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 성경과 영성8: 북아프리카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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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6-03 | 조회수4,444 | 추천수0 | |
성경과 영성 (8) 북아프리카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오늘날 주민의 98% 이상이 이슬람교를 믿는 북아프리카 지역에도 그리스도교 신자가 있을까? 통계 자료를 살펴보면, 북아프리카 중앙에 위치한 작은 나라 튀니지 국민의 1%가량이 그리스도교 신자이다. 북아프리카 지역이 그리스도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시기는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오늘날의 튀니지 일대에 있었던 카르타고는 기원전 2세기경에 로마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초세기 중엽 로마 제국에 그리스도교가 진출하면서 2세기 말에 카르타고에도 교구가 설정되고 주교좌가 설치되었다. 카르타고 교회는 로마 교회와 함께 5세기까지 서방 교회의 한 축을 이루며 교회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또 오늘날의 알제리 지역에 있었던 히포레기우스라는 도시에도 교구가 설정되어 북아프리카 교회의 중추적 역할을 함께 담당하였다.
그러나 5세기 중엽부터 북아프리카 교회에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였다. 게르만족의 일파였던 반달족이 429년에 북아프리카를 침공하여 히포레기우스와 카르타고를 차례로 함락하고 439년에 반달 왕국을 세웠다. 공교롭게도 반달족은 그리스도교 이단 사상인 아리우스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그리스도교 신자와 교회를 박해하였다. 물론 534년에 동로마 제국이 반달 왕국을 멸망시켜 그리스도교가 다시 자유를 얻을 수 있었지만, 불행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610년에 아라비아 반도 메카에서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이야기하는 무함마드(마호메트)는 622년에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메디나에서 이슬람교 원년을 선포하였다. 632년에는 이슬람교를 근본으로 삼은 우마이야 왕조가 탄생하여 7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아라비아 반도를 거의 정복하였다. 698년에 아라비아인들은 북아프리카를 침공하기 시작하여 705년에 카르타고를 멸망시키고 북아프리카 지역을 이슬람교의 영향권 아래에 놓았다. 그 결과 북아프리카에서는 그리스도교가 쇠퇴하여 거의 자취를 감추었지만, 3-5세기경에는 북아프리카 교회에서 훌륭한 교부가 많이 배출되었고 신학 활동도 활발하였다. 대표 인물로는 카르타고의 주교 치프리아누스와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누스가 있다.
성경을 열심히 읽는 삶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치프리아누스
카르타고의 치프리아누스(200/10-258년)는 이교 집안에서 태어나 문학과 수사학을 배우며 성장하여 유명한 수사학 교사로 활동하다가, 성경을 접하면서 늦은 나이에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었다. 그런 까닭에 치프리아누스는 세례를 받은 뒤에도 늘 성경과 함께 생활하였다. 성경에 대한 그의 남다른 애정은 그가 세례 후 2년 만에 주교가 되어 교구를 책임져야 했을 때에도 참된 진리 안에서 교회의 모든 일을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치프리아누스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하시거나 성령께서 권고를 하시고자 할 때는 늘 성경을 통해 하신다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치프리아누스는 어떤 문제를 해결할 가르침을 얻고자 할 때 한두 구절의 성경 말씀에 의존하지 않고 관련된 다른 구절을 가능한 많이 찾아보고 참고하는 방법론을 제시하였다. 치프리아누스의 저서 중에 《포르투나투스에게》와 《퀴리누스에게》가 대표적인데, 그것은 각 주제와 관련된 성경 구절을 많이 모아 놓은 형태(성경 명구집)로 구성되었다.
치프리아누스는 동방 교회의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에게서 영향을 받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성경 해석 방법론에서는 유사한 점이 많다. 치프리아누스는 구약성경을 주석할 때 예형론적 방법론을 구사하였다. 즉 구약성경에 나타난 인물과 사건은 역사적 가치와 거룩한 의미를 독자적으로 지니지만, 다른 면에서 신약성경과 그리스도를 깊이 연관시켜 영적 의미를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구약성경에 나오는 모든 성조와 예언자가 나름대로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아의 방주 밖에 있었던 사람 모두가 목숨을 구할 수 없었듯이 교회 밖에 있는 사람 역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교회 일치》 6항).
