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예수님 이야기64: 하느님 나라에 들려면(루카 18,18-3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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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5-21 | 조회수3,568 | 추천수0 | |
[이창훈 위원의 예수님 이야기 - 루카복음 중심으로] (64) 하느님 나라에 들려면(루카 18,18-30) 은총 청하며 겸손으로 주님을 따른 사람들
- 가진 것을 버리고 스승을 따랐다는 베드로의 말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 때문에 집이나 아내,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여러 곱절로 되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사진은 예루살렘 베드로 회개(통곡) 성당 내부의 베드로와 예수님에 관한 벽화. 가톨릭평화신문 DB.
영원한 생명, 계명의 준수와 재물에 대한 집착, 따름과 버림…. 부자 권력가와 예수님의 대화, 그에 이은 베드로의 발언과 예수님의 답변에서 생각해 볼 화두들입니다. 이 화두들이 어떻게 관련되는지 살펴봅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부자(18,18-27)
어떤 권력가가 예수님께 “선하신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묻는 사람은 권력가입니다. 학자들은 권력가를 사회의 유력 지도층이라고 이해합니다. 종교 지도자라면 예수님을 떠보려는 의도가 아니고서는 이런 질문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신이 전문가라고 여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음 자체가 진정성을 띤 것이라면 예수님을 “선하신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말마디에는 존경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선하다”고 부르는 것에 대해 단호히 거부하십니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18,19) 이 말씀은 글자 그대로 하느님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하심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합니다. 바로 앞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 끝에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18,14)고 말씀하신 것을 떠올린다면 당신을 “선하신” 분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아니라고 하시는 것도 당연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다음에 권력가의 질문과 관련해 말씀하십니다. 먼저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고 물으시면서 “간음해서는 안 된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는 계명들을 언급하십니다.(18,20) 이 계명들은 모두 십계명에 나오는 것들이지요. 예수님의 이 말씀은 십계명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임을 시사합니다. 그 사람은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18,21)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다고 말하는 것은 그만큼 율법을 지키는 데에도 충실해 왔다고 자랑스럽게 밝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너에게 아직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십니다.(18,22)
이 말씀을 세 부분으로 나눠 살펴봅니다. 우선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는 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에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 부족한 것을 채우는 길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에 보화를 쌓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는 일은 분명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와서 예수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줄 뿐 아니라 그다음에는 와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보면 권력자의 질문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였는데, 예수님의 답변은 ‘모든 것을 버리고 제자가 되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을 따르면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권력가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루카 복음사가는 “매우 슬퍼하였다”고 전합니다. 그 이유를 “그가 큰 부자였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합니다.(18,23) 여기서 조심스럽게 살펴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권력가는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주라는 말씀이 너무 큰 압박으로 와 닿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권력가는 구원에 대한 열망과 함께 어느 정도는 예수님을 따를 의향도 있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선하신 선생님”이라는 존경의 표현이 이런 추측을 뒷받침해 줍니다. 그러나 그는 재산을 다 팔라는 말씀에 그만 주저앉고 맙니다. 그는 계명도 어려서부터 충실히 지켜왔을 정도로 나름대로 잘 살았습니다만, 그가 가진 많은 재물에서 자유롭지가 못했습니다. 재물이 그의 열려 있던 마음, 적어도 열려 있고자 하는 마음을 닫게 만든 것입니다. 그는 매우 슬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하고 말하지요.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라도 하느님께는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18,24-27)
예수님의 이 마지막 말씀은 이 일화의 분위기를 완전히 반전시킵니다. 이 앞까지는 모두 사람이 어떻게 해야지 구원받을 수 있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다시 말해서 사람의 의지적 노력 여부가 구원을 받는 척도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이 마지막 말씀은 사람의 의지적 노력이나 행동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 구원의 관건임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름과 보상(루카 18,28-30)
이번에는 베드로가 나섭니다. “저희는 가진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18,28) 권력가인 부자와 베드로는 여러 면에서 대비됩니다. 권력가인 부자는 “선하신 선생님” 하며 예수님께 먼저 다가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물었습니다. 계명이 있지 않으냐는 예수님 말씀에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다고 자랑스러운 듯이 대답합니다. 반면에 갈릴래아의 어부 출신인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더니 너무 많은 고기가 잡혀 두려운 나머지 ‘저는 죄인’이라며 예수님께 떠나가 주기를 청합니다. 또 부자는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와서 따르라는 예수님 말씀에 크게 슬퍼하지만 베드로는 두려워하지 말고 따르라는 말씀에 모든 것을 버리고 따릅니다.(루카 5,1-11 참조) 부자 권력자는 자신의 의지로 모든 것을 하려 했지만, 베드로는 은총의 부르심에 응답한 것입니다.
베드로처럼 이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하느님 나라 때문에 집이나 아내,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여러 곱절로 되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8,29-30)
생각해봅시다
자신이 노력해서 이룩한 것인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권력가인 그 부자는 물질적으로 사회적으로 남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종교 생활에서도 어려서부터 십계명을 다 지켜왔을 정도로 자신 있었습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재물이 방해물이 됐습니다. 재물이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지 못함에도 그는 재물에 집착했습니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보면 재물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사실은 부자가 아니더라도 재물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자신의 능력으로는 재물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설사 자유롭게 된다 하더라도 그에게는 또 다른 걸림돌이 생기기 십상입니다. 그것은 ‘나는 할 수 있다’는 자만입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라도 하느님께는 가능하다”는 말씀은 인간적 자만과 오만에서 벗어나라는, 하느님의 은총에 의지하라는 말씀입니다. 의롭다고 자처하는 바리사이가 아니라 죄인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는 세리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부자, 따름과 보상에 관한 루카복음의 말씀은 단지 재물에 대한 집착의 문제가 아니라 더 나아가 겸손과 은총의 문제라고 한다면 지나친 것일까요?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5월 20일, 이창훈 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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