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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성경과 영성6: 안티오키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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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3 조회수4,152 추천수0

성경과 영성 (6) 안티오키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예수님을 구세주로 굳게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불렸을까? 정답은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설립된 뒤 얼마 되지 않은 초세기 중반에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던 신앙인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사도 11,26 참조).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기원전부터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 상황은 조금 다르게 전개되었다. 알렉산드리아에는 오래전부터 유다인 디아스포라(유다인 공동체)가 형성되어 유다교의 영향이 공존하였다. 물론 안티오키아에도 그리스도교가 전래되기 전에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다(사도 11,19 참조). 그러나 안티오키아는 로마 제국의 입장에서 정치 ·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그곳은 로마 제국이 페르시아의 뒤를 이은 파르티아 왕조(기원전 247-기원후 226년) 및 사산 왕조(226-651년)와 전쟁을 치를 때 요충지였기 때문에 로마 제국의 원로원이 파견될 정도였다. 따라서 안티오키아에서는 유다교의 활동이나 세력이 도드라지게 나타나지 않았고, 그리스 문화가 훨씬 번성하였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안티오키아에서 멀지 않은 도시인 킬리키아의 타르수스에서 태어난 사울을 당신의 사도로 부르셨다(사도 9,1-18 참조). 그리스 문화의 영향이 강한 지역에 복음을 전해야 하는 상황에서 바오로만한 인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그런 까닭에 바오로 사도는 안티오키아와 밀접한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아마도 그리스도교인들이 유다와 갈릴래아 지방에서 유다교인들의 박해를 피해 팔레스티나를 벗어나 처음 접한 그리스 문화권 지역인 안티오키아에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상대적으로 크게 설립했던 것 같다. 바오로 사도는 선교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늘 안티오키아에서 여행 준비를 하였다.

 

그러므로 안티오키아에 살던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추종하던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안티오키아에서는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눈에 띄었을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유다교의 색채가 짙어 훗날 전래된 그리스도교에도 큰 영향을 끼쳤고, 안티오키아에서는 유다교의 영향이 적은 가운데 그리스도교가 광범위하게 자리 잡고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안티오키아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성경 해석에서 충돌하였다

 

알렉산드리아에는 플라톤 사상이 크게 영향을 미친 것과 달리 안티오키아에는 오래전부터 현실적 사고방식을 지닌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이론철학’에서 실재(實在)를 변화시키는 궁극적 원인(불변하는 제1원인)을 언급하면서 신학을 다루었다. 그는 또한 ‘실천철학’에서 개인과 사회 구성원으로서 인간의 행위를 규정하면서 윤리학을 다루었다. 비록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이 플라톤 사상처럼 초자연적 신의 영역인 이데아계를 언급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의 사상은 실제로 존재하는 가시적 세계를 다루면서 신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언급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상적 배경을 지닌 안티오키아에서 3세기 중엽에 그리스도교 교리문답을 연구하는 안티오키아 학교가 설립되었다. 안티오키아의 루키아누스가 시작한 이 학교는 5세기 초반까지 전성기를 누리면서 오랫동안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보완적이면서 대립적 관계를 유지하며 신학 발전에 일조하였다.

 

안티오키아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성경 해석에서 충돌하였다. 현실 세계에 중심을 두었던 안티오키아 학파는, 이데아계를 중요시했던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성경에 담긴 의미를 지나치게 우의적으로 해석하여 성경을 환상적으로 만들었다고 비난하였다. 안티오키아 학파는 문자적 의미와 역사적 의미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시 말해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우의적 해석이 성경에 나오는 사건의 역사성과 역사적 의미를 훼손하고 하나의 신화에 기초하여 그리스도교를 건설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알렉산드리아 학파도 안티오키아 학파가 성경의 껍데기만 헤아리는 육적 해석을 하고 있다고 반박하였다.

 

그러나 안티오키아 학파가 늘 문자적 · 역사적 · 문법적 의미만을 중시하며 성경을 해석하지는 않았다. 안티오키아 학파에 속한 그리스도교 주석가들은 구약성경을 이스라엘의 역사에 국한하여 문자적으로만 해석하지 않았고, 신약 시대의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해석해야만 명백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부분은 예형론적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 경우에 안티오키아 학파는 예형론적 해석을 알렉산드리아 학파처럼 광범위하게 적용하지 않고 최소화하여 아주 분명하다고 확신할 때만 적용하였다.

