기도를 했나요? 그들은 우리보다 예수님과 더 가까운 시대에 살앗고, 사도들과 그 제자들로부터 직접적으로 복음을 전해들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반성경적 행위를 한 자들일까요?
사도들에게 직접적으로 복음을 전달받은 사람들이 성경에 안 나온 행위를. 반성경적이라고 주장되는 그 행동을 한 사람들일까요?
개신교인여러분 . 기독교 역사좀 공부하시고 오직성경을 논하시기 바랍니다.
오직성경이 틀리다는 또 다른 설명을 하다 더 드리지요.
오직성경대로라면, 오직성경에 모든 교리와 진실이 다 담겨져 있어서 성경외의 교리는 모두 거짓이라면말이죠. 왜 수많은 개신교이단종파들이 생겨낫습니까? 그들의 신념과 구호도 오직성경이라는것을 모릅니까?
정답은 오직성경만으로는 진실된 하나의 방법을 함축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기에 수천갈래의 종파들이 나오는것입니다. 위에 설명한 카타콤의 죽은자들을 위해 기도햇던 초기기독교 순교자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출처 : ''''사도들이 위반한 오직성경논리'''' - 네이버 지식iN) |
||||
태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