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로마서에서 기도를 배우다6: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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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6-03 | 조회수3,918 | 추천수0 | |
로마서에서 기도를 배우다 (6)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를
“그들은 하느님을 알고서도 그분께 하느님으로서 영광을 드리지 않았고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생각은 허망하게 되었고 지각없는 마음은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1,21 필자 직역).
바오로는 형제자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자기에게는 진정한 기도이며 영적 예배라고 로마인들에게 강조하였다(1,9-15 참조). 기도는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 하느님의 거룩함에 매료된 사람의 마음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흠숭과 찬미의 노래이다(1,21 참조).
문맥 보기
바오로는 1,16-17에서 하느님의 구원 약속이 유다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향한다고 말한 뒤 1,18-4,25에서 복음의 핵심인 신앙에 의한 의화(義化)를 다룬다. 첫 대목 1,18-3,20에서는 죄, 분노, 심판에 대해 말한다. 이는 모든 사람에게 거저 주시는 복음의 선물(3,21-26 참조)을 소개하기 위한 준비다. 바오로는 하느님을 알면서도 영광과 찬미를 드리지 않는 것(1,21 참조)이 모든 죄의 출발점이라는 데서 시작한다(1,18-32 참조).
하느님을 알면서도
1,18-32에서 바오로가 말하는 모든 내용의 주제는 ‘아는 것’과 관련된다. 하늘에서 하느님의 진노가 당신을 거부하는 사람들 위에 내려오는 데(1,18 참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느님께서 창조물을 통해 당신을 알 수 있게 하셨는데도 그것을 거부했다는 것(1,19-20 참조)과 하느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하느님으로 여기고 영광과 찬미를 드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오로는 당대의 이방인과 유다인의 관점을 함께 취하면서 잘못을 바로잡는다. 하느님께서 창조물을 통해 당신을 명확하게 드러내셨다는 것은 이스라엘 지혜문학만이 아니라 당시의 이방인도 근본적으로 동의하는 주제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철학자 필론은 “작품을 통해서 창조자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조물은 하느님의 그림자”라고 말한다(Leg. alleg. 3,96-99). 바오로는 여기에 찬성하면서도 창조물을 통해 하느님을 아는 것은 이방인이 생각하듯 인간 편에서 자기 능력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하느님 편에서 당신의 보이지 않는 본성인 권능과 신성함을 계시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주도권은 하느님에게 있다(1,20 참조).
여기서 바오로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보고 감탄하는 데 머무르지 말고 ‘멈추어서’ 하느님을 체험하라고 강조한다. 봄날 푸른 나뭇잎 사이에서 작은 진주 알처럼 하얗게 반짝이는 태양이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고, 자신이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증명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릴 때까지 귀 기울여 들어 보라는 것이다. 이방인은 그렇게 할 수 있었는데도 하느님을 체험할 기회를 놓쳐 버렸다. 그것이 그들이 변명할 수 없는 이유이다.
바오로는 유다인의 관점도 함께 고려한다. 유다인은 이방인이 창조물을 통해 하느님을 알 수 있지만 그것이 하느님에게 이르지 않으면 우상 숭배에 바질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다(지혜 13-15 참조). 그러나 유다인의 차가운 지식도 하느님과의 생생한 만남에 이르지는 못했기 때문에 그들도 참으로 하느님을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바오로가 겪은 체험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하느님을 알지 못했다. ‘안다는 것’은 마음으로 체험하는 것, 사랑하는 것이다. 바오로는 율법 학자로서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알았지만 오랫동안 하느님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다마스쿠스에서 하느님의 계시로 그리스도를 만나고 성령의 힘으로 감겨 있던 마음의 눈이 스르르 열리면서 본래 있던 것을 이해할 능력이 생겼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죽은 하느님의 아들에게서 하느님의 영광, 죄인인 자신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을 본 것이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으랴?”(8,35 필자 직역) 바오로의 체험으로는 하느님에 대한 지식이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이끌어지지 않으면 하느님을 참으로 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분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영광과 찬미를
이어서 바오로는 ‘죄’의 뿌리가 하느님을 알면서도 영광과 찬미를 드리지 않은 데 있다고 말한다. ‘영광을 드리다’는 말은 ‘아주 중요한 사람을 알아보는 것, 존경하는 것, 흠숭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을 세상과 자기 인생의 유일한 주님으로 인정하는 것, 하느님을 그분 영광의 ‘그림자’인 창조물과 혼동하지 않는 것이다.
