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문화] 복음 속 풍습과 친해지기: 길을 떠날 때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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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8-06-04 | 조회수4,414 | 추천수0 | |
[복음 속 풍습과 친해지기] 길을 떠날 때에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마르 6,6-12).
예수님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여행했을까
현대인에게 여행이란 떠올리기만 해도 숨통이 트이는 듯 설레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 여행은 지금처럼 휴가나 관광, 견문을 넓히기 위한 체험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위험을 감수하는 고된 일이었습니다(2코린 11,26-27 참조). 그들은 샌들을 신고 호신용 지팡이 하나에 의지해 돌과 웅덩이로 울퉁불퉁한 길을 걸어 다녔습니다. 광야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일도 흔했습니다(시편 107,4 참조).
한편 ‘와디’는 비가 올 때만 물이 흐르기에 건기에는 길이 되었습니다.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가는 3-4월은 우기가 끝나고 건기가 시작되는 시기인데, 길이 질척거려 여행자들이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팔레스티나 지역은 한낮이 되면 걷기 힘들 정도로 햇볕이 뜨거워(요한 4,6 참조), 사람들은 무더위를 피해 이른 아침이나 오후 늦게 길을 떠났습니다. 해가 지면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지만 모닥불을 피워 추위를 피할 수 있으므로, 강도의 위험(루카 10,30 참조)만 없다면 저녁이 걷기에 훨씬 수월했습니다. 동방박사의 경우처럼 중동 지역에서 천문학이 발달한 데는 밤에 여행하는 관습 덕도 있을 것입니다(마태 2,1-12 참조).
여행자들은 대부분 나귀에 짐을 싣고 걸어서 이동했는데, 기원전 2000년경부터는 낙타를 길들이기 시작했습니다. 낙타는 물이나 먹이를 먹지 않고도 일주일 정도 견딜 수 있어 유목민에게 매우 중요한 운송 수단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소처럼 식용으로 쓰였습니다. 털로 옷을 지어 입고(마르 1,6 참조), 가죽은 신발이나 옷감으로 쓰며, 뼈로 인장을 만들었습니다. 배설물을 잘 말려 땔감으로도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다리가 긴 낙타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몸이 심하게 흔들려 멀미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가격이 비싸고 관리에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반면 나귀는 키가 작아 아이도 편하게 탈 수 있었고(탈출 4,20 참조), 농사에도 쓰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를 중심으로 이스라엘 안에서 활동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선교하기 위해 배를 타고 다른 나라까지 다니곤 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다를 두려워했지만, 로마 제국이 이스라엘을 통치하면서 항해가 빈번해졌습니다. 해상 여행자들의 처지는 고달팠습니다. 그들은 화물의 일부처럼 취급되었고, 먹을 것을 가지고 다녀야 했으며, 저녁에는 뭍에 내려 잠을 자야 했습니다. 배는 안전을 위해 해안선 가까이로만 다녔으므로 여행 기간은 매우 길었고, 조난 사고도 잦았습니다(사도 27장 참조).
여행자 예수님
예수님의 여행은 어떤 의미에서 태어나기 전에 시작되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던 예수님께서는 유다 산악 지방으로 가서 친척 엘리사벳을 만나셨고(루카 1,39-41 참조), 그분의 부모가 호적 등록을 하러 베들레헴에 가 있는 동안 태어나셨습니다(루카 2,4-7 참조). 태어나자마자 헤로데가 죽이려 했으므로 이집트로 피신하셔야 했고(마태 2,13-15 참조), 헤로데가 죽은 뒤에야 가족과 나자렛으로 가서 자리를 잡으셨습니다(마태 2,19-23 참조).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루카 2,41)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여행길의 위험 때문에 여러 사람이 함께 여행하기도 했는데, 그런 경우 아이들만 따로 모아 주변 어른이 보살폈기에, 예수님의 부모가 하룻길을 간 다음에야 아들이 무리에 없음을 알게 된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루카 2,41-45 참조).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동안 온 갈릴래아를 다니며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마르 1,38-39 참조). 떠돌이 설교자인 그분에게는 머리를 둘 곳도 없었고(마태 8,20 참조), 군중에 둘러싸여 음식을 드실 겨를조차 없었으며(마르 6,31 참조), 호수에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였는데도 계속 주무실 정도로 피곤하셨습니다(마태 8,24 참조).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루카 13,33). 예수님께서는 목숨을 바쳐 모든 이를 구원하는 사명을 완성할 예루살렘을 향해 당신의 길을 꿋꿋이 가셨습니다(마르 10,32-34; 루카 4,28-30 참조). 마침내 스스로 길이 되셨습니다(요한 14,6 참조).
지난 8월 16일, 주님의 길을 오롯이 따른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가 시복되어 한국 천주교회에 큰 기쁨과 영예를 안겨 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 시복되지 않은 최양업 신부를 비롯하여 이름 없는 순교자와 증거자들이 많습니다. 그분들을 기억하면서 순교자의 후예로서 순교 영성을 삶으로 드러내는 일이 오늘 우리의 과제일 것입니다.
“유학을 떠난 지 13년 만인 1849년 12월 말에 귀국해서 선종할 때까지 최양업 신부가 이동한 거리는 9만여 리나 된다. 마카오 유학길과 마닐라 피신길이 1만 5천 리요, 귀국로 탐색을 위한 여정이 3만 리요, 귀국 후의 교우촌 순방 여정이 도합 4만 5천 리였다. 여기에 보이지 않는 작은 여정들을 더한다면 최양업 신부가 일생 동안 누벼야 했던 거리는 10만 리가 훌쩍 넘을 것이다”(‘최양업 신부의 삶과 영성’, 〈경향잡지〉 2011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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