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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창세기, 이게 궁금해요: 하느님은 왜 사람을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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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4 조회수5,474 추천수0

[창세기, 이게 궁금해요] 하느님은 왜 사람을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셨나요?

 

 

* 신앙생활을 하면서 거듭거듭 죄를 짓는 저희를 하염없이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통해 큰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사람을 사랑하시어 예수님을 보내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는 하느님께서 왜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셨나요? 원죄가 그토록 큰 죄인가요?(20대 박 데레사 님)

 

 

참 속상하죠? 엄하신 하느님이 무섭기도 하고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 이야기를 읽다 보면 문득 예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무슨 일로 잘못해서 무릎 꿇고 꾸중 듣다가 매를 든 아버지를 피해 집 밖으로 도망갔어요. 하릴없이 동네만 돌아다니다 어두워서 집 대문가에 왔지만 들어가기가 겁났습니다. 누군가 나와서 저를 데려가 주면 참 좋겠는데, 닫힌 대문 앞에서 혼자 울고만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도 하느님의 진노를 상징하는 불 칼 앞에서 그렇게 울었을까요?

 

창세 2-3장은 에덴으로 시작하여 에덴으로 끝납니다. 창조된 사람은 에덴 동산에 사는 놀라운 혜택을 받았지요. 그가 그 동산에서 계속 살 수 있는 길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2,17)라고 하느님께서 경고하셨지요. 그때 아담은 죽는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그런데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은 사람과 여자는 그 즉시 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람, 곧 아담은 930년이나 살았습니다(5,5 참조). 그렇다면 하느님의 말씀은 거짓이고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3,4)고 한 뱀의 말이 참된가요? 헷갈립니다. 1장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지는 힘을 지녔는데, 2장에서는 헛되이 사라지는 허풍이었나요?

 

 

돌아갈 수 없는 땅, 에덴 동산

 

구약성경은 죽음을 좀 더 근원적으로 이해합니다. 사람은 하느님에게서 생명의 숨을 받아 생명체가 되었기에 하느님께서 그 숨을 거두어 가시면 죽습니다. 숨이 끊기고 심장이 멎는 현상을 몸의 죽음으로 보지만, 신앙의 관점에서 죽음은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과 분리되는 것입니다. 사람과 여자가 선악과를 따 먹고 하느님을 두려워하여 숨는 데서 그분과 멀어진 모습이 처음 드러납니다.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3,19)는 하느님의 말씀은 그들이 처할 운명, 죽음을 확인해 줍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영역에서 벗어났음을 확정하여 알려 주는 것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는 일입니다. 이 추방은 하느님과 사람이 분리되었음을 공간의 구분으로 분명하게 보여 주는 표지입니다. 불 칼은 이중성을 지닌 사람들에게 이제 말이 아닌 힘으로 대응하겠다는 그분의 뜻을 드러내는 듯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처음에 사람에게 영생의 가능성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사랑과 은총에서 흘러나온 특별한 선물이었습니다. 그분은 선과 악을 아는 당신을 경외하면서 그것을 바로 아는 지혜도 점차 배워 알기를 바라셨습니다. “보아라, 주님을 경외함이 곧 지혜며 악을 피함이 슬기다”(욥 28,28). 그런데 죽을 운명으로 창조된 사람은 그분이 주시는 생명보다 자기만의 지혜를 선택하였습니다. 하느님의 경고 말씀을 귓등으로 듣고 뱀의 말을 더 신뢰하였습니다. 하느님을 의심하고 스스로 “하느님처럼”(3,5) 되고 싶은 욕망에 몸을 맡겼습니다. 경계선을 침범한 결과로 사람의 삶은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어떤 의식이 열렸습니다만, 그 의식의 성장이 사람에게 참된 생명을 주지는 못합니다. 사회와 문화가 발전해도 사람의 한계에서 이루어지는 제한된 성취일 뿐입니다(11장의 바벨 탑 이야기에서 더 분명하게 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생명나무 열매를 따 먹을 수 없도록 그들을 동산에서 추방하십니다. 이 일은 가중처벌이 아니라 이미 벌어진 일의 마무리입니다. 하느님과 그분 말씀을 거슬러 행동하여, 사람에게 죽음과 고난, 수고와 죄는 뗄 수 없는 삶의 여건이자 현실이 되었습니다. 영생의 가능성은 원천적으로 막혔습니다. 그 뒤로 사람이면 누구나 처하게 되는 이러한 상태, 죄로 향하는 본성을 타고나는 것을 흔히 ‘원죄’라 부릅니다. 원죄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깨트린 결정적 잘못입니다.

 

 

동산 밖 동쪽에서 가야 할 곳은?

 

문밖에서 울던 소년은 그 울음소리를 들은 어머니가 나와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꾸중과 꿀밤 한 대로 사건은 마무리되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다 하여 사람의 삶이 끝나거나 하느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지는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추방하기 전 그들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주십니다(3,21 참조). 두렁이에서 비롯된 옷은 수치를 가리는, 죄 지은 사람의 새로운 삶의 방식을 보여 주는 표지입니다. 하느님께 죄를 지었고 그분과 멀어졌다는 표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달라진 상황을 그대로 수용하신 다음 좀 더 견고한 가죽으로 그들의 약함과 수치를 덮어 주십니다(에제 16,8-14 참조). 은총이요 구원의 행위입니다.

 

사람은 동산 안에서도 동산 밖에서도 여전히 흙을 일구며 살게 됩니다(2,15; 3,23 참조). 사실 죄로 손상된 사람이 영생을 받아 계속 사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뿐더러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손상된 부분을 회복한 뒤에야 생명의 가치가 드러나고 그 생명을 지속할 의미가 생깁니다. 그 회복이 구원입니다.

 

이제 이야기는 동산 밖 삶을 들려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동산 추방의 체험을 역사의 고비마다 되새겼습니다. 주민들의 죄악이 가득 차면 약속의 땅에서 살 수 없게 되어 내쫓기고 흩어지게 된다는 것을 왕국의 멸망과 유배에서 깊이 깨칩니다. 어쩌면 그 체험과 깨달음이 이 이야기에 배어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창세 2-3장은 그리스도교에서 거듭 읽히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의미를 더욱 깊이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에덴 동산으로 다시 데려가지 않으시고, 에덴보다 더 놀라운 새 하늘 새 땅을 약속하십니다. 생명나무가 자라고 생명수의 강이 흐르는 곳입니다(묵시 20-22장). 그리고 이 이야기에 앞서는 창세 1장에는 하느님의 강복이 세 차례나 나옵니다(매튜 폭스는 이를 원복原福이라 부릅니다). 창조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과 강복이 더 근원적으로 창조 세계를 지탱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그 사랑이 원죄의 세력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전 과정을 보여줍니다. 성경을 계속 읽으면서 그것을 알고 싶지 않으세요?

 

* 이용결 님은 본지 편집부장이며 말씀의 봉사자로 하느님 말씀과 씨름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4월호(통권 445호), 이용결 루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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