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탈출기를 처음 읽는데요: 그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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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6-04 | 조회수4,519 | 추천수0 | |
[탈출기를 처음 읽는데요] 그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
21년 전에 방영되어 56.1%라는 놀라운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가 있습니다. 최수종과 고故 최진실 주연의 [질투]입니다. 1992년의 여름을 뜨겁게 달군 이 드라마는 젊은이들의 사랑과 우정을 감각적 영상과 신선한 연출로 표현했습니다. 한밤중에 편의점에서 라면을 먹는 장면, 내숭 떨지 않고 자기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장면은 당시의 신세대 문화를 잘 보여 주었습니다. 종영한 지 세월이 꽤 흘렀는데도 등장인물과 장면보다 더 깊이 기억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드라마 주제가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질투를?
“넌 대체 누굴 보고 있는 거야/ 내가 지금 여기 눈앞에 서 있는데/ 날 너무 기다리게 만들지 마/ 웃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유승범 노래). 제목은 ‘질투’인데, 가사에 ‘질투’라는 말은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질투의 이유로 여겨지는 부분은 “나의 마음 전하려 해도 너의 눈동자는 다른 말을 하고 있잖아”입니다. 노랫말의 주인공은 서로를 잘 아는 것을 사랑이라 여겼다며 언젠가는 사랑을 고백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은 이 노랫말을 불쑥 꺼낸 이유는 탈출기의 한 구절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름은 ‘질투하는 이’, 그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탈출 34,14).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질투를 하시다니! 조선 시대에 질투(투기)는 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일곱 가지 이유 중 하나로 혼인한 여인에게 큰 죄악이었습니다(七去之惡). 사극을 보면 왕비가 승은을 입은 후궁을 질투하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데, 그때 대비나 대왕대비가 왕비에게 투기를 한다고 꾸짖습니다. 이렇듯 질투는 ‘국모’라고 일컫는 왕비도 해서는 안 되는 짓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느님께서 질투를 하실까요?
금송아지 사건이 터지다
‘질투하는 하느님’이라는 말씀이 어떻게 나오는지 찬찬히 살펴봅시다. 이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계약을 맺을 때 나온 말씀입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첫 번째 계약은 십계명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십계명과 더불어 여러 법규를 일러 주십니다. 모세가 모든 계약이 담긴 책을 백성에게 읽어 주자, 백성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실행하고 따르겠습니다”(탈출 24,7) 하고 분명히 약속합니다. 그 뒤 모세는 시나이 산으로 다시 올라갑니다. 모세가 산 위에서 성소 건립 등에 관해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동안, 산 아래에서 그 유명한 ‘금송아지 사건’이 터집니다.
“금송아지가 너의 신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오랫동안 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불안하고 초조해합니다. 자신들을 이끌 지도자는 코빼기도 안 보이고, 황량한 광야에서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자 모세를 대신하여 백성을 이끄는 아론이 말합니다. “여러분의 아내와 아들딸들의 귀에 걸린 금 고리들을 빼서 나에게 가져오시오”(탈출 32,2). 아론은 모인 금으로 수송아지 상을 만듭니다. 황소는 원래 고대 근동 지방에서 성적 경향을 띤 종교의 신상이었는데, 아론이 왜 수송아지 상을 만들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는 그저 백성의 반발을 잠재우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백성은 금송아지를 보고 외칩니다. “이분이 너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너의 신이시다”(탈출 32,4). 하느님께서 금송아지 형상으로 백성에게 머물겠다고 하신 적이 없는데, 그들은 금송아지를 하느님으로 삼습니다. 그들 입맛에 맞는, 그들 소유의 신을 만들어 낸 명백한 배신입니다.
“참으로 목이 뻣뻣한 백성이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느님께서 금송아지 사건을 모르실 리 없습니다. 그분께서 진노하십니다. “내가 이 백성을 보니, 참으로 목이 뻣뻣한 백성이다.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마라. 그들에게 내 진노를 터뜨려 그들을 삼켜 버리게 하겠다”(탈출 32,9-10). 이는 이집트 임금 파라오와 그의 군대에게 하신 말씀과 같아 보입니다. 고마워할 줄 몰라 목이 뻣뻣한 백성에게 그분께서 진노하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누가 봐도 이스라엘 백성은 큰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그들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가장 고귀하고 소중한 것, 곧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망가트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애원합니다. “어찌하여 당신께서는 큰 힘과 강한 손으로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당신의 백성에게 진노를 터뜨리십니까?”(탈출 32,11) 모세의 간청에 하느님께서 마음을 누그러뜨리십니다. 그러나 사건은 그 상태로 흐지부지되지 않습니다.
다시 계약을 맺으시는 하느님
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하느님께서 손수 써 주신 증언판 두 개를 내던져 깨 버립니다. 금송아지를 불에 태우고 가루가 될 때까지 빻아 물에 뿌리고서 백성에게 마시게 합니다. 믿음이 충실한 레위인들로 하여금 주님의 편에 서지 않는 자들을 죽이게 합니다. 그렇게 죗값을 치른 뒤 모세는 하느님께 용서를 청합니다. “아, 이 백성이 큰 죄를 지었습니다. 자신들을 위하여 금으로 신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탈출 32,31-32).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다시 돌 판 두 개를 가지고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야훼’라는 이름을 선포하고 다시 계약을 맺으십니다. 두 번째 계약(탈출 34,10-28 참조)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과 하느님의 은총(자비·용서)까지 표상합니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 그러나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고 조상들의 죄악을 아들 손자들을 거쳐 삼 대 사 대까지 벌한다”(탈출 34,6-7)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하느님의 질투는 지극한 사랑
금송아지만 바라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습니다. “너희는 대체 누굴 보고 있는 거냐? 내가 지금 여기 너희 앞에 서 있는데….” 그분의 질투는 그저 기분 나쁜 감정이 아닙니다. 인간을 죄악에서 구해 주고자 하는 지극한 사랑입니다. 그분의 분노는 서릿발 같지만, 용서는 부드러운 바람과 같습니다. 그런 그분에 의해 정화되면 모세처럼 하느님의 사람으로 빛나게 됩니다(탈출 34,29-30 참조). 질투하시는 하느님을 여러분은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그분의 질투는 구원의 참빛을 보게 하는 죽비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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