 

 

안티오키아 학파는 예수 그리스도 인성(人性)의 완전성을 강조하였다

 

성경을 해석할 때 역사적 의미를 찾고자 했던 안티오키아 학파는 신약성경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할 때에도 예수의 역사성에 관심을 갖고 역사의 예수님을 강조하였다. 그런 까닭에 안티오키아 학파는 그리스도론을 전개하는 데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에서 출발하였고, 그리스도 인성의 완전성을 강조하였다. 특히 안티오키아 학파는 인간인 예수 그리스도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세상의 유혹을 이겨 냈고 부활을 통해 완전성에 도달하였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 결과 안티오키아 학파의 그리스도론에서는 책임 있게 행동하는 그리스도의 윤리적 가치가 또 하나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게 되었다. 그 후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한 안티오키아 학파는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강조한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오랫동안 그리스도론 논쟁을 펼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한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인정하면서 신성과 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분리될 수 없는 긴밀한 일치와 단일성을 이룬다는 긍정적 관점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그리스도의 인성을 소홀하게 다루는 부정적 면도 드러내었다. 그 결과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주장한 견해의 극단적 형태인 그리스도론적 이단주의(아폴리나리우스주의)가 4세기경에 출현하였다. 아폴리나리우스주의는 원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 아리우스주의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옹호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하였으나 그 노력이 지나친 나머지 그리스도의 인성을 무시하게 되었다.

 

반대로 안티오키아 학파는 아폴리나리우스주의를 강하게 반대하면서 그리스도의 인성을 더욱 강조하였다.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한 안티오키아 학파의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확실하게 구분되어 나타난다는 긍정적 면이 있었다. 하지만 신성과 인성이 너무 독자적 모습을 취하다 보니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긴밀하게 결합되지 않아 단일성이 약화되는 부정적 면도 드러내었다. 그리하여 안티오키아 학파가 주장한 견해에서도 극단적 형태를 지닌 또 다른 그리스도론적 이단주의(네스토리우스주의)가 탄생하였다. 네스토리우스주의는 그리스도 안에 신성과 인성의 독립된 두 인격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 하나의 인격으로서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정통 교리와 대립하였다. 물론 그 후에 또 다시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도 단성론을 주장하는 이단주의가 출현하였지만, 결국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며 두 학파는 교부 시대에 올바른 그리스도론을 정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면서 모든 결론을 귀납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풀었던 안티오키아 학파의 그리스도론은 ‘아래로부터의 상승 그리스도론’이라고 불린다. 이 특성은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집중하면서 경험된 사실을 바탕으로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파악해 나간다. 그리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점차 깨닫게 된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면서 그분을 향해 자신을 투신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서 보여 주신 길을 걸어야 하는 우리는 윤리적 삶을 살아야 한다.

 

안티오키아 학파가 사용했던 신학 방법론은 후대에 다양한 영향을 끼쳤다. 먼저 성경을 이해할 때 문자적 · 역사적 의미에 관심을 가졌을 뿐 아니라, 성경의 인간 저자가 처했던 역사적 상황까지 관심을 갖고 이성적으로 설명하려 노력하였던 점은 훗날 성경 주석에서 역사비평적 방법론의 초석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 안티오키아 학파가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에 기초하여 이성주의적이고 현실적인 접근 방법을 전개한 것은 훗날 중세 서방교회에서 조직적인 스콜라 신학을 전개하는 데 사람들로 하여금 낯설지 않게 하는 간접적 영향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안티오키아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방법론에 차이가 있었을 뿐, 모두 성경 해석에 큰 관심을 가지고 공을 들였다. 그러나 그 차이가 영성 생활의 관점에서 사뭇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 문자적 의미 이상의 것을 탐구하였던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신비적 경향을 나타내면서 하느님과 합일하고자 열망하는 그리스도교인들의 영성 생활에 크게 기여하였다. 반대로 문자적 · 역사적 의미에 대한 탐구에 치중하였던 안티오키아 학파는 경험론과 현실론의 특징을 지니면서 그리스도교인들의 일상생활과 관련된 사목적 관점에 기여하였다. 즉 안티오키아 학파는 피안(彼岸)의 세계를 바라보는 영성 생활에 대한 열의가 다소 부족하였고, 현실 세계에서 윤리적 삶을 추구하는 것을 크게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아무리 성경 말씀을 열심히 읽고 공부하였다 해도 때로는 지나친 이성주의가 영성 생활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 전영준 신부는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영성신학, 영성역사, 신비사상 등을 가르치며,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성서위원회(사도직) 총무로 활동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2년 6월호(통권 435호), 전영준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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