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로마서에서 기도를 배우다22: 홀로 지혜로우신 하느님께 영광을! | |||
---|---|---|---|---|
이전글 | 이전 글이 없습니다. | |||
다음글 | [신약] 복음 이야기36: 성전 (3) 소박했지만 민족 부흥의 표지 즈루빠벨 |1| | |||
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6-03 | 조회수3,973 | 추천수0 | |
로마서에서 기도를 배우다 (22) 홀로 지혜로우신 하느님께 영광을!
“하느님은 내가 전하는 복음으로,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로, 또 오랜 세월 감추어 두셨던 신비의 계시로 여러분의 힘을 북돋아 주실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 이제는 모습을 드러낸 이 신비가 모든 민족들을 믿음의 순종으로 이끌도록, 영원하신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예언자들의 글을 통하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홀로 지혜로우신 하느님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로마 16,25-27).
문맥 보기
바오로는 로마서를 영광송으로 마무리한다 16,25-27에서 바오로는 그에게 맡겨진 복음의 신비에 따라, 공동체에게 ‘힘을 북돋아 주기 위해’ 그의 사도직의 기원이신 하느님께 영광을 바친다. 이 영광송은 독자들이 구원에 관한 하느님의 계획과 관련된 중요한 사실을 기억하게 하고, 믿는 이들 편에서 구체적 응답을 불러일으킨다.
힘을 북돋아 주실 능력이 있는 분
그리스어 본문에서 이 영광송은 ‘능력이 있는 분’(25절)으로 시작된다. 바오로의 찬미를 받으시는 분의 정확한 정체는 16,27에 가서야 ‘홀로 지혜로우신’ 하느님으로 밝혀진다. ‘하느님의 힘’이라는 주제는 바오로가 선호하는 개념으로, 로마서 앞부분에도 자주 나온다(1,16.20; 4,21; 9,17.22; 11,23; 14,4 참조). ‘힘, 능력(뒤나미스, δύναμις)’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과 은총으로 인간의 역사를 이끄시는 본성을 가리킨다. ‘능력이 있는 분’으로서 하느님의 본성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과 관련지어 사용하는 동사 ‘힘을 북돋다(스테리조, στηρίζω)’에서 드러난다. 이 동사는 ‘힘을 주다, 뒤에서 받쳐주다’를 뜻하는데 쿰란 문서에서도 이런 용도로 사용된다. “나의 하느님,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당신이 당신 힘으로 저를 뒤에서 받쳐 주셨기 때문입니다”(1QH 7,6).
바오로 서간에서 이 동사가 사용될 때는(로마 1,11; 16,25; 1테살 3,2.13; 2테살 2,17; 3,3 참조) ‘공동체에 힘을 주는 것’을 뜻한다. 바오로는 첫 편지인 테살로니카 1서에서 시작하여 그가 하는 사도직의 궁극 목표를 ‘공동체 신자들의 신앙을 단단하게 하고 힘을 주는 것’, ‘확고한 신앙을 갖도록 강하게 만드는 것’, ‘그들에게 용기를 주고 확신을 갖게 하는 것’으로 삼는다.
로마서에서 두 차례(1,11; 16,25 참조) 사용되는 이 동사는 문맥에 따라 뜻이 약간 다르다. 1,11에서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을 강하게 할 수 있는 어떤 ‘영적 선물’을 전달하기 위하여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을 보기를 원한다. 그러나 16,25에서는 ‘건전한 교리와 확고한 믿음 안에서 강해지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두 구절 모두 힘의 기원은 오직 하느님이며, 하느님만이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다고 말하는 점에서 비슷하다. ‘내가 전하는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 ‘오랜 세월 감추어 두신 신비의 계시’는 모두 동사 ‘스테리조’와 연결된다. 복음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의 힘을 북돋기 위한 것이며, 그분께서는 그럴 능력을 갖고 계신다.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복음에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계획을 실행할 능력이 있다.
그러고 나서 바오로는 ‘신비(미스테리온, μυστήριον)’로 옮아 간다. 이 ‘신비’의 내용에 대해서는 어떤 설명도 없다. 그러나 바오로 서간에서 ‘신비’가 나오는 구절의 용도를 종합하여 살펴보면, 바오로의 관점에서 ‘신비’는 하느님 계획에 감춰진 미래의 어떤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 그리스도 안에서 이뤄지는 하느님의 결정적 행위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1코린 2,1.7; 로마 16,25; 콜로 1,26.27; 2,2; 4,3; 에페 1,9; 3,3.4.9; 5,32; 6,19 참조). “바오로가 생각하는 신비의 종합적 차원은 성경의 하느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보여 준다”(R. 펜나).
