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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이스라엘의 예언자, 오늘날의 예언자: 고대 이스라엘에 새로운 내면이 탄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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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4-23 조회수4,594 추천수0

[이스라엘의 예언자, 오늘날의 예언자] 고대 이스라엘에 새로운 내면이 탄생하다

 

 

고대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활동 양식은 그 이전 시기에서는 보기 힘든 것이었다. 예를 들어 보자.

 

 

신랄한 비판

 

예언자들은 때로 신랄하리만큼 직접적으로 지적했다. 불의한 지도층의 악행을 비판하는 미카 예언자는 “너희는 선을 미워하고 악을 사랑하며 사람들의 살갗을 벗겨 내고 뼈에서 살을 발라낸다.”(3,2)고 고발한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제 내가 너희 가운데 길들일 수 없는 뱀과 독사를 보내니 그것들이 너희를 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8,17)고 말한다.

 

이사야 예언자는 아예 이렇게 단언했다. “너희가 팔을 벌려 기도할지라도 나는 너희 앞에서 내 눈을 가려 버리리라. 너희가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한다 할지라도 나는 들어 주지 않으리라. 너희의 손은 피로 가득하다”(1,15).

 

아마 평범한 독자라면 이런 표현이 조금 심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예언서를 몇 장만 뒤적여 보면 이런 표현은 쉽게 볼 수 있다. 상대방에게 맵고 쓴 표현을 거침없이 내뱉는 것이 예언자들에게 드문 일은 아니었다.

 

 

독특한 상징 행위

 

예언자들은 독특한 행위로도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예레미야의 여러 가지 상징 행위는 유명하다.

 

그는 아마포 띠를 허리에 두르고 살다가 바위 틈새에 숨겨 두기도 했고(13,1-5 참조), 사람들 보는 앞에서 일부러 옹기그릇을 깨뜨리기도 하였다(18-19장 참조). 그리고 “끈과 나무로 멍에를 만들어 그것을 목에 메어라.”(27,2)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기도 하였다.

 

이사야 예언자는 아예 “삼 년 동안 알몸과 맨발로”(20,3)다녔다. 그리고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기도 하였다. 이사야는 “커다란 서판”에 “마헤르 살랄 하스 바즈를 위하여”(‘약탈물은 재빨리, 노략물은 날래게.’)라고 쓰고, 아들 이름도 그렇게 지었다.

 

 

급박한 내면의 요구

 

그런데 왜 예언자들은 이런 언어와 방식을 써야 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 이유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는 어떤 급박하고 절대적인 내면의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라도 눈길을 끌어서 하느님 백성인 형제들에게 반드시 알려야 할 그 무엇이 마음속에서 요동쳤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런 요구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라 말한다.

 

사실 저항 예언자들에게는 모든 공식적 방법이 막혀 있었다. 저항 예언자들은 엘리트들의 공감이나 협조를 얻기는커녕 탄압받았던 사람들이다. 엘리야는 임금에게 쫓겨 다니며 생사를 걱정해야 했다. 다른 예언자들도 무시를 당하거나 따돌림을 당하였다.

 

이들은 성전의 의례나 권위를 통한 ‘정통적 방법’으로 자신들의 메시지를 전달할 방법이 없던 사람들이었다. 거리에서 대중에게 직접 호소하는 방법밖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우리 하느님 백성이 이대로 가면 망한다.’ ‘주님의 큰 분노가 내릴 것이다.’ ‘지금이라도 주님께 돌아가 오직 주님만 섬기며 살아야 한다.’는 말을 급히 외쳐야만 했다. 내면의 요구는 요동치는데 전달할 길은 막혀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표현과 활동 방식은 평범할 수 없었다.

 

 

이스라엘 가난의 역사

 

그런데 이런 현상에는 더 근본적인 배경이 있다. 먼저 사회적 경제적 변화가 중요하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가난’이 이 시대를 기점으로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이다. 창세기가 전하는 아주 옛날부터 이스라엘은 작고 약한 집안이었다. 아브라함 등 선조들은 어엿한 나라를 세운 적이 없다. 가족이나 부족 단위로 떠돌던 백성이었다.

 

이집트 종살이 시대나 광야 시대도 마찬가지였다. 왕정을 세울 무렵에도 이스라엘은 가난한 백성이었다. 왕정 초반기까지 하느님 백성의 내부에 빈부 격차가 문제가 되었다는 기록은 좀처럼 찾아 보기 힘들다.

 

온 백성이 가난으로 힘들었지만, 가난한 백성은 서로 고통을 나누고 도와주며 위로하고 일으켜 주었을 것이다. 몸은 힘들어도 그들의 마음은 하나였다.

 

그러나 왕정 후반기에 사정은 달라졌다. 가난한 사람을 지칭하는 전통적인 표현인 고아, 과부, 레위, 이방인에 더하여, ‘달’(가련한 사람), ‘에브욘’(멸시당하는 사람), ‘아니’(빼앗긴 사람), ‘오니’(고통), ‘아나브’(겸손한 사람), ‘사키르’(날품팔이) 등의 표현과 성찰이 등장했다(지난 호 참조). 이들의 반대편에는 막대한 부를 축적한 부유한 계급이 생겼다.

 

이제는 모두가 가난한 시대가 아니라, 일부만 가난한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하느님 백성의 역사에 새로운 종류의 가난이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종교와 신학의 역사에 새로운 장면이 등장했다.

