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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아가, 노래들의 노래9: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아가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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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3 조회수3,422 추천수0

아가, 노래들의 노래 (9)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아가 4,9)

 

 

어느 날 저녁 미사를 가려고 했는데 지나가다 보니 혼배 미사가 있기에 그냥 들어갔습니다. 거의 20년 만에 보는 혼배였습니다. 신랑 신부가 너무나 대단하게 보였습니다. 어떻게 한 사람에게 자신의 일생을 걸 수 있을까요?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어떻게 평생을 약속하고 모든 것을 줄 수 있을까요? 지금 얼마나 큰 결단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저 부부가 모르는 것일까요? 아니면 제가 모르는 것일까요? 퇴장하는 신혼부부를 보면서 정말 장하다는 마음으로 열렬한 박수를 보냈습니다.

 

아가의 주인공들도 오늘 그런 용기를 보여 줍니다. 친구들이 부부가 되는 것입니다. 아가에서 ‘신부’라는 단어는 오늘 읽을 4,8-5,1의 단락에서만 사용됩니다. 이 단락에서는 주로 ‘신부’, ‘누이’, 그리고 이어서 나올 ‘정원’이라는 단어를 통하여 그 여인을 표현합니다.

 

 

“나의 신부여”(4,8)

 

8절과 11절에서는 ‘신부’라는 호칭이 사용되고, 9.10.12절과 5,1에서는 “나의 누이 나의 신부”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물론 연인이, 신랑이 하는 말입니다. 본래 히브리어 단어 ‘칼라’는 문맥에 따라 신부를 뜻할 수도 있고 며느리를 뜻할 수도 있는데, 혼인으로 맺어진 관계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여인을 지칭해 온 ‘나의 애인’이라는 표현이 둘의 우정을 나타낸다면(지난달에 이 구절을 “내 친구야”라고 번역했던 것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신부’라는 말은 이미 그 남녀의 관계가 철저히 배타적인 것임을 드러냅니다. “나의 연인은 나의 것, 나는 그이의 것”(2,16)이라는 말로 표현되었던 상호 소속의 관계는 실상 부부에게서 가장 완전하게 실현됩니다. 이제는 온전히 그의 것이지 다른 사람의 것은 될 수 없는 것, 그것이 ‘신부’입니다.

 

아가의 신부는 여러 가지로 해석되지요. 기본 의미는 물론 부부 관계에서의 신부입니다. 그런데 유다교의 전통 해석에서 아가의 신랑과 신부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한다고 했습니다. 그 배경은 예언자들이 이스라엘을 신랑이신 하느님의 신부라는 표상으로 나타냈던 것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느님의 명으로 불충실한 아내를 끝까지 다시 데려오며 일방적으로 사랑을 쏟아 주어야 했던 호세아는, 그 아내와 자신의 관계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하느님의 관계를 보여 주었습니다. “너는 다시 가서, 다른 남자를 사랑하여 간음을 저지르는 여자를 사랑해 주어라. 주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해 주어라”(호세 3,1).

 

제2이사야도 멸망하여 유배를 갔던 이스라엘을 남편에게 버림받았던 여자, 그러나 다시 사랑을 받고 찬란히 회복된 신부로 표현하였습니다. “정녕 주님께서는 너를 소박맞아 마음 아파하는 아내인 양 퇴박맞은 젊은 시절의 아내인 양 다시 부르신다”(이사 54,6). 이러한 예언자들의 전통을 배경으로, 유다교 해석자들은 아가의 ‘신부’를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영원한 계약으로 하느님과 맺어진 이스라엘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해석자들은 이러한 유다교 전통과 대비를 이루며 아가의 신부가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인 그리스도 교회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이야기를 다시 하는 것은, 교부들 이전에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신부의 표상을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바오로도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말하지만, 오늘 특히 마음에 새기고 싶은 것은 요한 묵시록입니다. 요한 묵시록은 ‘신부’라는 표현을 아낍니다. 처음부터 교회를 신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현재의 교회는 ‘약혼녀’입니다. 교회가 어린 양의 신부가 되는 것은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처럼 차리고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때입니다(묵시 21,2). 그래서 이 마지막 두 장, 새 예루살렘을 그려 보일 대에야 교회는 신부가 됩니다.

