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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성경과 영성3: 유다교인들은 성경을 어떻게 알아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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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3 조회수4,072 추천수0

성경과 영성 (3) 유다교인들은 성경을 어떻게 알아들었을까?

 

 

‘그리스도교의 모태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물론 정답은 ‘유다교’이다. 그것은 유다교가 그리스도교의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유다교와 그리스도교는 언뜻 비슷한 신앙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당신 백성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신 하느님을 유다교와 그리스도교 모두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은 분명히 다른 종교다. 아담이 순종하지 않아 멸망과 죽음을 맞게 된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 즉 구세주를 맞이하는 자세에서 두 종교는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그리스도교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맞이하여 믿는 데 반해, 유다교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고 오늘날까지도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두 종교는 정경(正經)으로 인정하는 성경의 범위와 입장을 각자 다르게 규정하였다. 그리스도교는 구약성경뿐 아니라 예수님의 이야기와 믿음을 다루는 신약성경도 정경으로 받아들이고 신앙의 원천으로 삼았다. 반면에 유다교는 신약성경뿐 아니라 애초에 그리스어로 집필되었거나 그리스어본으로만 전해지는 구약성경도 정경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즉 유다교는 히브리 민족의 언어인 히브리어와 일부 아람어로 집필된 성경만을 정경으로 받아들이고 신앙의 원천으로 삼았다.

 

그런데 유다교인들은 성경의 메시지를 해석하고 실생활에 맞게 재해석 하면서 신앙을 보존하고 영성 생활을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유다교인들이 신앙과 영성 생활을 위하여 성경 말씀을 어떻게 알아들으려고 노력하였는지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유다교인들은 성경을 현명하게 해석하여 신앙을 보존하였다

 

먼저 성경 형성 초기 단계부터 성경의 여러 편저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을 보존하기 위해 논리적 모순을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민수기에 따르면 주님께서는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이유를 모세와 아론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믿지 않아 이스라엘 자손들이 보는 앞에서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이 공동체에게 주는 땅으로 그들을 데리고 가지 못할 것이다”(민수 20,12).

 

신명기에서도 주님께서는 비슷한 논조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그것은 너희가 친 광야에 있는 므리밧 카데스 샘에서, 이스라엘 자손들 한가운데에서 나를 배신하였고, 이스라엘 자손들 한가운데에서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신명 32,51). 결국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이유는 이집트를 탈출한 후 마싸와 므리바의 샘물 사건(탈출 17,1-7 참조)에서 빚어진 모세의 잘못 때문이다. 아마도 이 본문을 작성한 저자들이 다윗 왕조의 권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예루살렘 지역의 사제계 학파에 속하였기에 모세의 권위가 훼손되더라도 수정 없이 그냥 언급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신명기의 다른 부분에서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님의 꾸짖음을 전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주님께서는 너희 때문에 나에게도 화를 내시면서 말씀하셨다. ‘너 또한 그곳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신명 1,37). 이 본문은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하다가 북왕조가 멸망한 후 예루살렘으로 피신해 활동하였던 신명기계 학파 저자들이 작성하였다. 그러므로 모세의 권위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던 신명기계 학파는 모세가 가나안 당에 들어가지 못한 탓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돌리려고 수정했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여푼네의 아들 칼렙과 여호수아를 함께 언급한 것은(신명 1,36.38 참조) 가나안 땅을 염탐하고 돌아온 정찰대가 그곳을 정복하기 엷다고 하여 사람들이 동요할 때 칼렙만이 주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정복을 독려함으로써(민수 13,25-33 참조), 주님께서 다른 이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지만 칼렙과 그의 후손은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신 사건(민수 14,22-24 참조)을 연상시킨다. 곧 백성 때문에 모세가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음을 주장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시편 저자는 이 두 가지 주제를 혼합하였다. “그들이 므리바 샘에서 그분을 노엽게 하여 그들 때문에 모세가 화를 입게 되었으니 그들이 그의 감정을 상하게 하자 그가 제 입술을 함부로 놀렸기 때문이다”(시편 106,32-33).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믿지 않아 모세가 경솔하게 행동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유다교인들은 성경을 현명하게 해석하여 자기들에게 하느님의 율법을 전해 준 모세의 권위에 대한 도전을 막고 신앙을 잘 보존할 수 있었다.

 

 

유다교인들은 영성 생활을 왜곡하는 성경 말씀을 수정하려고 노력하였다

 

헬레니즘 시대인 기원전 100년경 셈족어로 집필되었으나 그 후 그리스어 번역본으로만 전해진 마카베오기 상권을 유다교에서는 경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다교인의 실상을 보여 주는 그 책에서 유다인 스스로 율법을 재해석하는 사례를 볼 수 있다.