이 신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전달하는 목소리가 필요하다. 바오로는 자신의 사도 직분을 ‘그리스도의 봉사자이자 하느님 신비의 관리인’으로 요약한다. 바오로는 거룩한 신비를 체험할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그것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자 책임 있는 중재자다.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계시한 다마스쿠스 체험에서 이 ‘신비’에 대한 지식을 얻었을 것이다(갈라 1,16 참조). 그 후에도 선교 활동을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려는 끊임없는 노력과 성찰, 그리고 ‘신비의 계시의 중재자’인 성령이 주시는 선물 덕분에 바오로의 생애에서 이 신비에 대한 지식은 계속 성숙하고 발전했을 것이다. 이 신비는 오랫동안 하느님에 의해 드러나지 않았다. 신적 수동태로 표현된 ‘감추어 두셨다(세시게메누, σεσιγημένου)’는 오직 하느님이 당신의 신비에 대해 침묵하고 계시할 책임이 있는 분이시라고 말해 준다. 하느님의 침묵은 말의 부재가 아니라 충만함과 집중으로서 창조 이전의 위대한 침묵과 유사하다. 복음은 신비, 곧 신비의 계시다. 복음은 ‘하느님 힘’의 계시이기도 한데, 그것을 통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본성을 이해한다.
예언자들의 글
‘예언자들의 글’(26절)은 신비의 계시에 도달할 수 있는 도구로, 영원한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신앙의 순종을 위해 모든 이방인에게 선포되는 도구다. 바오로가 지금 기록하는 로마서도 여기에 포함될 것이다. 이 구절은 하느님께서 바오로에게 맡기신 사명을 암시한다. 바오로는 사도로서 하느님께서 오랫동안 침묵하신 ‘신비’를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 의무를 갖고 있는데, 지금 이스라엘뿐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그가 전하는 복음을 통해 이 ‘신비’가 알려지게 되었다. 이 구절에서 복음이 선포되는 두 가지 차원, 곧 하느님의 ‘점진적’ 뜻과 그 뜻이 육화하는 장소인 ‘사도의 임무’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느님의 뜻’만 있다면 인간의 역사에서 복음은 풍요로운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인간은 그분의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한편으로 하느님의 뜻 없이 ‘사도’가 존재할 수 없다. 신비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바오로의 과제는 25절의 ‘힘을 북돋우다’처럼 26절에서도 ‘믿음의 순종’이라는 표현으로 강조된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바오로가 전하는 복음을 통해 구원의 역사에 당신의 뜻을 육화하기 위한 계획,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선포(25절 참조)를 실현하고 계신다.
바오로의 파견은 민족들 사이에 ‘믿음의 순종’을 낳기 위한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의 종말론적 실현이다. ‘믿음의 순종’은 바오로의 복음 선포에 대한 믿는 이들의 온전한 응답을 표현한다. 믿음의 순종으로 하느님께서 새로운 인간상을 창조하신다. 하느님의 신비는 ‘오랜 세월’ 감추어져 있었으나 영원한 하느님의 뜻에 의해, 그리고 바오로가 행한 사도 직분이라는 중재에 의해 ‘이제는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고’ 이방 민족들에게 알려졌다.
홀로 지혜로우신 하느님께
27절에서 바오로는 25절에 나오는 찬미의 어조를 다시 취한다. 이제 ‘능력이 있는 분’은 ‘홀로 지혜로우신 하느님’으로 밝혀지고, 그분께 영광이 귀속된다. 로마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영광송의 핵심은 ‘홀로 지혜로우신 하느님’, 바오로가 전하는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을 강하게 하시는 분께 바치는 기도에 들어 있다. ‘지혜로우신 하느님’이라는 표현은 11,33을 떠올려 준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유다인과 이방인 모두의 하느님이시다(3,29-30 참조).
그분은 인간이 당신의 길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인간을 인도하신다. 하느님은 ‘지혜로운’이라는 속성을 지닐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11,36의 영광송은 ‘모든 이스라엘’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 때문에 하느님을 찬미한다. 16,25-27의 영광송은 이방인들의 구원 때문에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11,36을 보완한다. 그리스도 공동체는 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다. ‘하느님의 영광’이라는 주제는 로마서에 자주 나오는데(1,23; 2,7.10; 3,7.23; 5,2; 6,4; 9,23; 11,36; 15,7 참조) 16,27에서는 앞과 달리 전례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오로는 로마서를 마치면서 ‘하느님 신비의 관리인’으로 자신을 내세우고, 그것을 수행할 힘을 주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와 영광을 바친다. 지혜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바오로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순종하며 살아갈 때 영광을 받으신다.
* 임숙희 님은 로마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로마서의 바오로 기도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교회의 신앙과 영성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풍요로워지기를 바라며 글쓰기와 강의를 하고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