 

여기에서 약혼녀와 신부의 차이는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약혼녀도 어린 양의 약혼녀이지만, 완전하게 어린 양에게 속해 있지는 못합니다. 현재의 교회가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이지만 그 안에는 인간적 약함이 있기에, 아직은 겨자씨요 누룩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 교회가 완전히 그리스도께 속하게 될 때 교회는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아가로 돌아가서 ‘신부’라는 표현을 음미해 보면, 그것이 결코 ‘애인, 친구’보다 시들한 단어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날 것입니다. ‘신부’가 된다는 것은 사랑의 완성, 온전한 자기 증여를 뜻합니다.

 

 

“나와 함께 레바논에서”(4,8)

 

그런데 성경은 창세기의 첫 부부인 아담과 하와의 첫 만남을 전하는 장면에서 이미 남녀가 한 몸이 되기 위해서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창세 2,24)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아가의 남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부름에 응답하려면 여인은 집 밖으로 나와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면 죽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상대방에게 주는 것이 사랑이라면, 사랑하는 사람은 실제로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4,1-7에서 ‘경탄’이 끝난 다음 연인은 이제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그 여인에게 다시 한 번 “떠납시다”고 재촉합니다(4,8).

 

여인이 사자 굴을 떠나고 표범 산을 떠나야 한다는 것은 그 떠남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말해 줍니다. 그러나 8절의 첫 단어는 “나와 함께”입니다. 사랑이 ‘나’를 위협하는 것이 명백한데도 사람들이 사랑할 수 있는 건 무엇 때문일까요? 사랑에 빠져 본 일이 있는 사람에게는 어쩌면 너무 쉬운 질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모험이 가능한 것은 누군가에 대한 사랑 때문일 것입니다.

 

다음 절에 나오는 신랑의 말도 이와 유사한 체험을 나타냅니다. “그대는 내 마음을 사로잡았소”(4,9). 히브리 사고에서 ‘마음, 심장’은 이성적 판단을 내리는 자리였습니다. 감정은 심장이 아니라 신장에 머무른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사로잡았소”라는 것은(라틴어 번역에서는 “내 마음에 상처를 입혔소”라고 되어 있지만) 쉽게 말해 정신이 나가게 했다는 뜻입니다. 사실 사랑하는 사람의 행동은 사랑을 함께 나누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 어리석고 무모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정말로 사랑한다면 목숨을 내어 주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것이 가장 완전한 사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 15,13). ‘함께’하는 사랑이기에 그것이 가능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부르시고 사명을 맡기실 때 늘 똑같이 하시는 말씀이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탈출 3,12; 판관 6,12; 예레 1,19)는 것이고, 그 ‘함께 계심’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하듯이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있다는 것이 그런 모험을, 안전을 떠나고 부모를 떠나고 자신을 떠나는 모험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래서 애인이 ‘신부’가 되기에 이릅니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4,9)

 

이 표현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었습니다. 여러 학자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그렇듯이 이 부부가 친척이었으리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식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가와 많은 공통점을 보이는 이집트의 사랑 노래들이나 메소포타미아의 신화적이고 예식적인 본문들에서는 사랑하는 여인을 가리켜 ‘누이’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젊은 부부들 사이에서는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비슷하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누이’라는 말은 내 뼈에서, 내 살에서 나와서(창세 2,23 참조) 나에게 어울리는 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창세 2,20 참조). 아담이 다른 어떤 동물을 보고서도 자기 짝이라고 느끼지 않았고 오직 하와를 보고서야 “이야말로”(창세 2,23) 내 짝이라고 탄성을 질렀듯이, 연인들은 저 사람이 바로 나의 짝이라고 느낍니다. ‘누이’라는 호칭은 그러한 직관을 담고 있습니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 안소근 수녀는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소속으로 로마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와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성 도미니코 말씀의 은사》, 《그에게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 등 여러 책을 옮겼다.

 

[성서와 함께, 2012년 9월호(통권 438호), 안소근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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