 

시리아 임금 안티오코스가 유다교와 유다인들을 박해하자 정의와 공정을 추구하는 많은 이가 광야로 피난을 갔다. 임금이 큰 군대를 보내 안식일에 그들을 공격하자 그들은 안식일법을 준수하기 위해 반격하지 않고 공격을 받아 죽고 말았다(1마카 2,29-38 참조). 마타티아스와 그의 벗들이 이 소식을 듣고 율법을 다음과 같이 재해석하여 결의하였다. “안식일에 우리를 공격해 오는 자가 있으면, 그가 누구든 맞서 싸우자. 그래야 피신처에서 죽어 간 형제들처럼 우리가 모두 죽는 일이 없을 것이다”(1마카 2,41). 안식일법 때문에 모든 유다인이 죽어 하느님을 찬미할 수 없게 되는 것보다 살아남아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사해 주변에 모여 생활했던 쿰란 공동체가 남긴 문헌을 보면 유다교인들이 명분뿐인 율법을 실상에 맞게 재해석한 사례를 살필 수 있다. 당시 쿰란 공동체에서 잘못된 전통이라고 생각한 규정은 부모님을 봉양할 재물이라 하더라도 하느님께 봉헌하겠다고 서약하면 그 재물로 부모님을 봉양할 의무가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쿰란 공동체에 속하는 다마스쿠스 문서의 저자는 미카서를 언어유희적으로 주석하여 이 문제를 바로 잡으려고 하였다.

 

미카 예언자는 온 백성의 타락을 슬퍼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저마다 제 형제를 그물로 잡는다”(미카 7,2). 다마스쿠스 문서의 저자는 히브리어 단어 ‘그물’이 ‘자원예물(自願禮物)’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자원예물로 형제를 잡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재물을 임의로 하느님께 봉헌한다고 나서서 가족에게 피해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이 전통은 쉽게 고쳐지지 않고 예수님 시대에 이르러서도 문제를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마태 15,3-6; 마르 7,9-13 참조). 하지만 율법 규정이라 하더라도 실상에 맞지 않아 영성 생활을 왜곡할 수 있다면 유다교인들은 과감하게 수정하려고 노력하였다.

 

기원후 70년경 로마 제국의 군대가 예루살렘 도성과 성전을 파괴한 후, 성전 제사와 관련된 지도자들이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라삐들은 유일하게 유다교 지도자로 남아 하느님의 말씀과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쳤다. 라삐들이 성경을 주석하면서 집필한 미드라쉬 문헌은 유다교인들이 파스카 축제를 지낼 때 아버지가 자녀에게 이집트 탈출 이야기를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하면서 네 가지 유형의 자녀를 언급하였다.

 

첫째, “주 우리 하느님께서 부모님께 명령하신 법령과 규정과 법규들이 왜 있습니까?”(신명 6,20)라고 묻는 아들은 지혜로운 아들이다. 둘째, “이 예식은 무엇을 뜻합니까?”(탈출 12,26)라고 묻는 아들은 악한 아들이다. 셋째, “왜 그렇게 하십니까?”(탈출 13,14)라고 묻는 아들은 단순한 마음을 가진 아들이다. 넷째, 어떤 질문도 없이 그냥 아버지가 아들에게 설명하는 경우는(탈출 13,8 참조) 전혀 질문할 능력이 없는 아들이다. 이렇게 라삐들은 미드라쉬 문학을 통해 이미 알려진 성경 말씀으로 모르는 것까지 배우겠다는 원리를 세웠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논리적 추리와 언어학적 관찰을 시도하였다. 라삐들의 목표는 성경 본문을 명확하게 알아듣고 알아들은 것을 실천하려는 데 있었다.

 

유다교인들은 신앙을 보전하고 영성 생활을 발전시키기 위해, 우선 성경 본문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고 일관성 있고 인정할 만하게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또 모든 새로운 상황과 문제에 적용할 수 있는 감춰진 일반 원칙을 추구하면서, 성경에서 확인할 수 없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할 때에도 늘 성경을 기준으로 삼아 연구하고 적용하였다. 바로 이 점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교인이 반드시 배워야 할 자세이다. 비록 해석상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모든 것을 성경에서 알아듣고 배우려는 자세는 그리스도교인의 신앙과 영성 생활을 위해 좋은 본보기가 된다.

 

* 전영준 신부는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영성신학, 영성역사, 신비사상 등을 가르치며,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성서위원회(사도직) 총무로 활동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2년 3월호(통권 432호), 전영준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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