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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탈출기를 처음 읽는데요: 너희만은 거르고 지나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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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4 조회수4,354 추천수0

[탈출기를 처음 읽는데요] 너희만은 거르고 지나가겠다

 

 

성적표를 받을 때 설레는 학생이 몇이나 될까요? 우등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성적표 받기를 주저합니다. 성적이 뚝 떨어졌다면 근심은 더 커집니다. 부모에게 성적을 확인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쉽게 유혹에 빠집니다. 부모의 도장을 훔쳐 찍거나 사인을 위조하는 경우이지요. 그러고 나서 한동안 부모가 성적표를 보여 달라고 하지 않는다면 ‘완전 범죄’가 됩니다. 사소한 잘못을 저질렀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부모의 지갑에서 돈을 몰래 빼냈는데 부모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여기며 안도합니다. 그런데 정말 부모가 모르고 지나쳤을까요?

 

 

약하고 부족한 우리의 선택은?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마태 10,26). 복음 선포의 사명을 띠고 파견되는 제자들에게 두려움을 떨쳐 버리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분은 하늘 나라의 기쁜 소식이 세상에 드러날 수밖에 없다고 일깨우십니다. 그런데 약하고 부족한 우리는 순간의 위기와 두려움을 모면하기 위해 잔꾀를 부립니다. 그것이 더 큰 화를 불러일으키는 줄 모르고 그러는 것이지요.

 

 

‘파괴자’의 손아귀가 이집트를 할퀴고 지나간 그날 밤

 

하느님께서 파라오와 이집트에 내린 마지막 재앙은 재앙의 완결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집트 맏아들과 맏배의 죽음’이라는 열째 재앙의 원인이 파라오에게 있다고 모세를 통해 분명히 밝히십니다. “그때 파라오가 우리를 내보내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렸으므로, 주님께서 사람의 맏아들부터 짐승의 맏배까지 이집트 땅에서 처음 난 것을 모조리 죽이셨다”(탈출 13,15). 그 고집 때문에 파라오의 맏아들뿐 아니라 선량한 이집트인, 심지어 감옥에 갇힌 포로의 맏아들까지 죽임을 당합니다. “초상나지 않은 집이 하나도 없었”(탈출 12,30)다는 대목을 읽으면 하느님께서 너무하셨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파라오의 잘못이니 그의 맏아들만 치시면 되지 않았을까요?

 

이집트에 큰 곡성이 터진 그날 밤, ‘파괴자’(탈출 12,23)의 손아귀가 이스라엘 백성을 거르고 지나갑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들이 파스카 예식을 치렀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가서 저마다 제 집안을 위하여 작은 짐승을 한 마리씩 끌어다 파스카 제물로 잡아라. 그리고 우슬초 한 묶음을 가져다가 대야에 받아 놓은 피에 담가라. 그것으로 그 대야에 받아 놓은 피를 두 문설주와 상인방에 발라라. 너희는 아침까지 아무도 자기 집 문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탈출 12,21-22).

 

파스카의 밤은 파라오와 이집트인에게 공포와 죽음의 밤이 되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자유와 구원의 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밤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 대가가 바로 파스카 제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 탈출이라는 구원을 거저 받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희생 없이는 구원이 없다’는 점을 그들에게 똑똑히 일러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파스카 축제는 신앙의 정점

 

그런데 탈출 12,1-13,16을 다 읽고 나면, 이야기가 일관성 없이 진행된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파스카 축제와 무교절에 대해 말씀하시는 장면, 모세가 이스라엘의 원로들에게 파스카 축제에 대해 지시하는 장면 다음에야 비로소 열째 재앙이 등장합니다. 재앙을 겪고 백기를 든 파라오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집트를 떠나라고 하여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온 뒤, 파스카 축제 세칙과 맏아들과 맏배의 봉헌, 누룩 없는 빵에 대한 세칙, 맏아들과 맏배의 봉헌 세칙이 나옵니다. 이야기가 파스카 축제에서 계속 맴도는 것 같습니다. 이야기의 절정이라 할 열째 재앙과 이집트 탈출이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듯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스라엘 백성에게 파스카 축제야말로 그들 신앙의 정점이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누룩 없는 빵에 대한 세칙을 말하는 부분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날 너희는 너희 아들에게, ‘이것은 내가 이집트에서 나올 때,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하신 일 때문이란다.’ 하고 설명해 주어라. 이것을 너희는 너희 손에 감은 표징과 너희 이마에 붙인 기념의 표지로 여겨, 주님의 가르침을 되뇔 수 있게 하여라. 주님께서 강한 손으로 너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기 때문이다”(탈출 13,8-9). 이집트 탈출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손수 마련하신 사건입니다.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고통스러운 종살이를 굽어보시고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파스카 축제는 하느님의 구원 업적을 대대손손 기념하게 할 매우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파스카는 하느님 안에서의 새 삶으로 ‘건너가는’ 날

 

그러나 파스카 축제는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잔치가 아닙니다. 누룩 없는 빵과 쓴나물을 곁들여 파스카 제물을 먹으면서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를 되새기는 날입니다. 축제의 주인공은 모인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곧 하느님을 축제의 주빈으로 모시는 사람들의 잔치입니다. ‘거르고 지나가다’는 뜻의 파스카는 새해 첫날 낡은 것을 버리고 묵은 때를 벗겨내면서 신앙의 여정을 새롭게 시작하는 날입니다. 귀찮아서, 몰라서, 하기 싫어서 거르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구속과 억압, 부패와 타락에서 벗어나 하느님 안에서의 새 삶으로 ‘건너가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어린양으로서 파스카 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한 그분의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희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세례를 받았다고 모두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고 하신 예수님처럼 자신을 내놓는 사랑을 하지 않는다면 구원은 잡을 수 없는 뜬구름에 그치고 맙니다. 거르고 지나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잘 식별하여 실천하는 삶이 오늘 우리의 파스카 축제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5월호(통권 446호),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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