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신약 여행99: 그 사내아이는 쇠 지팡이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분입니다(묵시 12,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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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5-21 | 조회수3,351 | 추천수0 | |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99) “그 사내아이는 쇠 지팡이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분입니다.”(묵시 12,5) 심판의 시간이 오기 전에 회개하여라
- 요한 묵시록은 일곱 대접의 환시를 전하고 있다. 그림은 미카엘과 천사들이 용과 그의 부하들을 땅으로 떨어뜨리는 모습. 율리우스 슈노어 폰 카롤스펠트 작 ‘하늘의 전쟁’ 부분. 출처=「아름다운 성경」
일곱 나팔의 환시와 일곱 대접의 환시는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두 환시 모두 이집트에 내린 하느님의 재앙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의 저자가 본 환시가 탈출기에 나오는 재앙과 비교될 수 있다는 것은 서로 관련이 있는 재앙을 통해 하느님의 업적을 나타내는 방법입니다. 이집트에서의 탈출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 요한 묵시록이 전하는 재앙을 내리는 분은 바로 하느님입니다.
여인과 용의 환시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의 환시 사이에 요한 묵시록에서 아주 중요하게 생각되는 환시가 있습니다. ‘여인과 용’에 대한 환시입니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은 곧 해산할 모습으로 묘사됩니다.(묵시 12,1-2) 이 여인은 무엇을 나타내는 상징인지에 대해 많은 의견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지금 많은 신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성모 마리아에 대한 상징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메시아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사용된 쇠 지팡이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사내아이는 예수님을 나타내고 이 사내아이를 해산하는 여인은 마리아로, 성모님으로 보는 것입니다.(묵시 12,5; 시편 2,9) 이런 해석은 성모 신심이 강한 가톨릭교회 안에서 폭넓게 받아들여집니다.
또 다른 해석은 이 여인을 하느님의 백성, 곧 ‘믿는 이들의 공동체’로 보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이스라엘과 열두 지파 그리고 신약성경에 상징적으로 표현되는 열두 사도를 통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간직한 공동체 전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메시아는 구약성경에서 약속된 분으로 이스라엘 민족 안에서 태어나셨으며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간직한 이들 안에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 구원을 이루었고 교회를 통해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해석 역시 많은 이들에게 긍정적으로 수용됩니다.
이 여인의 해산을 막기 위해 등장하는 용은 악의 세력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용이 “크고 붉은” 색을 가졌다는 것은 박해를 통해 순교자들의 피를 흘리게 한 상징으로 이해합니다. 또한, 이 용은 세상에서 자신을 대신하는 권한을 가진 두 짐승을 통해 우상 숭배를 조장합니다. 묵시록 13장에서 표현되는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과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요한 묵시록의 배경을 설명하는 역할을 합니다.
바다에서 올라오는 첫째 짐승은 용의 모습과 비슷하게 “일곱 머리와 열 개의 뿔”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용을 대신하는 첫째 짐승의 역할을 나타냅니다. 이 첫째 짐승은 요한 묵시록 안에서 우상숭배의 직접적인 대상으로 생각되는, 황제 숭배 의식의 대상이 되는 죽은 황제를 나타냅니다. 이와 함께 땅에서 오는 둘째 짐승은 후에 거짓 예언자로 표현되는데(묵시 16,13; 19,20; 20,10) 사람들을 현혹해 첫째 짐승에게 경배하도록 합니다.
둘째 짐승이 나타내는 것은 죽은 황제를 숭배하도록 강요하고 박해하는 살아있는 황제입니다. 그의 역할은 죽은 첫째 짐승의 상을 세워 숭배하게 하는 것입니다.(묵시 13,14-15) 또 악의 세력에 동조해 우상숭배를 하게 하는 둘째 짐승은 사람들에게 표를 받게 하는데 그 짐승의 이름을 뜻하는 ‘666’입니다. 이 짐승의 표는 하느님의 인장과 반대되는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그리고 이 숫자는 ‘네로 황제’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시기를 배경으로 하지만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네로 황제가 살아난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일곱 대접에 의한 재앙
이제 남은 것은 일곱 대접에 의한 재앙입니다. 연속되는 재앙들의 목적은 일곱 대접의 환시에서 잘 드러납니다. 여기서 지속적으로 표현되는 “자기들의 행실을 회개하지 않았다”는 표현은 우상을 숭배하는 이들에게 주어진 회개의 가능성을 표현합니다. 종말 이전에, 결정적인 심판의 시간이 오기 전에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도록 하는 것이 지속적인 재앙이 가진 의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마치 ‘탈출’ 때의 파라오처럼 회개하지 않았고 그들의 못된 행실을 지속할 뿐입니다. 일곱 대접에 의한 재앙을 끝으로 회개의 가능성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입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5월 20일, 허규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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