 

 

매달릴 곳이 없는 사람들

 

이 시기에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사회 안전망’이 무너졌을 것이다. 고대 근동 세계에서는 지파나 씨족별로 고아와 과부 등 가난한 친척들을 돌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스라엘의 독특한 희년 제도나 구원자 제도 등도 기본적으로 혈연을 바탕으로 작동하는 사회 안전망의 구실을 했다. 그런데 왕정 후반기에는 이런 제도가 제 기능을 하지 않았다. 새로운 종류의 가난이 확산될 무렵, 이런 제도도 무너져 내렸다.

 

이제 가난한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매달릴 곳은 사법 제도였다. 마지막으로 재판정에서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부패한 상류층은 사법 제도마저 주물렀다.

 

이사야 예언자는 “좋은 것을 나쁘다 하고 나쁜 것을 좋다 하는 자들! 어둠을 빛으로 만들고 빛을 어둠으로 만드는 자들!”(5,20)을 고발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매달릴 곳이 없어 보였다.

 

 

개인 탄원의 확산

 

종교사학파의 학자들은 이 시기에 개인 탄원 문학이 널리 확산되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개인 탄원 문학의 특징은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하느님께 호소하고 하느님의 관심과 은총을 간절히 청하는 것이다.

 

‘저의 처지가 참으로 답답하고 한심합니다. 당신은 아직 저의 주님이십니까? 하느님 그래도 저는 당신밖에는 없습니다. 제발 저를 돌아보시고 저를 잊지 마소서.’ 이런 내용이 개인 탄원 문학의 대표적인 표현이다.

 

전통적 제도나 의례로 위로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결국 하느님에 매달렸다. 시편과 예언서와 지혜 문학 등에 널리 분포한 개인 탄원 문학은, 형식이 무척 다채롭다는 특징이 있다. 이 시기에 등장한 다양한 종류의 가난한 사람이 토해내는 간절한 말씀들이 그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탄원(Klage)은 개인 탄원과 공동체 탄원으로 나누어 이해한다. 물론 이 둘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도, 어느 것이 더 먼저 시작했는지를 규명하는 일도 거의 불가능하다. 개인 탄원 문학은 왕정 후반기에 탄생한 것은 아니지만, 왕정 후반기부터 대단히 확산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물론 이어지는 유배와 유배 이후 시기에도 개인 탄원 문학은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개인 탄원 문학이 확산된 배경에는 공동체 탄원 의례가 무력화된 상황이 있다.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를 이끄는 정치적 종교적 엘리트들은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데 적극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을 편드는 일부 예언자를 박해하였다.

 

‘우리 공동체가 힘들고 백성의 일부는 무척 가난하여 고통받습니다. 저희는 하느님의 위로와 관심을 간절히 청합니다.’ 그들은 이런 내용의 의례를 즐겨 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망국 직전까지 하느님의 뜻을 알지 못했다. 그들의 의례는 ‘왕조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튼튼하고 임금은 만수무강하소서!’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가난한 사람들은 일부 예언자를 제외하고는 하느님 백성 안에서 위로를 찾지 못했다. 가난한 사람들이 하소연할 데라고는 그들 마음에 계신 하느님밖에는 없었다.

 

 

새로운 내면의 탄생

 

그리하여 이 시기의 하느님 백성 내부에 ‘서로 다른 믿음의 무리’가 탄생했다. 조상도 전통도 핏줄도 같은 하나의 백성이지만, ‘너와 나의 믿음은 다르다.’고 말하는 무리가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 백성은 이제 믿음이 다른 무리로 세분화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하느님 백성 안에 믿음으로 구별되는 무리를 안다. 예수님 시대에는 사두가이, 바리사이, 젤롯당 등이 있었다. 구약 성경에도 제2이사야 계열의 신학자, 신명기계 신학자, 예레미야-호세아 계열의 신학자 등으로 나뉜다. 같은 조상에 같은 전승을 물려받았지만 믿음의 결이 조금씩 차이가 나는 집단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렇게 믿음의 특징으로 구별되는 무리가 언제 처음 출현했을까? 아마도 이 시기의 예언자들일 가능성이 크다.

 

이를테면 엘리야의 믿음과 아합의 믿음은 서로 달랐다. 아합이나 엘리야나 같은 하느님 백성의 일원이다. 하지만 이들은 전혀 다른 하느님을 섬겼다. 예언자들은 왕실의 믿음과 자신들의 믿음이 다르다는 확신을 지녔다. 그리고 ‘임금과 다른 믿음 때문에’ 박해와 탄압이 이어졌다. 이사야나 예레미야 등 중앙의 예언자들 가운데 변방의 예언자와 교감하는 사람들은 ‘그 믿음 때문에’ 따돌림을 당해야 했다. 그들은 내면으로 구별되는 사람들이었다.

 

결국 예언자들의 내면은 ‘올바른 믿음’을 제대로 알려야 하는 급박하고 절대적인 요구로 들끓었다. 그래서 그들은 신랄한 언어를 내뱉었고, 여러 상징 행위 등을 통해 사람들에게 외쳐야 했다.

 

그러면 그들이 불이익을 감수하고 때로는 생명의 위협을 극복하면서까지 외치려던 내면의 외침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다음 호에서 그들의 내면에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자.

 

*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 -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으로 고대 근동과 구약 성경을 연구하는 평신도 신학자이다. 주교회의 복음선교위원회 위원이자 의정부교구 사목평의회 위원이다. 저서로 「구약 성경과 신들」과 「신명기 주해」 등이 있다.

 

[경향잡지, 2018년 4월호,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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