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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화] 복음 속 풍습과 친해지기: 의회를 소집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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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4 조회수5,259 추천수0

[복음 속 풍습과 친해지기] 의회를 소집하고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의회를 소집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해의 대사제인 카야파가 말하였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이다. …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요한 11,47-53).

 

 

산헤드린의 기원과 역사

 

최고 의회를 가리키는 말 ‘산헤드린’은 ‘회합’, ‘협의회’를 뜻합니다[그리스어 synedrion=syn(함께)+hedra(앉다)에서 기원]. 산헤드린은 유다인의 종교적 · 행정적 · 법적 지도 기관이었고, 집회 장소는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성경에서는 그 기원을, 모세가 자신을 도와 백성을 다스릴 원로 70명을 세운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탈출 24,1; 민수 11,16-17 참조). 그러나 실제로는 바빌론 유배 시기에 생긴 종교 지도자들의 모임이 산헤드린의 모태가 되었다고 보는 설이 유력합니다. 기원전 63년부터 로마 제국의 지배가 시작되자 각지의 산헤드린은 다섯 개로 통합되었고, ‘예루살렘 산헤드린’이 역할을 주도했습니다. 그들은 차츰 정치 세력을 갖게 되었고, 유다인의 모든 문제에 자문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러나 기원후 66년부터 시작된 ‘유다 독립항쟁’에서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고, 패전한 70년 이후에는 공적으로 해산되어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산헤드린의 역할과 권한

 

신약 시대에 산헤드린은 현직 대사제를 의장으로 하고, 원로들과 전·현직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 가운데 선발된 의원 71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마르 14,53 참조). 산헤드린은 유다 지역에서 율법을 거스르는 중대한 범죄를 판결하는 최고 재판 기관이었습니다. 산헤드린이 열릴 때 의원들은 마주볼 수 있도록 반원형으로 앉았으며, 그들 앞에는 회의의 결정 사항을 기록하는 서기가 두 명 있었습니다.

 

산헤드린의 주요 업무는 할라카(Halakha), 곧 유다인의 ‘종교 법’을 공표하는 일이었고, 그밖에 종교와 사회 문제 전반을 다루었으며 법원 역할도 했습니다. 산헤드린의 판결은 벌금형이 주를 이뤘지만 가끔 실형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통치 시기에 산헤드린의 역할은 유다인의 종교 문제에 국한되었고, 로마 총독이 속주의 질서 유지와 관련된 최종 책임을 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행정관인 총독의 재가를 받아야 실형을 선고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최고 의회’에 끌려 가셨고(마태 26,57-66 참조), 사도들 역시 그곳에서 신문을 받았습니다(사도 4,5-21 참조).

 

 

예수님과 산헤드린

 

산헤드린은 예수님을 재판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의원들은 예수님을 체포하여 대사제의 집에서 산헤드린 법정을 열었습니다. 증인들로 하여금 예수님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게 한 다음, 예수님의 입에서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이 나오도록 유도했습니다. 당시 대사제였던 카야파가 자신의 옷을 찢음으로써 예수님의 혐의를 신성 모독죄로 확정했습니다(마르 14,53-64 참조).

 

그러나 복음서에 보도된 ‘산헤드린의 재판’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첫째, 산헤드린에서는 중요한 사안을 주로 낮에 다루는데, 예수님에 대한 재판은 밤에 열렸습니다. 둘째, 축제 기간에는 재판하지 않는 것이 관례이며, 사형 선고일과 집행일은 통상 다른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가장 큰 축제인 파스카 축제 때 체포되시어 그날 산헤드린 재판을 거쳐 빌라도에게 십자가형을 언도받은 뒤 즉시 사형을 당하셨습니다. 셋째, 재판이 정규 재판 장소인 산헤드린 법정 건물이 아니라 대사제의 집에서 열렸습니다.

 

이러한 문제점은 제도권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그만큼 크게 위기 의식을 가졌다는 방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산헤드린은 예수님과 같은 종교 지도자가 나타나 군중이 그를 따르면 그를 제거해 세력을 궤멸하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사도 5,35-39 참조). 그리고 반드시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에서 거짓 예언자를 다루었다는 점, 산헤드린에는 사형 판결권이 없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겼다는 점에서 이 사건의 역사성을 읽을 수 있습니다.

 

산헤드린은 유다인의 종교적·행정적·법적 지도 기관으로서 최고 권한을 지닌 엘리트 집단의 모임이었지만,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분을 십자가형에 처했습니다. 의원들은 자신이 지닌 성경과 율법에 대한 지식과 특권에 얽매여, 살아 계신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사순 시기,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을 활짝 열어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기를 바라십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3월호(통권 456호),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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