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예수님 이야기65: 세 번째 수난 부활 예고와 눈먼 이를 고치심(루카 18,31-4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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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5-28 | 조회수4,090 | 추천수0 | |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 루카복음 중심으로] (65) 세 번째 수난 부활 예고와 눈먼 이를 고치심(루카 18,31-43) 깨닫지 못한 제자들과 눈을 뜬 눈먼 이
- 예리코에서 눈 먼 사람을 고치신 이야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로 삶의 지혜를 일깨워주는 일화다. 사진은 오늘날의 예리코 전경. 가톨릭평화방송 여행사.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길에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예리코 근처에서는 눈먼 이를 고쳐 주십니다. 이 복음 내용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차례로 살펴봅니다.
세 번째 수난과 부활 예고
마태오ㆍ마르코ㆍ루카 복음서는 모두 예수님께서 세 번에 걸쳐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예고하신 말씀을 전합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 말씀을 두 번은 갈릴래아에서 하신 것으로(9,22; 9,43-45), 마지막 세 번째는 갈릴래아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하신 것으로 전합니다.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18,31)
그런데 예고하시는 내용이 첫 번째나 두 번째와는 적잖은 차이가 있습니다. 본문을 비교해 보면 세 번째 예고는 첫 번째 예고와 두 번째 예고에 비해 아주 자세합니다.
첫 번째 예고에서는 “사람의 아들은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9,22)고, 두 번째 예고에서는 그냥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 손에 넘겨질 것이다”(9,44)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예고에서는 “사람의 아들은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질 터인데 그들은 사람의 아들을 모욕하며 침 뱉을 것이다. 또 채찍질하고 나서 그를 죽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18,32-33)라고 훨씬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 세 번째 예고에서는 “이제 사람의 아들에 관하여 예언자들이 기록한 모든 일이 이루어질 것”(18,31)이라고 함으로써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이 구약의 예언을 실현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하나 더 살펴볼 것이 있습니다. 루카복음서에서는 9장 51절부터 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첫 번째(9,22)와 두 번째(9,44)는 예수님의 주 활동무대인 갈릴래아에서 있었습니다. 갈릴래아에서 제자들은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하신 놀라운 일들을 많이 보았고 거기에 심취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말씀하셨어도 이해할 수도 없었고 귓전에도 들어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선지 루카복음서는 예수님의 첫 번째 예고 말씀에 대해 제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조차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마태오복음서와 마르코복음서는 예수님의 첫 번째 예고 말씀이 끝나자 베드로가 ‘안 된다’고 펄쩍 뛰면서 반대했다가 예수님한테 “사탄”이라는 말까지 듣습니다.(마태 16,22-23; 마르 8,32-33 참조)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세 번째 예고 말씀을 하신 것으로 전합니다.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18,31) 그리고 이 세 번째 수난과 부활 예고에 이어 전하는 눈먼 이를 고치신 기적이 예리코에서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제 예루살렘 입성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리코에서 예루살렘까지는 30㎞ 정도밖에 되지 않아 예수님 시대라 하더라도 하룻길이면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러니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는 예수님 말씀에는 비장감이 서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수난 예고를 들은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한지요? 루카 복음사가는 “제자들은 이 말씀 가운데에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였다”고 전하면서 “말씀의 뜻이 그들에게 감추어져 있어서 말씀하신 것을 알아듣지 못하였던 것”이라고 이유를 설명합니다.(18,34) 루카 복음사가는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야, 그것도 예수님께서 다시 일깨워 주실 때에야 주 비로소 이 말씀의 뜻을 깨닫는다고 기록합니다.(루카 24,26-27.32 참조)
- 예리코 입구.
예리코에서 눈먼 이를 고치심(18,35-43)
예리코 근처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자 무슨 일이냐고 묻습니다. 사람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고 하자 그는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습니다.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꾸짖자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외칩니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시지요. 그리고 그가 가까이 오자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고 물으십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의 청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즉시 다시 보게 된 그 사람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고, 군중도 그것을 보고 모두 하느님께 찬미를 드립니다.
생각해 봅시다
예리코에서 눈먼 이를 고치신 기적 이야기에서는 놓치지 말아야 할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눈먼 사람은 군중들이 지나가는 소리를 놓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묻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 지나가신다고 하자 즉시 큰 소리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하지요. 눈먼 사람이 눈을 뜰 수 있었던 첫 번째 동인은 이렇게 작은 일에도 놓치지 않는 감각이었습니다.
둘째, 그는 나자렛 예수님이라는 소리에 즉시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라고 자비를 청합니다. ‘다윗의 자손’은 메시아를 나타내는 칭호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예수님을 메시아, 구세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전부터 듣고는 그분이야말로 메시아라는 확신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 믿음이 그를 다시 볼 수 있게 해준 결정적인 동인입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8,42)는 예수님 말씀이 이를 뒷받침해 줍니다.
셋째, 사람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합니다. 한 번 시도해보고 말아서는 안 됩니다. 확신을 가졌다면 끊임없이 시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넷째, 다시 보게 된 그 사람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하느님을 따릅니다.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기적을 보고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렸습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이를 실천에 옮겼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감사와 찬양을 드릴 일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감사하며 찬양을 드리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예수님을 따르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을 때 그것이 진정한 감사와 찬양일 것입니다.
이 네 가지는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첫째, 민감하라. 이는 열려 있고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둘째, 신념을 가져라. 신념과 확신이 용기를 줍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가진 신념은 어떤 것인가를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셋째, 끈기 있게 도전하라. 결코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넷째,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라. 말로써 하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행동으로, 실천으로 보이는 표현이 훨씬 아름답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5월 27일, 이창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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