‘감사를 드리다’는 동사는 하느님을 ‘찬미하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바오로는 두 동사를 짝지어 인간이 하느님에게 다가가는 종교적 태도를 표현한다. 이는 하느님이 자신의 주님이자 세상의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그분을 감사와 찬미를 드려야 할 분을 고백하는 자세를 가리킨다. 두 동사는 모두 기도하는 사람이 하느님께 다가가는 자세를 표현한 것인데, 아자르야가 우상 숭배를 강요하는 이방인 앞에서 바치는 기도(다니 3,26-45 참조)에도 나타난다. “주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칭송받으소서. 당신의 이름은 영원히 영광 받으소서”(다니 3,26).
아마도 바오로는 당대 로마 공동체의 구성원인 유다인과 이방인을 염두에 두고 유다인이 잘 알고 있는 ‘영광’이라는 단어와 이방인도 공유하는 ‘감사’라는 단어를 함께 사용했을 것이다.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흠숭과 찬미를 드리지 않을 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그가 살아가는 환경에 현존하는 하느님의 이웃마저 볼 수 없게 된다.
바오로가 1,21ㄴ에서 영광과 찬미를 드리지 않는 것을 인간 의식의 타락과 직접 연결하는 것은 바오로의 생각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그들의 생각은 허망하게 되었고 지각없는 마음은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1,21ㄴ 필자 직역).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존재하시지 않는 것처럼 살아가려는 허망한 생각이 인간의 어리석은 ‘마음’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머리’를 지배하는 것은 ‘마음’이다. 심장이 굳어 버리면 생명을 가진 존재는 즉시 죽음에 이르듯, 마음의 어리석음이 깊어져 ‘어둔 밤’이 되어 버리면 하느님과 하느님을 닮은 것을 가려내는 분별력이 사라진다. “죄는 육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며, 악의 샘물에서 솟구치는 것입니다. 마음이 부패하면 정상적인 궤도에서 이탈하는 파탄을 가져오며 결국은 분별력을 잃고 맙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알아 모시지 못한 대가는 우상 숭배(23절)와 불결한 마음의 욕망(24절), 동성애(26-28절), 온갖 악한 행위(29-31절)로 이어진다.
바오로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
1,21에서 우리는 기도에 대해 두 가지 중요한 점을 성찰할 수 있다. 첫째, 하느님에게 영광과 찬미를 바치는 것은 내가 받은 은혜 때문인가? 아니면 하느님께서 존재하시고 그분이 무한한 사랑이시기 때문인가? 우리의 기도는 얼마만큼 순수한가? “그분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분께 감사드리고 찬미해야 한다. 하느님을 찬미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존재하시며, 하느님께서 스스로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셨다는 것을 기뻐하는 일이다. 하느님의 현존을 마음 깊이 기뻐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하느님이시다. … 그게 전부다”(장 라 프랑스).
둘째, 인간이 더는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을 때 우상 숭배와 죄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기도는 “하느님에 대해 생각하는 것, 그 외에 어떤 다른 것도 아닙니다”(마더 데레사). 우리가 의식적으로 매일 기도라는 영양분을 섭취하지 않으면 우리 신앙은 순식간에 하느님의 이름을 붙이며 행해지는 온갖 문화에 휩쓸려 황폐한 사막이 될 것이다.
* 임숙희 님은 로마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로마서의 바오로 기도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교회의 신앙과 영성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풍요로워지기를 바라며 글쓰기와 강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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