신약성경을 주석하는 치프리아누스의 관점을 엿보는 중요한 이야기도 찾을 수 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이 간청은 영적인 의미와 자구적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데, 두 해설 모두 우리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의도를 나타냅니다”(《주의 기도》 18항). 그는 안티오키아 학파처럼 자구적 의미만 강조하지 않고, 알렉산드리아 학파처럼 영적 의미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치프리아누스는 영적 의미와 자구적 의미를 균형 있게 살펴야 성경에 담긴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되며 영성 생활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치프리아누스는 기도 생활과 함께 성경을 열심히 읽는 삶이 중요하다고 권고하였다. “항구하게 기도하며 영적 독서를 하고, 지금 하느님과 함께 대화하게. 그러면 하느님께서 자네와 함께 계실 걸세”(《도나투스에게》 15항). 그는 성경 말씀을 학문의 대상으로 보고 단순히 진리를 찾기 위해서만 연구하지 않았다. 신앙인이 영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기도뿐 아니라 성경 말씀 읽기(lectio)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늘 강조한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항상 성경 말씀과 함께 했던 치프리아누스는 결국 로마 제국의 박해에 맞서 신앙을 증언하기 위해 기꺼이 순교할 수 있었다.
성경을 이해하는 원칙으로 ‘사랑’을 강조한 아우구스티누스
북아프리카 교회를 대표하는 또 한 명의 교부는 바로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이다. 그는 진리를 찾고자 하는 열의가 강하여 젊은 시절에 마니교에 심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니교에 환멸을 느끼고 결별을 결심한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저서 《고백록》에서 밝혔듯이, 어디선가 “집어 읽어라(Tolle lege)”(제8권, 제12장)는 소리를 듣고 곧바로 성경을 펴서 로마 13,13-14을 읽은 뒤 회심하였다.
물론 아우구스티누스는 진리를 찾아 나선 초창기에 이미 성경을 접했지만, 당시에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역사가 야만스럽게 느껴졌고 성경에 쓰인 문체도 투박하다는 이유로 거부감을 가졌다. 하지만 암브로시우스를 통해 신플라톤 사상의 영향을 받고 영적 해석의 가능성을 깨닫고 난 후부터 구약성경에 대한 나쁜 인상을 바꾸어 성경 말씀을 마음 깊이 받아들였다. 그런 까닭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와 진리에 대한 문제르 연결하여 탐구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성경 말씀에 맛들인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교 역사상 최초로 성경 해석학 교본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교 교양》을 저술하였다. 물론 오늘날과 같은 과학적 방법론을 적용한 주석학을 집필한 것은 아니지만, 신학적 해석학 방법론을 시도하여 고대뿐 아니라 중세까지도 큰 영향을 끼쳤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교 교양》 제2권에서 성경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글자 그대로 알아듣는 문자적 의미를 찾아야 하며, 그것을 위해 일반 학문의 지식도 총동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성경 말씀은 최종적으로 교회의 권위에 따라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제3권에서는 문자와 영을 구분하여 글자 뒤에 숨은 의미까지 깨닫기 위한 원칙을 이야기하였다. 즉 성경에서 우선 자구적 의미를 밝히고, 때로는 같은 구절에 복수의 의미가 있는지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정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표상적 의미도 담겨 있으니 주의를 기울여 파악해야 하는데, 이를 통해 윤리적 · 영적 의미까지 살필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을 이런 관점으로 바라본 아우구스티누스는 구약성경을 예형론적 관점에서 그리스도론적 의미로 탐구하였다. 저서 《시편 강해》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 저자 이면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라고 권고하였다. “예언자가 스스로 말한다 할지라도 진리를 말씀하시는 주님 자신이 그를 통해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56,13). 그렇기 때문에 시편의 다양한 문맥에 나타난 다양한 표상이 예형론적 관점에서 모두 그리스도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계명의 목표는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임을 인식한다면, 또 자기의 성서 이해를 오로지 이 점에 귀결시킨다면, 그는 성서 해독에 안전하게 접근하기에 이를 것이다”(《그리스도교 교양》 제1권, 40,44). 아우구스티누스의 성경 이해의 원칙은 ‘사랑’이었다. 사실 사랑은 윤리적 계명을 실천하는 궁극적 방법이요, 완덕으로 나아가는 여정의 마지막 정점에 위치하여 하느님과의 합일을 완성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을 통해 이미 이러한 점을 깊이 인식하였던 것이다.
고대 교회의 교부들은 성경 말씀을 바라보면서 역사적 가치를 추구하는 문자적 의미와 영적 가치를 추구하는 우의적 의미를 살피고자 하였다. 그러나 결과를 보면 문자적 의미보다 우의적 의미에서 훨씬 쉽게 영성 생활을 이끌어 내어 발전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방 교회 교부들도 성경 말씀을 통해 영성 생활에 대한 염원을 추구했지만,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가 어떻게 하면 믿음을 굳건히 보존할 수 있는지 고민하면서 성경 말씀을 사목적 관점에서 더 많이 사용하였다.
고대 교부들과 당시의 교회는 성경을 묵상하는 영성 생활에 직접 도움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출현한 은수자들은 성경을 묵상하면서 더 깊고 구체적인 영적 발전의 길을 제시하기 시작하였다.
* 전영준 신부는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영성신학, 영성역사, 신비사상 등을 가르치며,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성서위원회(사도직) 총무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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